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연휴 기간도 독서가 제격이다. 계속되는 코로나19 사태로 ‘나홀로 시간’을 누릴 수밖에 없다. 사람들과의 어울림 대신 평소 읽고 싶었던 책과 벗하는 시간을 보내보자. 4권의 책을 소개한다.

6개월 앞으로 다가온 내년 대선에 어떤 생각으로 임해야 하는지 도움을 줄 만한 책들이다. <편집자 주>

실행 능력이 있는 대통령을 뽑으려면

일레인 카마르크

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

내년 3월 9일이 다음 대통령 선거일이다. 바야흐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선택이 불과 다섯 달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과연 어떤 후보를 뽑아야 할까. 당연히 성공한 대통령이 될 만한 후보를 골라야 한다. 그렇다면 성공한 대통령은 과연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할까.

당장 우리가 마주한 이런 무거운 물음에 명쾌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인상적인 대통령론이 있다. 바로 일레인 카마르크의 ‘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Why Presidents Fail·2016)이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미국 대통령들의 실패 사례 분석을 통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한 핵심적 요소를 유추해 보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저자는 백악관 고위직 출신의 학자다.

대통령 후보들은 호소력 있는 정책을 만들어 ‘내가 적임자’라고 홍보를 한다. 이런 정책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야말로 대통령이 되기 위한 필수적 자질이다.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이 두 자질을 인정받아 정상에 오른 비범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작 성공한 대통령보다 실패한 대통령이 훨씬 더 많다. 성공한 대통령도 때로는 실패를 피하지 못했다.

카터 대통령은 이란 억류 인질 구출 작전에 실패했다. 당시 미군은 베트남전 이후 특수전 능력이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군 수뇌부조차 작전의 성공을 의심했다. 부시 대통령은 여러 정보기관의 테러 경고를 외면하다가 9·11테러를 맞이했다. 그런 실패가 오히려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진 특이한 경우다. 오바마 대통령은 의욕적으로 보건정책을 추진했으나 출범 당일 웹사이트가 먹통이 되었다. 그만한 역량이 안되는 행정부서에 업무를 맡긴 탓이다.

이런 대통령의 실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교훈은 분명하다. 그것은 대통령이 행정부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행정부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역량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탓이다. 이로 인해 중요한 정책이나 전략이 아예 외면되거나 실행 단계에서 좌초되었다. 이런 수많은 교훈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대통령의 실패가 빈번히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히 대통령은 선거 캠페인을 도운 참모들을 데리고 백악관에 입성한다. 대통령과 그들은 권력을 쥐고도 여전히 ‘영원한 선거 캠페인’ 상태를 유지한다. 오로지 정책과 커뮤니케이션에 사활을 건다. 정작 정책 실행의 손발이 될 행정부를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불신하고 경원시한다. 이 와중에 점점 더 비대해지는 백악관은 대통령과 행정부를 더욱 소원하게 만든다.

본래 정책이 성공하려면 조직 역량을 가늠하여 그 역량 수준에 맞춰 설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과 참모들은 ‘독단적으로’ 화려한 정책을 내놓고 홍보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는 행정부에 실행을 떠넘긴다. 그것이 실행 단계에서 병목현상을 일으키며 실패로 이어진다. 이때 흔히 대통령은 행정부를 원망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그 수장이라는 점을 망각한 처사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후보에게는 정책 능력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하다. 그러나 대통령에게는 실행 능력이 더해져야 한다. 한마디로 대통령은 일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선거 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을 할 줄 아는 후보는 정책과 커뮤니케이션도 다르다. 꼼꼼히 살펴보면 그 차이가 조금이라도 보일 것이다.

왜 정책은 없고 구호만 난무할까

프랜시스 후쿠야마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

‘사람이 먼저다’. 이런 구호의 의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는 자신도 사회적으로 존중받게 된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목적을 달성할 실효적인 정책은 부재하다. 기껏해야 징벌 수위를 높이는 입법이나 단순한 시혜가 거의 전부다. 이처럼 실질적인 정책은 외면하고 존엄성이나 정체성에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정치가 유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행히도 우리의 답답함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비범한 통찰이 있다. 바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정체성’(Identity·2018)이다. 부제는 ‘존엄의 요구와 분노의 정치’다. 현대인은 소속감도 없고 정체성도 빈약하고 경제적 부침도 심하다. 이런 와중에 자신이 ‘존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좌절과 분노가 일어나고, 그것이 포퓰리즘 정치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우리말로는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2020)으로 소개되었다.

저자는 트럼프 당선에 충격을 받고 이 책을 구상했다고 고백한다. 잘 알려진 대로,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좌절한 중하층 백인들이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열광한 것은 어떤 구체적인 정책이 아니라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구호였다. 이렇듯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이득보다 존중과 인정을 더 갈망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사실 인간은 인정이나 존중을 받으면 자부심을 느끼고, 그렇지 못하면 좌절한다. 그것이 사회를 유지시키고 발전시키는 힘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사 이래 중세까지 사회적으로 인정이나 존중을 받으려고 분투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였다. 귀족이나 지배계층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분제와 공동체에 강하게 속박되어, 자신만의 고유한 자아를 가질 수도 없었다.

