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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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세계적 인기를 모았던 록밴드 블론디의 리드싱어 데보라 해리(76)를 영상 인터뷰했다. 데보라 해리는 ‘하트 오브 글래스’ ‘콜 미’ ‘랩처’ 등 많은 히트곡을 부른 가수이자 ‘비디오드롬’과 ‘헤어스프레이’ 등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한 금발 미녀다. 해리는 1981년 잡지 ‘하퍼스 바자’에 의해 미국 최고 10대 미녀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해리는 2019년 쿠바에서 가진 자신의 공연을 찍은 단편 기록영화 ‘블론디: 하바나에 살다(Blondie: Vivir En La Havana)’ 홍보차 뉴저지주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엷은 미소를 지어가며 담담하게 질문에 대답하는 데보라 해리에게서 늦가을 같은 쇠락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블론디: 하바나에 살다’의 한 장면.
‘블론디: 하바나에 살다’의 한 장면.

- 당시 쿠바 공연을 하면서 놀란 일이라도 있는지. “놀란 사실은 내 노래를 반주한 밴드 연주자들의 철저한 직업정신이었다. 함께 일하면서 대단히 멋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철저히 준비했고 또 협조적이었다. 그들은 록 음악에 라틴 감성을 접목하려는 내 뜻을 알고 마음껏 라틴 감성을 살려주었다. 그들은 사랑스럽고 멋있고 재미있고 재주가 많은 음악가들로, 내 쇼를 완벽하게 해주었다.”

- 생애 가장 큰 도전은 무엇이었는가. “말하기 슬픈 얘기지만 복잡한 성격을 지닌 자신과의 대면이라고 해야겠다. 진실된 나 자신, 그리고 내가 꿈꾸는 나 자신과의 화해야말로 생애 가장 큰 도전이었다.”

- 사람들이 ‘콜 미’ 같은 당신의 노래 제목으로 당신을 부를 때 기분이 어떤지. “아주 기분이 좋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이야말로 흥분되는 일이다. 사람들이 알아준다는 것은 내가 종사하는 음악이라는 직업의 필수 요소라고 하겠다.”

- 무대 공연이 그리운가. 무대공포증을 경험한 적이 있나. “가수 초년 시절 내 앞에 있는 청중들을 상대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그때 수줍음을 타고 경험도 미천했는데 그런 내가 그들을 인식하고 또 다뤄야 한다는 것은 큰 공부였다. 처음에는 청중들이 나를 받아주든지 아니면 싫어하든지, 청중들로부터 먼저 어떤 반응을 기대하다가 갑자기 그럴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청중들한테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니 모든 것이 해결되더라. 노래를 부르기 전 감정적으로나 마이크를 비롯한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철저히 준비해 무대공포증은 별로 느껴보지 않았다. 하나의 완벽한 기능인으로서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 당신은 공연할 때 다채로운 색깔의 의상을 입는 것으로도 잘 알려졌는데 의상이 공연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의상과 그것으로 몸 가꾸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정말로 여성적이다. 의상과 색깔은 가수로서의 나를 보다 개성적으로 만들어주며 또 나를 보다 대담하게 만들어준다. 이와 아울러 내 자질마저 북돋워준다고 하겠다. 특히 솔로로 순회공연할 때면 전체 공연에서 입을 옷의 색깔을 단색 아니면 단 두 가지의 색깔로 정하곤 했다. 그 색깔에 악센트를 주어 공연 분위기와 청중들과의 친근감을 높이려고 시도했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 처음으로 당신의 노래를 라디오로 들었던 것이 언제 어디서였는지 기억하는가. “분명히 기억하는데 그때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친구와 함께 뉴욕 21번가를 걷고 있는데 지나가는 차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가 좋아 친구에게 ‘야, 노래 참 좋네’라고 말했더니 친구가 나를 보면서 ‘네가 부른 립 잇 투 슈레즈야’라고 알려줬다. 그때 그 곡이 내 노래인 줄도 모르고 좋아했다.”

