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연일 화제다. 이 드라마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오징어놀이 등의 전통놀이를 차용해 현실 속의 극한적 생존경쟁을 절묘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관객은 놀이의 재미와 현실의 충격을 동시에 만끽하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것 같은 비장함에 사로잡힌다. 이런 재미·충격·공감이 이 드라마의 인기 비결이다.

우리는 놀이에서 진 사람에게 흔히 ‘죽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상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징어게임’에서는 놀이에서 지는 사람이 ‘실제로’ 죽임을 당한다. 처음에는 그저 돈이 걸린 놀이인 줄 알고 참가한 사람들은 곧바로 이 끔찍한 현실을 받아들이며 서로 간에 살육도 불사한다. 이 음습한 드라마를 바라보며 우리는 “본래 놀이는 저런 게 아닌데…”라는 상념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렇다면 본래 놀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때 퍼뜩 떠오르는 묵직한 고전이 있다. 바로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Homo Rudens·1938)이다. 루덴스(rudens)는 ‘놀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어원의 분사형이다. 그러니 호모 루덴스는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인간의 ‘생각하는’ 특징에 주목한다면, 호모 루덴스는 인간의 특징을 ‘놀이’에서 찾아보려는 독특한 관점이다. 저자는 ‘중세의 가을’(1919)로 유명한 네덜란드 역사학자이자 문화이론가다.

저자는 이미 ‘중세의 가을’에서 ‘놀이’ 개념의 단초를 포착한 바 있다. 거기서 그는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갈망하는 세 가지 방법을 언급했다. 하나는 비참한 현실을 부정하고 내세에 기대를 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현실에 도전하여 개선하는 것이다. 셋째는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이런 길을 택한 중세인들은 환상의 꿈나라에 살면서, 그 속에서 비루한 현실을 아름답게 채색했다.(주간조선 제2530호 본란 참조)

특히 중세 후기의 꽃인 기사도와 궁정연애에 이런 특징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것들은 진지한 현실을 외면한 채 장황한 격식과 규칙을 갖춘 성대한 유희처럼 놀이되었다(played). 이를 통해 중세 후기는 안으로 붕괴하면서도 겉으로는 장엄한 빛을 내뿜었다. 이처럼 놀이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중세 문화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여기서 저자는 “문명은 놀이와 관계가 깊다”는 단서를 얻었다. 이런 통찰이 나중에 ‘호모 루덴스’의 밑바탕이 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놀이는 물질적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명령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재미를 위한 자발적 행위다. 그것은 일상적·실제적 삶이 아닌, 가상의 세계다. 즉 어떤 장소에서 일정 시간 놀다가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럼에도 놀이터에는 절대적인 질서가 존재한다. 어린 시절의 놀이를 떠올려 보면 이러한 정의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한편 놀이의 기능적 특징으로는 경기와 연기가 있다. 경기는 대결하여 승부를 내는 것이다. 연기는 누가 더 탁월하게 기능을 드러내느냐다. 어느 경우든 놀이는 경쟁을 수반하며, 그것이 재미를 북돋는다. 간혹 재미를 더하기 위해 약간의 물질적 대가를 도입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놀이는 종종 사행성 게임으로 변질되지만, 그런 게임은 이미 놀이가 아니다.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저자는 동서고금의 다양한 문화를 넘나들며 그 속에 녹아 있는 놀이 요소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태초부터 문화는 놀이의 특성을 가졌고 놀이의 형태와 분위기에 따라 발전했다. 원시사회에서 필수적인 생존 활동인 사냥도 놀이 형태를 취했다. 또한 자신의 탁월함에 대해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문화적 욕구도 놀이에서 자신의 기량을 뽐내려던 원초적 욕구와 맥을 같이한다. 이렇듯 문화는 놀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저자는 놀이가 문화의 하위 분야라는 통념을 거부한다. 놀이는 문화 이전부터 존재한 문화의 원천이다. 한마디로 놀이가 문화 발전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나아가 놀이 요소들은 인류 역사를 관통하며 법률, 전쟁, 학문, 시, 신화, 예술 등에 진한 흔적을 남겼다. 그리하여 현대 문명에도 놀이 요소들이 여전히 생생하게 숨 쉬고 있다.

얼핏 보면 놀이와 법률은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소송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은 일정한 규칙과 신성한 형태를 가진 경기로서, 거기에는 놀이 요소가 깃들어 있다. 법관들도 법정에 들어설 때는 법복을 입고 심지어 가발까지 쓰면서 일상생활로부터 벗어난다. 그리하여 소송은 일상을 떠난 한정된 시공간에서 승부를 다투는 놀이 형태로 펼쳐지게 된다.

전쟁에도 놀이 요소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다. 특히 고대에는 싸울 시간과 장소를 사전에 협의한다든지, 장군들끼리 미리 약속한 대결을 벌인다든지, 적이 진용을 갖출 때까지 기다린다든지 하는 규칙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선전포고, 포로 대우 등에 관해 다양한 규칙이 여전히 살아 있다. 이처럼 전쟁도 일정한 규칙을 가진 놀이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학문 역시 놀이 성격이 강하다. 소피스트들은 궤변으로 상대를 꺾으려고 했고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 상대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 이후로도 학자들은 이성이나 말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했다. 모든 지식은 본질적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논쟁은 겨루는 특성을 갖는다. 대학의 장엄한 의식이나 복장도 일상생활을 벗어난 놀이 영역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종교, 과학, 법, 전쟁, 정치 등에서 놀이 요소는 점차 희미해졌다. 반면 예술은 여전히 그 원천인 놀이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그것은 정신의 놀이터에서 벌어지며, 그 놀이터는 정신이 그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허구적 세계다. 그 속에서 사물들은 진지한 일상생활과는 다른 외관과 특성을 지니게 되며, 논리와 인과관계를 훌쩍 벗어난다. 이렇듯 예술은 오늘날에도 놀이 요소가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영역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문명은 놀이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가 자궁에서 나오듯이 놀이로부터 뚝 떨어져 나오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in and as play)’ 생겨나며, 놀이를 떠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문명은 일정한 규칙에 의거하여 놀이되며(played), 진정한 문명은 언제나 페어플레이(fair play)를 요구한다. 페어플레이는 놀이의 관점으로 표현된 신의 성실을 말한다. 그런 놀이정신을 망치는 행위는 문명도 망치게 된다.

드라마 ‘오징어게임’에서 전통놀이 ‘오징어놀이’는 엄청난 대가(무려 456억원!)를 얻기 위해 ‘실제로’ 죽고 죽이는 극한적 생존경쟁의 최후를 장식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놀이정신도 페어플레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징어게임’은 결코 ‘오징어놀이’가 아니다. 드라마 속의 놀이터는 문명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말살된 참담한 디스토피아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일지 모른다는 것이 드라마가 주는 섬뜩한 경고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스산하기 짝이 없다. 심지어 이번 대통령선거가 ‘오징어게임’이라는 자조(自嘲)도 심심치 않다. ‘이기면 청와대로, 지면 감옥으로’ 가게 된다면 그게 바로 ‘오징어게임’ 아닌가. 그래서 이 한국산 드라마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매우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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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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