계몽사상, 종교개혁, 민주주의가 도래하면서 비로소 누구나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게 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자신의 내면적 자아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마땅한 존재로 거듭났다. 한마디로 ‘존엄성 혁명’이 일어났다. 그래서 헤겔은 ‘인정 투쟁’이야말로 인류 역사를 끌어가는 원동력이자 근대적 세계의 출현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 열쇠라고 설파했다.

이런 존엄성 혁명은 처음에 두 방향으로 균형을 이루며 확대되었다. 하나는 보편적 인권의 인정을 추구했고 다른 하나는 민족, 종교 등 억압받고 있던 특정한 집단의 존엄에 대한 인정을 추구했다. 사람들에게 점점 기회와 선택지가 넓어지자 그만큼 불안도 커졌다. 이로 인해 존엄성 혁명은 차츰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그래서 민족과 종교를 넘어 여성, 인종, 성소수자, 이민, 난민 등으로 존엄을 요구하는 특정한 집단도 점점 더 세분화되었다.

이때 좌파 정당은 이런 소수집단의 정체성 문제를 새로운 기회로 포착했다. 우파 정당도 이에 대응했다. 그래서 오늘날 좌·우 정당들은 사회경제적 정책 대결이 아니라 인정요구·타자혐오·포퓰리즘으로 얼룩진 정체성 정치로 치닫고 있다. 한마디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정체성과 존엄성을 주겠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아무개다” “아무개를 석방하라”고 외치며 그 안에서 자신이 인정받고 있다고 안도한다.

이제는 먼 과거로 돌아갈 수도 없고 정체성 정치를 피할 수도 없다. 이때 정체성이 각각 배타적으로 분화만 한다면 혐오와 배제가 쌓인다. 그래서 특정 집단의 존엄을 그들만의 존엄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로 가꿔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일자리·소득·안전망 등 핵심적 사회문제를 해결하여 삶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해나가는 일이다. 정체성 정치가 포퓰리즘으로 폭주하면 그런 개선을 도리어 방해한다는 각성도 절실하다.

미래의 주인공 1990년대생은 누구인가

임명묵

K-를 생각한다

“여대 출신에 쇼트커트면 페미(페미니스트)다.” “페미는 금메달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지난 올림픽 기간 중에 양궁 3관왕인 안산 선수를 향해 이런 황당한 인터넷 테러가 벌어졌다. 한 20대 여성의 걸출한 위업이 축하와 선망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일부 동년배 남성들의 질시와 혐오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오늘날 20대는 도대체 어떤 집단일까.

마침 20대 연구자가 자신의 세대인 20대의 특징을 날카롭게 해부한 인상적인 문제작이 있다. 바로 임명묵(27)의 ‘K-를 생각한다’(2021)이다. 요즘 우리는 수많은 K-○○을 양산해내며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데, 이런 K-현상이 20대의 ‘고단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20대의 내부 보고이자 내부 고발인 것이다.

오늘날 20대는 양극화 시대에 태어나 성장한 첫 세대다. 또한 ‘디지털 원주민’ 첫 세대다. 이런 점에 비추어 그들을 그냥 ‘20대’라기보다 ‘90년대생’으로 특별히 호명해야 마땅하다.

특히 그들은 소셜미디어(SNS)에 자신의 의견이나 일상을 전시하여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흙수저’ ‘금수저’로 상징되는 그들의 고단한 현실은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정 투쟁을 더욱 격렬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인터넷 공간은 그들의 투쟁적·부정적 에너지로 이글거린다.

이처럼 그들은 체념, 분노, 혐오 등 투쟁적 에너지를 ‘좌절된’ 현실이 아니라 콘텐츠의 바다인 미디어에 쏟아냈다. K문화는 바로 그들의 결핍과 불안이 만들어낸 이런 투쟁심을 흡수하며 급성장했다. 특히 콘텐츠의 내용과 소비 양태가 전투적 양상을 보이며 대리만족 차원에서 고도의 질적 상승을 이룩했다. 심지어 방탄소년단의 팬클럽은 아예 ‘아미(Army)’다.

그들은 심각한 가치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그럴 여유 자체가 없다. 오로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확실하게 보장된 지위 상승의 기회이거나 아니면 감각적 즐거움이다. 이런 팍팍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사소한 꼬투리만 생겨도 격한 혐오와 분노를 쏟아내며 불퇴전의 인정 투쟁에 나선다. 최근에 널리 알려진 사례가 바로 안산 선수에 대한 인터넷 테러인 것이다.