- 가수 초년 시절을 보낸 뉴욕에 대해 어떻게 추억하는지. “뉴욕 생활은 가수이자 인간으로서의 내 삶의 한 부분이어서 언제나 아주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9·11 사태가 일어났을 때 난 집에서 소파에 누워 있었는데 그때 간절히 느낀 것이 1970년대 뉴욕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갈망이었다. 그때는 경제적으로 침체되었을 때였으나 뉴욕은 에너지와 창조성으로 가득 찼었다. 그 시절을 뉴욕에서 경험하고 또 그곳 출신이라는 것은 큰 행운이다.”

- 당신은 수백만 명이 보거나 들을 수 있는 TV 쇼나 라디오 쇼에 나오지 않았는데 요즘처럼 휴대폰이나 컴퓨터로 수많은 사람이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볼 수 있는 시대에 활동했다면 어땠을 것 같은가. “내가 활동했을 때는 기계의 발달로 전 세계의 사람들이 동시에 내 노래와 공연을 듣거나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그런 숫자와 대면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우리가 기계화를 전연 무시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는 신시사이저를 처음으로 사용한 밴드 중 하나다. 그런데 요즘은 컴퓨터가 너무나 발달해 오히려 음악의 수준을 하향시키는 경향이 있다. 기계가 리듬과 멜로디를 만들어줘 거의 아무나 가수가 될 수 있다고까지 하겠다.”

록밴드 블론디의 공연 장면. ⓒphoto 뉴시스
록밴드 블론디의 공연 장면. ⓒphoto 뉴시스

- 당신은 여권운동의 기수 중 한 사람인데 요즘 여권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고집이 세고 독립적인 여자다. 요즘 미국과 유럽의 여성들은 대부분 잘 살고 또 자기 갈 길도 선택할 기회가 있지만 소위 제3세계의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정신적으로나 감정적 또 지적으로 학대를 받고 있다. 장차 이런 것들이 개선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지금도 1960년대에 행했던 여권운동 시위를 기억하고 있다. 그때는 브래지어를 불태우면서 피임약을 먹을 권리를 주장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시대와 법이 많이 좋아졌고 이런 개선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성과 관계없이 모두 인간일 뿐이다.”

- 당신은 음악과 패션에서 우상과 같은 존재였는데 그런 삶과 개인적 삶을 어떻게 조절했는가. “나는 다행히 일부 다른 유명인사들보다 덜 알려진 사람이다. 늘 가수로서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삶과 내 개인적 삶의 균형을 맞춰 살려고 노력했다. 개인적으로는 좋은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유명인사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왔다. 나는 나만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놓았었다. 제니퍼 로페즈나 셰어 같은 거대한 국제적 스타들이 어떻게 유명세를 다루며 사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블론디도 스스로 대중에 노출되는 비중을 조절하곤 했다.”

- 쿠바 방문에서 느낀 점은. “미국의 쿠바에 대한 통제는 쓰레기 같은 정치적 문제로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다. 나는 쿠바 문화와 사람들을 크게 찬양하고 있다. 쿠바는 비록 영토가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문화의 정체성과 아름다움은 경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다. 내 경험에서도 터득한 바이지만 생존이 어려울수록 문화는 더욱 중요하고 또 생동감으로 가득 차게 마련이다. 쿠바 사람들은 참으로 다정하고 관대하다. 나는 쿠바 음악과 춤을 매우 사랑한다.”

- 개인적 생활은 어떻게 보내는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친구들이다. 그리고 영화와 연극을 즐긴다. 최근에는 뉴욕 시티 발레 공연을 봤다. 여러 가지를 시도하고 있지만 요즘에는 이 영화를 감독하고 무대 디자인을 한 로브 로스와 함께 일한다. 그와 같이 이번 영화를 가지고 영화제에 참석하면서 새 경험을 하고 있다. 난 늘 새롭게 할 일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 명상을 하는지. “그렇다. 큰 가치를 둘 필요는 없지만 명상은 중요하다. 그 밖에 나는 신체단련을 위해 정기적으로 운동을 한다.”

- 당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여성들은 누구인가. “내 학교 선생님들이다. 그들은 다 직선적이면서도 친절하고 관대했다. 영혼의 관대성이야말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좋은 점이다. 내가 존경하는 또 다른 여성은 셰어이다. 그는 개인적 삶과 연예인으로서의 삶이 모두 제로에서 백만에까지 이른 사람으로 재주가 비상할 뿐 아니라 유머감각이 뛰어나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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