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티야이레온주의 메세타 고원. 해발 800m대의 대평원은 봄·여름에는 밀을 비롯한 농작물 덕에 풍요로운 빛으로 가득 찬다. 늦가을로 접어든 고원은 아침이면 옅은 안개와 하늘의 빛이 조화를 이루며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카스티야이레온주의 메세타 고원. 해발 800m대의 대평원은 봄·여름에는 밀을 비롯한 농작물 덕에 풍요로운 빛으로 가득 찬다. 늦가을로 접어든 고원은 아침이면 옅은 안개와 하늘의 빛이 조화를 이루며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순례길(Camino)은 예수의 12제자 중 한 명인 야고보 성인을 찾아가는 길이다. 야고보 성인의 스페인 이름이 산티아고이고, 영어식 이름은 생 제임스(St. James), 프랑스식 이름은 생 자크(Saint Jacques)이다.

야고보 성인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당한 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으나 서기 44년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게 처형을 당한다. 그러자 성인의 제자들은 그의 유해를 돌배에 싣고 스페인 서부해안 파드론(Padron)에 닿은 다음 그가 포교활동을 펼친 갈리시아 지방으로 운반한다. 그때 제자들과 말의 몸에 가리비 조개가 붙어 있었다 하여 가리비 조개가 순례길의 상징이 됐다.

이후 오래도록 잊고 있었는데 813년 한 목동이 하늘에서 빛나는 별(stellae)을 보고 들판(campus)에 나섰다가 야고보 성인의 유골을 발견했고 이후 지금의 성지 순례길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주로 종교적인 이유로 걷지만, 자기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걷는 명상의 길이기도 하다.

순례자들은 대부분 시설이 열악한 도미토리식 숙소인 알베르게(Albergue)에서 잠을 자면서 800㎞에 이르는 길고 긴 순례길을 걷고 또 걷는다. 묵묵히 길을 헤쳐나가면서 스페인 대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그 사이사이 마을 곳곳에 세워진 성당이나 성, 혹은 건물에서 중세 가톨릭 문화를 경험하기도 한다. 낯선 이방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환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마을 어귀에 자리한 음식점이나 카페(bar)에서 저렴한 값으로 내놓은 스페인 전통음식과 와인을 먹고 마시는 즐거움 또한 쏠쏠하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좋은 여행이 되기를’ ‘너의 길에 행운이 있기를’.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들은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이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축복의 인사다. 길을 걷는 이들은 80대 노인에서 10대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나이도 다양하다. 간혹 짤막한 말로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묻고 순례길을 걷는 이유에 대해 궁금해한다. 얼굴에 주름이 잡힐 때까지도 잊고 지냈던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 이들이 가장 많은 듯하다. 암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도 있고, 병으로 가족을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걷는 이들도 있다. 또 저세상 사람이 된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걷는 이도 있다. 부부나 연인들도 보인다. 실연의 아픔을 삭히기 위해 걷는 이들도 있다. 물론 재잘거리며 걷는 청소년들도 있고, 산악자전거로 씽씽 달려가는 바이커들도 있다.

800㎞ 길이의 프랑스길 중 첫날 넘는 피레네산맥. 나폴레옹길이라 불리는 고원산릉 길이다.
800㎞ 길이의 프랑스길 중 첫날 넘는 피레네산맥. 나폴레옹길이라 불리는 고원산릉 길이다.

피레네산맥 나폴레옹길을 상징하는 성모마리아상.
피레네산맥 나폴레옹길을 상징하는 성모마리아상.

순례자의 사연에 관계없이 가을 카미노는 아름다웠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이룬 피레네산맥은 10월 중순임에도 아직 여름 빛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부드러움과 광대함을 함께 갖춘 풍광은 행복감에 젖기에 충분했다. 나바라(NaVarra)주에 들어서자 가을 풍경화 속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광활한 밀밭은 가을 빛에 반짝이면서 곡선미를 자랑했고, 연못에 비친 가을 풍광은 순례자의 마음을 빼앗았다.

숲 우거진 된비알을 올라서자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에 우뚝 선 순례자 조형물이 반겨준다.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을 다짐하는 언덕이라고 한다. 이날 도보 순례를 마치고 마을 골목길을 따라 다가선 여왕의 다리(Puente la Reina)는 11세기 때 아르가(Arga)강을 건너는 순례자들을 위해 당시 나바라왕국의 여왕이 세웠다는 돌다리다. 성예수교회는 12세기 순례객들의 안전을 위해 조직된 템플기사단이 지은 교회다.

