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대통령 선거라는 뜨거운 용광로로 빨려들어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지난 몇 년을 차분히 되돌아보며, 거기로부터 교훈을 찾아보려는 여유가 절실하다. 사실 2016년 국회의원 선거 직전까지만 해도 당시 여당(현 야당)은 선거에서 연전연승했고, 야당(현 여당)은 지리멸렬했다. 이러다가는 진보정치가 아예 씨가 마르지 않겠느냐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에 그런 진보정치에 대해 다양한 비판과 처방이 쏟아졌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강준만의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2016)이다. 이 제목은 ‘나만 옳다’는 극단적 선악관에 사로잡혀 정치를 가능성이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로 착각하는 진보좌파를 가리킨다. 이런 정치 행태는 상대를 증오하고 타협을 배척하며, 호남에 대해 몰표와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다. 그런 잘못을 바로잡아야 진보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고언이다.

이 책은 2016년 국회의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앞두고 출간되었다. 당시는 두 야당(새정치민주연합, 국민의당)이 다시금 호남을 두고 다툴 때다. 이럴 때마다 진보좌파는 “호남이 분열하여 (당시) 여당에 어부지리를 안겨 주면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실 이런 엄포는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을 증오하고 모욕하는 처사다. 그럼에도 호남은 ‘역사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그런 강요를 묵묵히 받아들여 그들에게 몰표를 안겨준다.

이러다 보니 진보좌파는 호남 몰표를 마치 ‘주머니 속의 공깃돌’처럼 여긴다. 문제는 바로 그 호남 몰표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더 많은 표를 얻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니들은 죽은 듯이 입 닫고 지내라”라고 강요한다는 점이다. 호남은 그런 추가적인 강요마저 감내하며 ‘착한 호남 콤플렉스’에 사로잡힌다. 한마디로 호남은 그들에게 ‘지역적 인질’인 셈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호남이 홀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망상이다. 민주주의는 오로지 어떤 특정 지역이 숭고한 멍에를 지고 지극한 희생을 치러서 만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 모든 국민이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을 표출하고 타협하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져야 마땅하다. 그럼에도 진보좌파는 가혹할 정도로 호남에 ‘신성한’ 사명을 주문하며, 몰표를 내놓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윽박지른다.

왜 이런 비정상적 정치 행태가 반복될까. 흔히 미래의 권력은 거리에 있다고 한다. 다만 좋은 정치는 거리에서 형성된 권력을 현실 정치에 수용하여 제도적으로 실현시킨다. 그런데 문제는 종종 권력자들이 거리에서 형성된 권력을 가져다가 실체화시켜 사유화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우리나라 진보좌파다. 그들은 여전히 ‘거리의 권력 상태’에 머무르며 그런 상황을 정치적으로 즐긴다. 어디든 거리에서는 극단적인 주장이 자연스럽게 우대된다.

진보정치에 환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대체로 일상적인 삶에서는 선량하고 순수하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능성을 추구하는 정치를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처럼 대하는 순간, 극단적인 강경파가 되어 ‘증오의 정치’를 불러온다. 그런 강경파는 비록 소수지만 뜨거운 정열과 헌신으로 정쟁을 선악의 종교전쟁으로 몰고 간다. 정치를 혐오하고 저주하는 유권자들은 구경꾼으로서 그런 살벌한 쟁투에 환호한다. 그 결과가 바로 ‘전부 아니면 전무’ 정치다.

이런 극단적 선악관 속에서는 교리나 대의보다 ‘열정적 혐오’가 위력을 발한다. 실제로 사람들이 어떤 대의를 위해 헌신·희생하는 것은 자신이 믿는 대의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런 열정적 집착에서 안전감을 얻기 때문이다. 즉 그들에게는 ‘열정적 증오’를 발산하면서 매달릴 그 무엇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머리는 어떤 가치가 아니라,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나 정치인에 대한 완고한 집착으로 채워진다. 그것이 오늘날 ‘진보의 자폐증’인 것이다.

이로 인해 진보좌파는 정작 관심을 보여야 할 사회적 의제를 방기한다. 반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파나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는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간혹 정의라고 내세우는 의제도 실상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강하게 반영할 뿐이다. 이처럼 진보좌파는 자폐적 세계 속에서 오직 권력 쟁투에 골몰한다. 그것은 ‘타락인 줄도 모르는 비극적 타락’이다.

이때 정치인이나 논객의 인기는 반대편을 조롱하고 아프게 만드는 독한 언어를 잘 구사하는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또한 언론은 그런 사제(司祭)들이 내뱉는 조롱과 증오를 시시콜콜 소개하여 소비자의 말초적 관심을 끌려는 ‘증오 상업주의’에 빠져든다. 이런 증오의 정치가 지속되는 한, 호남은 정치적 인질 상태에서 결코 풀려날 수 없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전국적으로 지방이 홀대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모든 것이 서울 중심이기 때문이다. 반면 지방은 내부 식민지 상태다. ‘호남이 희생하라’는 진보 담론도 내부 식민지에서 유래하는 논리다. 중앙의 진보좌파가 잘되기 위해 지역이 희생하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지역의 상층 엘리트조차 지역을 외면한 채 중앙의 엘리트와 이익을 공유한다.

이런 차별을 놔둔 채 몰표나 강요하는 것은 결코 진보의 가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배반하는 일이다. 모름지기 진보라면 그런 내부 식민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 지역의 차별을 없애는 데 진력해야 한다. 근본적 해법은 실질적인 분권화다. 그럼에도 진보좌파는 겉으로 구호만 외치고, 속으로는 지역차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데 급급하다. 그들은 증오의 정치를 통해 권력을 견고히 만들려고 할 뿐, 실질적인 국가 개혁에는 무심하거나 무능하다.

그런 폐단을 고쳐야 진보정치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 5년 전 저자의 쓴소리였다. 하지만 진보좌파는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보수우파의 자멸로 손쉽게 정권을 잡았다. 더구나 집권하고 나서도 폐단을 개선은커녕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폐단이 나라 전체로 퍼져, 온나라가 종교적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증오의 정치는 지역의 몰표를 더욱 간절하게 요구한다. 결국 호남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지역주의는 더욱 맹위를 떨치게 된다.

저자는 올해 초 ‘부족국가 대한민국’(2021)을 통해 진보좌파 집권세력의 자폐적 행태를 재차 비판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아예 끼리끼리 부화뇌동하는 부족국가로 퇴행했다. 거기서는 어떤 원칙이나 가치보다 패거리의 이익이 우선시되어 ‘내로남불’이 일상다반사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늘날에는 보수우파도 이런 비판에 환호작약할 처지가 못 된다. 5년 전에 지적된 정파적 폐단이 국가적 폐단으로 확대된 나머지, 모두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때다.

선거에서 승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가 더 잘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내가 못해도 상대가 더 못하는 경우다. 아예 자멸해주면 더 좋다. 2016년 국회의원 선거와 2017년 대통령 선거야말로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다. 이로 인해 진보좌파는 폐단을 고치지 않고도 손쉽게 권력을 잡았다. 그 결과가 오늘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다.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누가 못하느냐’로 정권이 정해지면 미래는 더욱 어두워진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누가 잘하느냐’는 경쟁이 되어야 한다. 그 핵심은 바로 부족국가를 허물고 공화국을 재건하겠다는 굳은 의지다. 그것이 시대정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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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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