농업과 복지를 결합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케어팜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사진은 남양주 해피트리요양원의 힐링정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농업과 복지를 결합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케어팜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사진은 남양주 해피트리요양원의 힐링정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네덜란드 소도시 헴스케르크호(Heemskerk)에 있는 치매환자 거주시설 드레이헤르스후버에는 중증치매 노인이 30명 가까이 살고 있다. 침상만 즐비한 우리나라의 요양원과 달리 이곳은 드넓은 농장이다. 농장은 정원과 텃밭, 유리온실 등으로 이뤄져 있고 닭, 당나귀, 염소, 돼지 등 동물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노인들이 거주하는 건물은 문을 열면 바로 정원이다. 네 동의 건물에 연령대별로 모여 사는 노인들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처럼 자유롭게 생활한다. 원하는 때에 일어나 동물을 돌보고 텃밭을 가꾸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드레이헤르스후버를 만든 사람은 헨크 스미트씨이다. 그는 중증치매로 요양시설에 입원한 장인 면회를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원 가꾸기와 산책을 좋아했던 장인은 의자에 묶인 채 요양원 건물 안에 갇혀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치매환자들이 인간답게 마지막을 보낼 수 있는 곳을 만들자고 결심한 스미트씨가 구상한 것은 농장형 요양원이었다. 그는 헬스케어와 보건정책 등을 공부한 딸과 함께 7년 걸려 현재의 시설을 만들었다. 이곳은 대기자가 수백 명에 이른다.

드레이헤르스후버처럼 복지와 농업을 결합해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곳을 네덜란드에서는 ‘케어팜(Care Farm)’이라고 부른다. 네덜란드 전역에는 이런 케어팜이 1250여곳이 있다. 동물을 통해 자폐, 행동장애 아이들의 치유를 돕는 굿랜드케어팜, 약물중독자들의 재활을 돕는 린덴호프오픈가든, 우리나라의 주간보호시설처럼 치매 노인들을 돌보는 에이크후버농장 등 케어팜마다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은 모두 조예원 바흐닝언케어팜연구소 대표가 ‘네덜란드 케어팜을 가다’라는 책에서 소개한 곳이다.

네덜란드 소도시 헴스케르크호에 있는 케어팜 드레이헤르스후버. 중증 치매환자들을 위한 거주형 시설로 드넓은 농장에서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photo 바흐닝언케어팜연구소
네덜란드 소도시 헴스케르크호에 있는 케어팜 드레이헤르스후버. 중증 치매환자들을 위한 거주형 시설로 드넓은 농장에서 다양한 활동이 가능하다. ⓒphoto 바흐닝언케어팜연구소

치유농업, 사회적농업, 케어팜

조 대표는 네덜란드 농업 연구의 중심인 바흐닝언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다 케어팜을 만난 후 한국에 네덜란드식 케어팜을 이식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조 대표에 따르면 네덜란드에서 케어팜이 확산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농업활동이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더 큰 요인은 농업 경쟁력이 약화되면서 경영난을 겪는 농장주들이 케어팜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치매뿐 아니라 지체장애, 중독자 등 돌봄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케어팜을 이용할 때 비용을 지자체에서 부담하는 바우처 프로그램 등 제도적 지원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1999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농업과케어국가지원센터’를 설립하고 케어팜이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게 시스템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업고 케어팜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케어팜들은 정부에서 지원하는 바우처 예산에만 의존하지 않고 농장 체험, 농산물·가공식품 판매 등 특색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안정적인 수익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케어팜에 따라 복지 예산이 80~90%를 차지한 곳도 있고 50%까지 자체 수익구조를 만든 곳도 있다. 농업과 복지, 출발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복지 중심에 농업을 결합한 곳은 복지 예산 의존도가 높고, 농업에서 출발해 돌봄을 접목한 경우는 수익활동에 좀 더 적극적이다. 어느 쪽이든 공통점은 지역사회와의 연대이다. 케어팜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민은 자원봉사자로 케어팜을 돕는다. 네덜란드의 케어팜은 북유럽, 서유럽 등으로도 확산됐다.

