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5년간 이런저런 사정으로 여름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휴가는커녕 하루를 온전히 쉬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그럴 때 내가 택한 건 영화였다. 몸과 마음에 환기가 필요할 때면 짬을 내 극장을 찾았고, ‘영화를 통해’ 비로소 어딘가로 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때때로 여행을 다시 정의하기도 했다. 내게 여행은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정신으로 할 수 있는 것,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 영화 여행에는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도 있었는데, 생각보다 높은 확률로 떠나온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시간과 돈을 들여 극장을 찾은 만큼, 선뜻 여행(관람)을 중단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불만만 쌓게 될 때도 있다. 그뿐이면 다행이련만, 어느 때는 영화의 태도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마음에 딱 들어맞는 여행지를 찾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빈번히 실패를 맛보면서도 틈만 나면 극장을 찾는 건, ‘다 함께 여름!’ 같은 영화를 만나는 순간이 드물지만 찾아오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다 함께 여름!’은 세 사람을 축으로 진행된다. 프랑스 파리 강변 축제에서 알마를 본 펠릭스(에릭 난추앙 분)는 첫눈에 그녀에게 빠진다. 두 사람은 춤을 추며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다. 다음날 알마는 남프랑스에 있는 휴양지로 가족들과 휴가를 떠나고, 펠릭스는 그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펠릭스에게는 동행이 있었으니, 마트에서 일하는 친구 셰리프(살리프 시세 분)다. 셰리프는 펠릭스의 여행길에 함께하려고 상사에게 거짓말까지 한 참이다. 그리고 ‘카풀’을 통해 만난 또 다른 일행 에두아르(에두아르 쉴피스 분). 자기 차에 탈 두 사람이 여자인 줄만 알았던 에두아르는 펠릭스와 셰리프를 보고 황당해하지만, 이내 이들을 받아주기로 마음먹는다. 세 사람은 가는 내내 티격태격하고, 자동차 접촉사고까지 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펠릭스는 600㎞를 달려왔지만 알마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평소 여행에 취미가 없던 셰리프는 우연히 아기 엄마 엘레나와 그의 딸 니나를 만나며 이 여정에 조금씩 마음을 연다.

눈치챘겠지만 ‘다 함께 여름!’에는 이렇다 할 줄거리 같은 것이 없다. 이 영화를 억지로 한 줄 요약한다면 ‘청춘,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방황’ 같은 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감독 기욤 브락의 장기는 자칫 클리셰에 가까워 보이는 내용의 장르(코미디) 영화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담백하게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이 영화는 줄거리에 기대어 움직이는 여느 장르 영화처럼 특정 등장인물만을 좇지 않는다. 인물의 움직임을 가만가만 따라가는 카메라를 보고 있으면, 카메라 역시 강물처럼 이리저리 흐른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먼저 짚고 싶은 것은 기욤 브락이 사회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다. 영화가 정치적 메시지를 어둡지 않게 담아내려 할 때,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우스워지거나 메시지가 흐려지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나 기욤 브락은 누군가를 조롱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을 담담하게 드러낼 줄 안다. 이를 테면 셰리프가 성적이 좋아도 학비 때문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대목이나,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이용해 돈을 번다고 이야기하는 대목. 영화는 툭, 하고 무심히 화두를 던지지만 우리는 머물러 생각할 수 있다. 감독은 셰리프의 이야기를 들은 에두아르가 어떤 구체적 반응도 하지 않게 함으로써 관객이 틈을 비집고 들어갈 여지를 준다. 니콜라가 곤충과 동물이 사라질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증을 앓고 있다고 털어놓을 때, 맞은편에서 이야기를 듣던 알마는 그 문제를 고민해 본 적 없는 사람이 되어 아주 피상적인 공감만을 한다. 니콜라의 질문과 알마의 답 사이, 그 빈 공간을 메우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이라면 인물 간의 실랑이가 심화되지 않고 생략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매일같이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인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상황과 사람을 맞닥뜨리면 그것을 조율하고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마저 그래야 할까? 감독 기욤 브락은 이 점을 아주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언급했듯, 카풀 상대가 여성인 줄 알았던 에두아르는 막상 약속 장소에 나온 것이 펠릭스와 셰리프라는 것을 알고 분노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화를 내지 않는다. 에두아르는 두 사람을 신고하겠다고 벼르고 두 사람도 여기에 맞서지만, 실랑이는 더 커지지 않고 영화도 그들의 언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다음 순간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재미있게도, 함께 차에 타 여행길에 오른 세 사람의 모습이다.

영화의 종반부, 셰리프는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엘레나에게 술을 마시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엘레나는 잠든 니나를 두고 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제 관객이 생각하는 다음 장면은 셰리프가 엘레나를 본격적으로 설득하거나 둘 중 한 사람이 마음이 상해 갈라지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번에도 불필요한 곁가지들을 모두 잘라낸다. 그리고 곧바로 장면을 전환해 아예 손을 잡고 술집에 들어서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장면 전환은 어떤 카타르시스마저 안기는데, 내게는 이것이 일상의 문법을 벗어난 일종의 판타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노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익숙할 테지만 멀리 이국의 관객에겐 충분히 낯설 노래들마저, ‘다 함께 여름!’은 어쩐지 따라 부르고 싶게 만든다. 엔딩에서 수줍게 노래를 열창하는 엘레나와 그런 엘레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셰리프,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또 다른 사람들. 혹은 강가에서 잠들었다가 막 일어난 펠릭스의 귀에 들리는 노래와,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제3의 여인. 스크린 안쪽의 인물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스크린 바깥의 관객도 함께 즐기게 되는 일. 이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일까.

‘다 함께 여름!’을 보는 내내 느끼던 행복감은 나로 하여금 리뷰를 쓸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이 영화가 주는 기쁨은 사실 분석할 수 없는 것에 가깝기도 하고, 분석을 한다 해도 손안에 포착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나처럼 휴식을 갈망하는 누군가에게 이 영화가 가서 닿았으면 하는 소망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인 바람도 있다. 더 많은 관객이 기욤 브락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면, 이 드물고 귀한 감독의 영화를 계속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개봉 2021년 10월

감독 기욤 브락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코미디, 드라마

국가 프랑스

러닝타임 100분

박수영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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