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에서는 색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려하고 밝은 색채는 칙칙한 색을 주로 사용하는 다른 데스게임물과 가장 큰 차이를 보여준다. ⓒphoto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에서는 색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려하고 밝은 색채는 칙칙한 색을 주로 사용하는 다른 데스게임물과 가장 큰 차이를 보여준다. ⓒphoto 넷플릭스

우리 동네 골목에는 작은 치킨집이 있다. 가게 이름이 ‘깐부치킨’이다. 예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평범한 상호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설마 ‘오징어게임’의 그 깐부? 아니나 다를까. 가게 앞에는 ‘오징어 치킨’이란 신메뉴를 알리는 문구와 함께 작은 글씨로 ‘당신의 깐부로부터’라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문구다. 바야흐로 2021년 가을은 ‘오징어게임’의 계절이다. 전 세계 1억1100만가구의 선택으로 넷플릭스 역대 최고 흥행작이 됐다.

드라마가 지금처럼 뜨기 전이었다. 넷플릭스에서 무슨 영화를 볼까 뒤적거리다 이상한 제목을 발견했다. 포커게임도 아니고 화투도 아닌 ‘오징어게임’이었다. 오징어를 걸고 내기하는 게임인가 싶었다. 도대체 오징어가 어떻게 게임에 이용될까 궁금해 1편을 봤다. 완전히 허를 찔렸다. 보자마자 경악했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드라마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낯선 형식이었다. 그런데 다음 편을 보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중독성이 강했다. 결국 그 자리에서 9편까지 한꺼번에 다 봤다. 감독이 얼마나 영리하게 연출을 했던지 한국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대박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 이름을 찾아봤다. ‘남한산성’의 황동혁 감독이었다. 점잖던 감독이 어쩌다 이렇게 갑자기 살벌한 사냥꾼으로 변해버렸을까. 카프카의 ‘변신’ 못지않은 충격적인 변신이었다.

결국 그의 변신은 성공했다. 왕년에 게임판에 기웃거려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이렇게 많은 구경꾼을 한꺼번에 몰려들게 한 게임은 ‘오징어게임’이 처음일 것이다. 드라마의 인기가 치솟는 것에 비례해 날마다 수많은 관람평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오징어게임’이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과 그 폐단에 대해 고발하는 데스게임 드라마라고 간단하게 치부해버리기에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측면에서 ‘오징어게임’의 흥행 이유와 의미 그리고 문제점 등을 분석해보았다.

가면은 한국인보다 외국인에게 익숙한 장치이다. ‘오징어게임’에서는 다양한 가면이 등장한다. ⓒphoto 넷플릭스
가면은 한국인보다 외국인에게 익숙한 장치이다. ‘오징어게임’에서는 다양한 가면이 등장한다. ⓒphoto 넷플릭스

한국인과 외국인을 모두 만족시킨 작품

‘오징어게임’을 소개하는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작품은 456억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시리즈다.” 데스게임물은 ‘오징어게임’이 처음이 아니다. 일본과 미국에서는 족보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만화와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런데도 유독 ‘오징어게임’만 대박을 터뜨렸다. 그것은 감독이 한국과 외국인들의 취향을 골고루 만족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장치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우선 한국인들을 위한 장치는 게임의 내용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뽑기’ ‘줄다리기’ ‘오징어’ 등 지금 40~50대의 한국인들이 어린 시절에 익숙하게 했던 게임들이 나온다. 한국 사람이라면 나이를 불문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하는 놀이다. 어린이들이 하는 게임인 만큼 게임의 규칙도 단순하다.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잘 이해될 수 있어 큰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외국인들이 좋아할 만한 장치는 가면의 착용이다. 가면은 한국 영화에서는 그다지 선호하는 품목이 아니다. 굳이 ‘오징어게임’에 가면을 등장시킨 이유는 철저히 외국인들을 겨냥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핼러윈데이의 인기를 반영하듯 외국인들은 가면에 익숙하다. ‘배트맨’ ‘오페라의 유령’ ‘킹덤 오브 헤븐’ ‘마스크’ 등 서양 영화에서 가면은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소품이다. 가면은 흔히 그것을 쓴 자의 정체를 감추거나 신분을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착용한다. 폭력을 행사하거나 강도짓을 하는 갱스터에게는 필수품이다. 그런 서양문화를 ‘오징어게임’에서 차용했다. 차용하면서 그 콘셉트를 완전히 반전시켜 버렸다. 갱스터들이 쓴 가면은 스타킹이나 모자를 뒤집어쓴 듯 우중충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이 많다. 딱 봐도 악당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써 말이다.