국내에는 아직 본격적인 케어팜이 없지만 한국형 케어팜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은 활발하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치유농업’ 쪽이다. 올해 ‘치유농업 연구개발 및 육성에 관한 법률’(치유농업법)이 시행되고 실무진 육성을 위해 치유농업사라는 국가자격증 제도가 만들어졌다. 한경대 치유농업학과 등 전국 11곳을 양성기관으로 선정하고 지난 8월 2급 치유농업사 교육 과정을 모집했는데 순식간에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경쟁률이 8 대 1에 달한 곳도 있었다. 총 142시간의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시험 자격이 주어지는데 제1기 자격시험은 오는 11월에 예정돼 있다. 농촌진흥청에도 치유농업사업추진단이 만들어졌다. 서울시농업기술센터도 치유농업센터를 만들고 시설형 치유농장, 농장형 치유농장 등 모델을 조성해 서울 시내에 도심 치유농장을 보급,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케어팜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시작 단계이다 보니 아직 개념 정립도 안 돼 있다. 용어도 치유농업, 사회적농업, 케어팜 등이 혼재돼 있다. 치유농업법에 따르면 치유농업은 농업, 농촌을 치유 자원으로 만들어 국민의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건강을 돕는 것이다. 사회적농업은 농업 자원을 활용해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게 돌봄,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비슷한 듯 다르지만 농업과 치유, 돌봄이 결합된 케어팜으로 묶인다고 보면 된다.

현재 치유농업은 농림축산식품부 주도로 6차산업이라는 틀 안에서 농촌의 새로운 성장 산업으로 접근하다 보니 네덜란드형 케어팜과는 거리가 있다. 돌봄 비용을 지원할 근거가 될 사회적 농업 육성법은 법안이 발의되기는 했지만 법 제정까지는 아직 요원하다. 케어팜은 농업과 복지 두 가지 축이 함께 가야 가능하다. 네덜란드도 농업부와 보건복지스포츠부가 함께 뛰어들어 제도를 만들고 촘촘하게 시스템을 만들어갔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한국형 케어팜을 꿈꾸는 사람들

갈 길은 멀지만 농업이 출발이든 돌봄이 출발이든 케어팜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경기도 남양주시 해피트리요양원은 10층 건물의 꼭대기층에 있다. 간판들로 빼곡한 건물 밖에서는 상상할 수 없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 내리면 녹색 정원이 펼쳐진다. 1320여㎡(약 400평)에 달하는 정원에는 산책길을 사이에 두고 소나무, 대추나무가 큰 그늘을 만들어주고 포도 넝쿨, 박 넝쿨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텃밭에는 토마토, 고추, 가지, 파, 오이, 상추 등 없는 채소가 없다. 미꾸라지가 살고 있는 미나리꽝도 있다.

장공자 해피트리요양원장이 메리골드 꽃차를 내왔다. “정원에 핀 메리골드를 할머니들과 함께 말려 차로 만들었다”면서 “비 올 때는 텃밭에 있는 부추로 전도 해 먹고 참외도 따서 같이 나눠 먹는다”고 말했다. 장 원장은 2012년부터 같은 건물 6층에서 요양원을 하면서 정원도 없는 건물에 노인들이 갇혀 지내는 것이 늘 안타까웠다. 그러다 넓은 테라스가 있는 10층 공간이 매물로 나오자 덥석 잡았다고 한다. 2300여㎡(약 700평)의 공간은 요양원과 주야간보호시설이 990여㎡(약 300평)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정원이다. 처음에는 덜렁 소나무 한 그루만 있던 곳을 녹색의 힐링 정원과 텃밭으로 조성했다. 시설 어르신들은 정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빛 좋은 날에는 주로 밖에 나와 놀이며 프로그램을 한다. 명절 때는 정원에서 작은 공연도 연다.

장 원장은 3년 전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3국으로 케어팜 견학을 다녀온 후 좀 더 큰 꿈을 꾸게 됐다. “인상 깊었던 것은 시설과 지역사회가 소통이 잘되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의 경우 시설에 맡기면 끝인데 그곳은 지역민들이 함께 시설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제도와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자원봉사자들 네트워크도 아주 잘돼 있었어요. 땅이나 시설을 정부에서 제공하니 비용 부담 없이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지 케어팜을 운영할 수 있다는 것도 부러웠습니다.”

유럽형 케어팜을 마음에 담고 있던 장 원장은 최근 기적처럼 2만3140여㎡(약7000평)의 땅을 구입하고 꿈의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장 원장은 이곳에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 3300여㎡(약 1000평)에는 요양원, 유료 양료시설, 실버타운을 짓고 나머지는 둘레길, 정원, 텃밭을 조성하고 카페도 만들어 외부인 체험도 가능하게 할 계획이다. 취약계층에 일자리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으로 운영하고 특히 18세가 돼서 보육원을 퇴소해야 하는 청년들을 거둘 생각이다. 시설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들이 이들에게 훌륭한 멘토가 돼줄 것이고 노인과 아이들이 세대 교류를 할 수 있게 하고 싶다.