라리오하(La Rioja)주 역시 광활한 대지였다. 그곳은 가을의 상징인 포도가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채 유혹했다. 농부들이 수확을 끝낸 뒤 남겨진 포도는 순례객들을 포도향으로 가득 적셨다.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on)주의 부르고스 구시가지에 웅장하게 세워진 부르고스성당은 웅장함과 정교함으로 인해 모두를 감탄케 했다. 1221년부터 3세기가 넘는 오랜 기간 지어졌다는 이 성당은 스페인 역사 속 영웅 엘시드(El Cid)의 유해가 안치돼 있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었다.

갈리시아의 산골 성당.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당과 성당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갈리시아의 산골 성당.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당과 성당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메세타고원의 젖줄 역할을 하는 카살데카스티자 운하. 수채화풍의 풍경을 자아낸다.
메세타고원의 젖줄 역할을 하는 카살데카스티자 운하. 수채화풍의 풍경을 자아낸다.

메세타고원으로 향하는 순례자들.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스트라레스 고개를 넘어서면 대평원이 펼쳐진다.
메세타고원으로 향하는 순례자들.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스트라레스 고개를 넘어서면 대평원이 펼쳐진다.

고원지대인 메세타(meseta) 지역은 황홀한 풍경을 펼쳐주었다. 해 뜰 녘 모스트라레스 언덕(Alto de Mosterares·910m)은 황금빛으로 순례객을 맞아주었고, 언덕을 넘어서자 모습을 드러낸 광활한 대지는 새벽 안개를 벗어젖히며 새 세상을 펼쳐주었다. 메세타 끄트머리에 길게 뻗은 수로는 대지의 젖줄이었다.

우리나라 강원도를 연상케 하는 갈리시아주에 들어서자 쇠똥 냄새가 진동한다. 돌담길이 많이 등장하는 순례길 양옆의 초원은 대부분 소나 양의 방목지다. 그 냄새가 결코 싫지만은 않다. 어릴 적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향’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100㎞ 남겨놓은 지점부터 순례자들이 많이 늘어난다. 순례길 10여가닥 중 우리가 걸은 ‘프랑스 길’ 기점인 생장(Saint Jean de Port)뿐 아니라 마드리드에서부터 길을 나선 순례자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찾은 많은 이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100㎞ 앞둔 지점부터 걸어야 산티아고 대성당 부근에 위치한 순례자 사무소에서 도보 순례 완주증을 발급한다. 이곳에선 순례자가 길을 걸으며 식당 혹은 숙소에서 순례자여권(credencial)에 받아온 도장(세요)을 확인한다.

순례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다가서는 날까지 몽환적 풍경으로 발목을 붙잡곤 했다.
순례길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다가서는 날까지 몽환적 풍경으로 발목을 붙잡곤 했다.

갈리시아 구간에 간간이 등장하는 숲터널.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문 같은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갈리시아 구간에 간간이 등장하는 숲터널.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문 같은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이 성지순례의 최종 목적지이다. 마지막 날 걷는 구간 역시 감동적이다. 스페인 북부지방 대부분이 그렇듯이 가을날 아침은 안개가 자욱하다. 그 안개를 뚫고 솟은 나무나 들녘은 햇살에 반짝이며 몽환적 풍경을 자아낸다.

도시를 가로질러 도착한 산티아고 대성당 맞은편 건물 꼭대기에 야고보 성인이 말을 타고 달리며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지만 함께 걸은 이들끼리 서로 감싸안은 채 완주의 기쁨을 나눈다. 주저앉은 채, 얼굴을 감싼 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보인다. ‘할렐루야’ 성가를 합창하며 감동의 시간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프랑스 생장을 출발해 하이라이트 구간을 11일간 걸은 우리 일행도 각자 의식을 행한다. 가리비 조개껍데기 형상의 상징물에 손을 얹은 채 무릎 꿇고 앉아 무사 완주를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행복한 미래를 기원하는 정화의 시간이다. 일행 모두가 그랬다. ‘위드 코로나’ 시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모든 이들의 앞날에 행복이 넘쳐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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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석 전 월간산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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