그런데 ‘오징어게임’에서는 붉은 옷에 검은 가면으로 혐오성을 완전히 탈피했다. 붉은 옷에 가면을 쓴 은행털이범은 스페인 드라마 ‘종이의 집’에서 나온다. ‘종이의 집’에서는 살바도르 달리의 얼굴을 희화화한 가면을 쓰고 나온다. ‘오징어게임’에서는 그 얼굴마저 지워버렸다. 대신 세모, 네모, 동그라미의 기하학적 문양으로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는 오징어의 모습을 상징화한 것이다. ‘오징어게임’이란 제목에도 ○△□가 들어가 있다. 디자이너의 감각이 드러난다. 검은 바탕에 동그라미나 세모가 그려진 가면을 쓰고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총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인의 출현을 보는 것 같다. 그만큼 공포스럽다. 반면 게임을 구경하러 온 외국인들의 가면은 호화찬란하다. 프론트맨의 가면과 옷과 거처는 검은색과 회색이다. 어떤 정보도 드러내지 않으려는 자의 상징이다. 가면으로 신분을 드러내는 장치다.

‘오징어게임’과 다른 데스게임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색채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데스게임물에서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칙칙하다. 특별히 색감이라고 느낄 만한 장면이 거의 기억나지 않을 만큼 배경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을 죽이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오징어게임’에서는 다르다. 게임 참가자들이 게임장으로 이동하는 계단이 특히 그렇다. 계단 벽과 바닥은 파스텔톤과 분홍색, 노란색, 파란색이 조화를 이루어 놀이동산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듯하다. 이전의 데스게임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장치다. 과거의 색채가 마치 검은색 일색인 50대 아재들의 등산복이라면 ‘오징어게임’의 색채는 울긋불긋한 20대 젊은이들의 총천연색 아웃도어 같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뽑기’ 게임이 벌어지는 장소는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금세라도 뛰어나올 것같이 따뜻하고 환하다. 그래서 더 공포스럽다. 전혀 살인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장소에서 자행된 학살이라니. 예상치 못한 충격이다.

‘오징어게임’에서는 색채 못지않게 인테리어도 중요하다. 인테리어에 의해서도 장소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외국인들이 앉아서 게임을 즐기는 넓은 홀에는 몸에 표범 무늬를 페인팅한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녀들의 몸은 보라색이나 검은색으로 칠해졌다. 그녀들은 움직이지 않아 마치 조각상 같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다. VIP들은 그녀들의 몸 위에 발을 올려놓거나 등을 기댄다. 그녀들은 사람이지만 팔걸이나 발판처럼 도구화됨으로써 사람의 인격성은 완전히 말살된다. VIP들은 ‘리얼돌’ 같은 사람 위에 걸터앉아 목숨을 걸고 게임하는 사람들에게 내기를 하면서 로마의 네로황제 못지않은 만족감과 우월감을 느꼈을 것이다. 돈은 많지만 사는 것이 지루해 사람을 죽이는 게임을 즐기고 있으니 그 짜릿함이 어떠하겠는가. 이런 설정은 외국인들을 겨냥한 인테리어다. 진행요원들의 방은 인큐베이터처럼 규격화되어 있다. 그들이 기계의 부속품처럼 움직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게임 참가자들은 모두 한 장소에 집어넣었다. 누가 승리하든지 그들 모두 공동운명체라는 뜻이다. 게임을 하지 않는 동안에도 그 안에서 서로 죽일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똑같은 ‘데스게임’ 영화인데…

그 어떤 소품보다 ‘오징어게임’에 세계인들이 열광하게 만든 비결은 따로 있다. ‘오징어게임’은 지극히 한국적인 영화다. 그러면서도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녔다. 그 보편성이 바로 ‘가족’이다. 가족을 다룬 영화로 성공한 경우는 리암 니슨이 주연한 ‘테이큰’ 시리즈를 들 수 있다. ‘테이큰’은 가족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처절한 부성을 다룬 영화로 흥행에 성공했다. 비록 주인공이 평범한 사람과 달리 비범한 총잡이라는 설정이지만 가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오징어게임’에서는 지지리도 못난 사람들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 등장한다. 456명의 참가자가 갖가지 사연을 안고 게임에 참가한다. 그들 중에는 얼굴에 무시무시한 뱀 문신을 한 조폭도 있다.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그다지 별 볼 일 없는 세 사람이 최종라운드까지 살아남는다. 기훈, 상우, 새벽 세 사람이 최종 배틀까지 남은 것도 그들을 통해 가족과 집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다. 무능력하지만 가족을 돌보겠다는 그들을 통해 가족은 무엇이고 집의 가치는 무엇인가에 대한 명제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이들은 제 한 몸 챙기기도 힘들 정도로 무능력하다. 그런데 투사로 뽑혔다.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영화가 더 현실감 있고 설득력이 있다.