장 원장은 “수익사업으로 접근하면 힘듭니다. 요양원에 가더라도 사회와 단절되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 세대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에 있는 ‘더힐링팜’의 김숙자 대표는 복지와 농업, 치유가 결합된 치유공동체를 계획하고 있다. 2만5500여㎡(약 8000평)의 부지 일부는 정신장애인, 노인 등을 위한 그룹홈을 만들고 노인주간보호센터, 치매센터 등 지역 사회복지시설과 연계해 농장 체험을 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무엇보다 치유농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치유농업을 경험하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려고 한다. 일부는 주말농장과 치유농업을 하고 싶어 하는 전업농에게 임대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치유농업에 꽂혀 네덜란드 케어팜 견학도 다녀오고 식품기능사 등 자격증도 땄다. 화성시 치유농업 자문위원도 하고 있다. 오랫동안 준비를 많이 했다는 김 대표는 할 말도 많다고 했다.

“케어팜은 의료, 복지, 농업을 모두 아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농업인이 하려면 의료, 복지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가르쳐야 하고 의료인이 하려면 농업을 가르쳐야 하고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식견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농촌 살리기와 6차산업 발전이라는 키워드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부딪쳐 보니 시스템도 제도도 허점이 많습니다. 실제 케어팜을 할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치유농업사 육성 과정의 선정 기준만 놓고 봐도 농업 관련 자격증 소지자로 한정해놓고 보건의료 가점도 임상심리사에게만 주다 보니 실제 현장에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작 기회가 가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치유농업’이라는 키워드로 첫걸음을 뗀 한국형 케어팜 확산을 위해 다양한 사회적 고민이 절실해 보인다.

요즘 노인들은 몸이 아파도 자식들에게 이야기를 안 한다고 한다. 혹여 요양병원에 보낼까 봐 무서워서 그렇단다. 노인들에게 요양병원은 가고 싶지 않은 곳,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다. 죽 늘어선 침상에 누워 콘크리트 벽을 바라보면서 연명하는 곳이 아니라 돌봄을 받으면서 텃밭에서 소일하고 자유롭게 삶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안 갈 이유가 없다. 존엄한 노후를 위한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논의를 지금 시작해야 한다.

인터뷰 | 조예원 바흐닝언케어팜연구소 대표

“네덜란드 케어팜의 성공 포인트는 환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한 것”

 ⓒphoto 바흐닝언케어팜연구소
ⓒphoto 바흐닝언케어팜연구소

안 바쁘게 살려고 네덜란드로 공부하러 갔는데 더 바빠졌다. 케어팜, 치유농업이라는 키워드가 뜨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조예원 바흐닝언케어팜연구소 대표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강의, 기고에 자문, 컨설팅 요청까지 정신이 없다. 조 대표는 네덜란드 바흐닝언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다 치유농업 연구를 하게 됐다. 네덜란드의 크고 작은 케어팜을 찾아다니고 농장주들을 만난 후 우리나라에 케어팜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케어팜을 가다’라는 책을 펴냈다.

조 대표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외국계 기업에서 13년 일했다. 종일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다 주변 식당에서 한 끼 때우는 일상은 건강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구조적으로 직장 환경을 바꿀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을 가지고 네덜란드 바흐닝언대학으로 갔다가 케어파밍(care farming) 연구로 유명한 얀 하싱크 박사를 만났다. 하싱크 박사는 조 대표에게 “한국인들이 네덜란드 케어팜에 견학을 많이들 오는데 연구를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농업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도시 여자가 케어팜에 빠져든 사연이다.

한국에서도 케어팜이 자리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 대표는 네덜란드의 성공 이유는 케어팜이 제공하는 서비스의 내용이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요양시설에 가면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로 대하는 반면 케어팜에서는 거창한 일이 아니어도 일할 수 있는 한 명의 인간으로 대한 것이 주효했습니다. 대부분 소규모로 운영돼 인간적이고, 걸어다니니 건강도 좋아져요. 그러니 이웃집 놀러가듯 기관보다 케어팜으로 가는 거죠. 효과가 있으니 정책이 따라간 겁니다. 국왕이 한 케어팜에 방문해서 국민들에게 알리고 정부도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선 것이 효과적이었습니다.”

조 대표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케어팜의 한 형태로 ‘치유농업’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한편으로는 걱정스럽다. 네덜란드의 경우 보건복지제도가 결합돼 돌봄기관 중 하나로 체계가 잡혀 있는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보건복지 쪽에서는 아직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양 날개로 가야 하는데 농업에만 치우쳐서는 케어팜이 자리 잡기 힘들다. 원예치료, 자연치료나 힐링체험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조 대표는 네덜란드에 와서 한두 곳 들러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오히려 프로그램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환자가 아니라 한 명의 친구, 인력으로 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치유농업이라고 하면 무슨 프로그램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케어팜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조 대표는 케어팜은 노인,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데 활용될 때 그 효용이 빛을 발한다고 생각한다. 케어팜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자신의 역할에 대한 고민도 커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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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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