그들이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어떤 성취감도 느끼지 못한 채 분노에 휩싸이게 되면, 오로지 시스템을 파괴하고 혼란을 일으키며 증오를 쏟아내는 데서 도리어 성취감을 느낄 수도 있다. 더구나 사회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근본적 원인을 바꿀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다면, 포퓰리즘이 그 틈새를 파고들게 마련이다. 희미하지만 이미 그런 징조도 어른거린다.

더 심각한 시나리오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들에게 당장의 대리만족을 주는 더욱 정교한 콘텐츠가 제공되고, 배후에는 강력한 통제 메커니즘이 설치되는 상황이다. 오늘날 중국이 그렇다.(주간조선 제2669호 본란 참조) 우리도 정교한 통제 시스템은 갖춰져 있다. 그것이 K방역으로 증명되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통제받으면서도 한편으로 열광하고 있다.

K방역의 핵심은 의심자 수배, 동선 파악, 검사 진행, 환자 격리 및 치료다. 또한 거기에 필요한 행정·의료 인력과 시설의 확보다. 이런 모든 과정이 법에 의해 ‘강제로’ 집행된다. 이런 수준의 정보·통제·동원 시스템을 갖춘 나라는 극히 드물다. 이처럼 오늘날 K- 현상에는 자부심과 스트레스, 욕망과 통제가 뒤섞여 있다. 그것이 또한 1990년대생 삶의 실상인 것이다.

지금 당장 그들에게 뚜렷한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이대로 가다가는 그들이 모두 30대가 되는 10년 후에는 그들의 긍정적 자산인 문화적 창의성마저 고갈될 것이다. 관건은 성취감, 즉 노력하면 미래를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달콤한 구호가 아니라 그런 희망을 살려내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놓고 벌이는 경쟁이 되어야 한다.

정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카노 노부코

정의 중독

인터넷 댓글을 보면 글이 아니라 비수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어떻게 이리도 자기 확신이 강하고, 어떻게 이리도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을까. 하기는 정치지도자들부터 태연하게 ‘내로남불’에 앞장서고 있으니 딱히 누구를 탓하기도 어렵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으레 그러려니 하는 자포자기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뇌과학 측면에서 이런 편향을 일종의 중독현상으로 파악하면서 치유책을 제시하는 이색적인 주장이 있다. 바로 나카노 노부코의 ‘인간은 왜 타인을 용서하지 못할까’(人はなぜ他人を許せないか·2020)이다. 우리말로 ‘정의 중독’(20201)으로 소개되었다. ‘정의 중독’이란 결코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이 폭주한 가운데 항상 벌할 상대를 찾아헤매는 것을 가리킨다.

인간의 뇌는 불의를 찾아내어 벌하는 데 쾌감을 느끼도록 진화했다. 실제로 타인에게 ‘정의의 철퇴’를 가하면 뇌의 쾌락 중추가 자극받아 쾌락 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된다. 이런 쾌락에 자꾸 빠져들다 보면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무조건 타인을 응징하려고 한다. 이런 상태를 정의에 취해버린 중독 상태, 즉 정의 중독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도파민은 마약 중독, 도박 중독 등 각종 중독에 공통적으로 관여하는 물질이다.

더구나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는 익명성과 비대면성으로 인해 더욱 손쉽고 더욱 강렬하게 타인을 공격하는 환경을 제공한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의견이 다른 대상을 찾아내서 싸움을 걸며 마치 자신이 정의의 수호신이 된 것처럼 으스댄다. 더구나 주장과 인격을 분리해서 보지 않아 곧바로 인신공격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논리나 토론은 사라지고 비아냥과 조롱만 넘쳐난다. 정의에도 여러 기준이 있고 상대의 의견도 경청할 만하다는 인식 자체가 아예 없다.

인간의 뇌는 침팬지와 98%가 유사하다. 나머지 2%가 인간의 전두전야(전두엽의 일부)를 폭발적으로 발달시켜 지식 및 언어 체계를 구축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협력을 하고 집단을 이루어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인간은 자신의 집단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하다. 반대로, 타 집단이나 타인을 관용없이 공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행위가 생존에 도움이 되므로 도파민으로 보상된다. 이렇듯 인간의 뇌는 본래 내적 편향에 취약하다.

하지만 지나친 중독은 고쳐야 한다. 다행히 우리 뇌의 전두전야는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메타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중독을 되돌아보고 치유할 수 있다. 이때 새로운 경험이나 자극이 전두전야에 작용해 우리의 메타 인지 능력 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저자의 충고다. 예를 들어 평소 다니던 길과 다른 길로 다녀보고, 평소 먹지 않던 음식에 도전해 본다. 평소 관심 없던 책을 읽어보고 낯선 곳을 무작정 여행해 본다.

또한 어떤 상대나 대상에 대해 안이하게 낙인찍지 말고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를 가져보는 것도 좋다. 그 밖에도 전두전야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등푸른생선 섭취, 숙면 등도 필요하다. 당장 일상 속에서 실천해볼 만하다. 핵심은 타성을 깨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라는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중독이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자각이다.

키워드

#추석 특집
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