탈북자인 새벽은 기훈에게 만약 우승을 해서 저 돈을 갖고 나가면 뭐 할 거냐고 묻는다. 그때 한 기훈의 대답이 이 영화의 핵심주제다. 기훈은 먼저 빚부터 갚고 시장에 엄마 가게를 하나 얻어주겠다고 한다. 기훈의 엄마는 노점상을 그만두고 가게 하나 얻어서 장사하는 게 평생 소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딸에게 아빠 노릇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덧붙인다. 기훈은 엄마에게는 아들의 역할을, 딸에게는 아빠의 역할을 하고 싶어서 게임에 참가한 것이다. 새벽의 소원도 기훈과 다르지 않다. 그녀는 보육원에 어린 동생을 맡겨두었다. 돈 벌면 데리러 가겠다는 약속과 함께. 그녀의 아버지는 탈북 과정에서 죽었고 엄마는 탈북하다 다시 북으로 끌려갔다. 그녀는 셋이 살 집을 하나 마련해 엄마와 동생과 함께 사는 것이 소원이다. 소박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인간 삶의 근본이 될 터전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것이 그녀의 꿈이다. 그렇다면 상우는 어떨까. 서울대를 나와 쌍문동의 자랑거리였던 그는 증권회사에서 선물을 해서 60억원의 빚을 졌다. 그가 진 빚은 회삿돈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집이랑 엄마 가게까지 전부 다 들어가 있었다. 회삿돈은 그렇다 쳐도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곧 엄마와 함께하는 터전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집은 곧 가족이다. 그가 자살을 시도했던 이유도 바로 엄마 때문이었다.

가족이 함께하는 집의 가치를 강조하는 대목은 영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죽음을 앞둔 새벽이 기훈에게 부탁한 것은 보육원의 동생을 돌봐달라는 거였다. 그녀가 죽기 직전에 한 말은 “집에 가고 싶어”였다. 기훈이 마지막 순간에 상금을 포기하고 상우에게 한 말도 “집에 가자”였다. 상우가 자결하기 직전에 “어릴 때 형이랑 이렇게 놀다 보면 꼭 엄마가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아무도 안 부르네”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부른 사람이 엄마였다. 심지어는 이런 죽음의 판을 벌여 놓은 오일남(깐부)조차도 어린 시절의 집을 그리워한다. 집, 엄마, 동생, 아내, 아들, 딸 등이 함께하는 집은 그러니까 사람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꼭 지켜야 할 삶의 근본 바탕인 것이다.

그래서 가족의 소중함을 해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 가혹한 응징이 뒤따른다. 게임에 함께 참여한 부부를 ‘구슬치기’를 통해 서로 죽이게 한 경우가 그렇다. 결국 살아남은 남편은 목을 매 자살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이 아내와의 게임에서 이겨 상대를 죽게 만드는 설정은, 가족이라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짧지만 가장 극적인 연출로 이 영화에서 가장 공들인 구성이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처절한 절규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를 얼마만큼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세상은 얼마나 공정할까. ‘오징어게임’에서는 ‘믿음’과 ‘공정’이란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온다. 자칫 방심하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 새벽이 기훈에게 “나는 사람을 안 믿어”라고 말하자 기훈이 이렇게 대답한다. “원래 사람은 믿을 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믿는 거지.” 이 믿음에 대한 질문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이 게임을 주최한 오일남은 기훈에게 또다시 묻는다. “아직도 사람을 믿나? 그 일을 겪고도.” 믿음이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유리 같은 것이라면, 공정은 매우 단단해서 강화유리와 같이 깨지지 않을 것처럼 강조한다. 공정은 모든 참가자에게 그 어떤 속임수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모두가 평등하고 공평하게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 역시 다른 데스게임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다. 그러나 ‘오징어게임’에서의 공정은 참가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오로지 그 게임을 지켜보는 관람자들을 위한 장치다. 누구 한 명이 일방적으로 유리하면 보는 사람이 재미가 없어진다. 참가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장기판의 말이니까. 여기서 우리는 묻게 된다. 믿음의 가치가 유리처럼 깨지기 쉬워도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공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공정인가.

마지막에 기훈은 딸을 만나러 미국행 비행기를 타러 간다. 가는 길에 또 딱지치기 하는 사람을 발견한다. 그는 게임주최 측에 전화를 걸어서 이렇게 말한다. “난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 그래서 궁금해. 너희들이 누군지, 어떻게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그래서 난 용서가 안 돼. 너희들이 한 짓이.” 그러면서 되돌아서 나온다. 이것은 시즌2를 예고하는 장면일 수도 있고 심심풀이 삼아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세력들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다. 사람 목숨을 돈으로 어찌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 흥행 게임

많은 메시지를 주고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징어게임’은 보고 나서 왠지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것은 사람의 목숨(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죽이는 게임)을 담보 삼아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멈칫해진다. 우리 집에서 사람 죽이는 게임을 하는데 재미있으니까 보러 오라고 홍보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황동혁 감독은 관객을 상대로 마지막 내기를 한 것일까. 오일남이 죽기 전에 마지막 게임을 했듯이. 굳이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잔인한 수단을 통해 관객과 흥행 게임을 해야 했을까에 대해서는 그 부작용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느꼈던 그 푸근하고 온화한 얘기 대신 죽음이라는 형식을 내밀면서 극한까지 몰고 가야만 가족과 집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황 감독은 “생존 게임의 단계가 올라갈 때마다 펼쳐지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우리 사회를 은유하는 수많은 메시지를 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내내 황 감독이 총을 들이밀면서 게임을 관람하라고 협박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정육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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