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매체가 대장동 비리 의혹 블랙홀에 빠져 있다. 그 양상만 보면 가히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시즌 2라고 할 만하다. 사실 두 사건은 최고 권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한쪽은 현직 대통령이고, 다른 한쪽은 잠재적 미래 권력인 여당 대통령 후보다.

이처럼 최고 권력과 밀접하게 관련된 의혹이 공론화되어 내막이 밝혀지기는 현실적으로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국정농단은 비교적 소상하게 실체가 규명되어 결국에는 탄핵에까지 이르렀다. 그 험난한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과연 대장동 비리 의혹도 단순 스캔들일지 권력형 게이트일지 그 내막이 밝혀질 수 있을까.

이런 무거운 물음을 앞에 두고 저절로 눈길이 가는 인상적인 현장 보고서가 있다. 바로 이진동의 ‘이렇게 시작되었다’(2018)이다. 부제는 ‘박근혜-최순실, 스캔들에서 게이트까지’다. 제목과 부제가 시사하듯이 이 책은 한 기자가 조그만 실마리를 붙잡고 국정농단이라는 거대한 실체에 한발 한발 다가서는 생생한 경험담을 담고 있다. 저자는 2016년 당시 TV조선 기획취재부장·사회부장으로서 국정농단 사태를 최초로 세상에 고발하기 시작한 당사자다.

2014년 10월 저자는 지인의 소개로 고영태를 만났다. 고영태는 “어떤 여자가 제 여자친구만 있는 집에 들어와 현금 1억원과 명품 시계를 가져갔는데,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해서요”라고 하소연했다. 무슨 치정 문제인가 하여 시큰둥했는데 ‘어떤 여자’가 바로 최순실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었다. 고영태는 최순실과 밀접한 공생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고영태는 김종 문체부 차관과 차은택 문화창조융합본부장이 자신을 통해 최순실에게 보고하다가, 지금은 자신이 배제당했다는 불만도 토로했다. 두 사람 모두 최순실이 자리에 앉혔으며, 특히 차은택은 자신이 추천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자신이 대통령 의상 제작실을 관리하지만, 최근에는 사이가 틀어져 최순실이 그 관리 비용조차 주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저자는 고영태가 의상실의 법적 관리자라는 점을 확인하고 CCTV를 설치하여 내부 상황을 촬영할 수 있느냐고 하자 순순히 응했다. 다음달인 11월에는 정윤회 국정개입설이 터졌지만 유야무야되었다. 12월에 드디어 고영태로부터 한 달여에 걸친 의상실 CCTV 영상을 건네받았다. 아울러 고영태는 청와대 내부 문건을 비롯해 서류뭉치 한 상자도 가져왔다.

저자는 자료를 검토하며 내밀하게 취재에 돌입했다. 그 결과, 최순실이 체육 쪽은 김종을 통해, 문화 쪽은 차은택을 통해 주무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그들이 사설 사무실에서 만든 조잡한 보고서가 실제로 수백억원의 예산을 끌어오곤 했다. 대통령의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한 정황이다. 결국 김종·차은택-최순실-대통령이라는 밑그림이 그려졌다.

더구나 2015년 연말에서 2016년 연초에 걸쳐 대기업들의 출연금으로 미르문화재단, K스포츠재단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두 재단에 대한 출연금이 무려 900억원에 달했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저자만이 이를 주목하여, 기획취재팀을 독려했다. 취재를 해보니 대기업들은 안종범 경제수석의 강요로 돈만 냈을 뿐, 두 재단의 실질적 막후는 최순실이었다.

하지만 권력형 의혹은 섣불리 건드리기 어렵다. 더구나 조급증으로 반짝 뉴스를 내보내면 김이 빠지고 패만 노출된다. 2016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여당이 ‘진박’ 타령을 하다가 패배했다. 나아가 6월에는 차은택이 주도한 국가브랜드 사업이 비판받는 등 권력의 행태들이 하나둘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저자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무려 1년6개월 동안 자신이 혼자 보관하던 CCTV 영상을 기획취재부 팀원들에게 공개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대통령 의상 제작실 모습이다. 대통령의 의상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가운데 최순실은 청와대 직원들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었다. 드디어 저자는 일선 기자들에게 취재 활동의 최종 목표가 대통령임을 알려준 것이다.

이로써 취재 방향과 보도 순서가 분명해졌다. 우선은 수족(手足)을 치기로 하고, 7월부터 김종과 차은택에 대한 폭로 뉴스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는 저절로 미르문화재단, K스포츠재단에 대한 폭로로 확대되었다. 타깃도 자연스럽게 최순실과 청와대로 옮겨졌다. 이어서 의상실 영상을 통해 대통령으로 치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청와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마침 조선일보 주필이 외부 기업의 인사에 개입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왔다. 순식간에 ‘청와대 대 조선일보’ 대결 프레임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청와대의 내밀한 압력이 조선일보를 짓눌렀다. 한편으로는 우병우 사태가 들끓어 모든 언론이 거기에 매달렸다. 이런 와중에 국정농단 의혹 보도는 주춤하고 말았다.

후속 보도가 가로막힌 저자는 발만 동동 굴렀다. 여기저기서 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으나, 권력은 겉으론 여전히 서슬이 퍼랬다. 위기를 느낀 정권은 10월 24일 느닷없이 개헌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JTBC는 최순실 태블릿을 공개했다. 의상실 CCTV 영상은 거의 2년을 대기하다가, 태블릿에 ‘스모킹건’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드디어 모든 언론이 들끓었지만, 저자가 착실히 준비해 온 뉴스는 질이 달랐다. 특히 대통령 의상실 영상, 최순실 주차장 돌발 인터뷰, 고 김영한 전 민정수석 업무일지 등이 백미였다. 그가 그린 취재 밑그림은 한 꺼풀씩 밝혀지는 국정농단의 줄기 그 자체였다.

펭귄 떼가 바다 앞까지 왔지만, 천적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선뜻 물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러다가 한 마리가 뛰어들면 일제히 뒤쫓아 뛰어든다. 이때 가장 먼저 뛰어든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고 한다. 권력에 대한 취재도 섣불리 뛰어들기 어렵다. 철저한 준비와 불굴의 용기가 필요하다. 저자야말로 국정농단을 최초로 물 위로 끌어낸 ‘퍼스트 펭귄’인 셈이다.

한편 고영태는 인간적 서운함으로 처음에는 내부고발자를 자처했으나, 곧이어 최순실에게 돌아가 취재를 방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국정농단이 물 위로 터지고 청문회가 열리자 마치 의인처럼 행동했다.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심지어 취재에 협력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그것을 최순실이나 청와대에 압력을 넣는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경우도 있었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각자 입장에 따라 다양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기자에게는 취재 지침을, 수사관에게는 수사 전략을, 일반인에게는 이런 권력형 의혹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선사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교훈은 “권력형 의혹은 결코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양심에 입각하여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피나는 분투노력이 있어야 한다.

권력과 돈이 과하게 집중되면 내분도 필연적이다. 저자는 말단 행동책의 일시적 불만을 실마리로 국정농단이라는 거대한 뿌리를 추적했다. 이번 대장동 의혹도 이해관계자들의 제보와 폭로로 점화되었다. 이제 여기에 우리의 분투노력이 더해질 차례다. 과연 알려진 인물들이 전부일까, 위쪽으로 줄기가 있을까. 그것이 스캔들과 게이트를 가르는 관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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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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