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아이. 늘 밝은 표정을 짓고, 사교적으로 보이며, 종종 발생하는 마찰에도 초연한 아이. 주변에서 본 청소년기의 내 모습이다.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나는 친구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언제나 힘에 부쳤고, 그 속에서 늘 어딘가는 곪아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에게 학교는 공부나 기타 활동 못지않게 대인관계에도 신경 써야 하는 곳이다. 특성상 독립적인 개인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혼자 있으면 안 되는’ 곳이기도 하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하교하는 사람은 곧 왕따가 되고, 친구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늘 혼자를 갈망하면서도 그럴 수 없었던 나는, 학교의 보이지 않는 규칙을 따르기 위해 분투해야 했다.

‘디어 에반 핸슨’을 보면서 지나온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청소년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면서도 그 상처와 외로움의 이유를 당사자에게서 찾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학창 시절을 이미 통과했거나 통과하는 중인 관객이라면 영화를 보는 동안 얼마간 위로받을 수 있다. 주인공 ‘에반’은 심리 치료의 일환으로 매일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라는 처방을 받는다. 그는 틈나는 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 ‘디어 에반 핸슨’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쓴다. 에반은 자신에게 말하는 것조차 썼다 지웠다를 반복할 만큼 소심한 성격인 데다, 대인관계에도 어려움을 겪는 상처가 많은 학생이다. 어느 날 그는 자신에게 쓴 편지를 ‘코너’에게 빼앗긴다. 코너는 에반과는 다른 이유로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다소 ‘폭력적인’ 학생이다. 에반은 빼앗긴 편지가 소셜미디어(SNS)에 공개될까 불안에 떨고 있는데, 며칠 뒤 코너의 부모가 학교로 찾아와 에반에게 편지를 돌려준다. 코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의 주머니에서 에반에게 쓴 (에반이 스스로에게 쓴) 편지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그 편지를 코너의 유서로 여기고, 에반은 모두 오해라고 말하려 했지만 생전 코너에게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에 위로받는 그의 부모님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다. 코너의 부모는 매일같이 에반을 그들의 집에 초대해 친아들처럼 보살피기 시작하고, 학교 친구들은 자신들이 지켜주지 못한 코너 곁에 에반이 있었다는 사실에 감동한다. 에반은 평소 짝사랑하던 코너의 동생 ‘조이’의 마음을 얻는 데에도 성공하지만,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다. 괴로워하던 에반은 끝내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생전 코너의 모습을 좇아 그와 정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는 인기 좋고 외향적인 학생에게도 남모를 아픔과 외로움이 있다는 것을 긴 시간 동안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특수한 아픔’을 누구나 겪는 ‘보편의 아픔’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다. 영화가 코너의 서사를 배제하며 그의 아픔을 뒤로 밀어두다 못해, 그 죽음을 에반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쓴다는 것이다.

철저히 ‘산 자’의 위치에 선 영화

영화 초반부에는 코너에 관한 약간의 디테일이 나온다. 관객은 코너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 데에는 불안정한 가정환경이나 어떤 불운한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코너의 위치에 서게 된 에반은 관객의 이런 가정을 모두 무너뜨린다. 영화는 에반의 시점을 통해 ‘코너의 가족은 모두 따뜻한 사람들이며, 집안엔 별다른 문제가 없고, 코너가 보인 폭력적인 성향 역시 어디까지나 코너 개인의 것’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영화는 이렇게 코너의 서사를 배제한 채 그를 통한 에반의 성장(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에반이 코너 가족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생전 코너와 주고받았던 것처럼 메일을 꾸며 쓰는 장면도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영화는 뮤지컬 영화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선보이는데, 하필 (에반이 상상한) 코너의 서사에 가장 밝고 경쾌한 리듬의 노래가 쓰인다. 에반이 자신의 상상대로 메일을 적어 나가면 장면은 코너가 등장하는 것으로 전환되고, 코너가 그 편지의 내용을 노래로 따라 부른다. 에반은 여기에서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코너는 (에반을 따라) 가사를 고쳐 부르며 율동을 반복한다. 이때 코너가 부르는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신시얼리 미(Sincerely Me)’이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외롭게 죽어간 코너를 생각하면 이런 설정은 문제적이다.

코너는 물론 실존 인물이 아니다. 또 이 장면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이라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에반의 머릿속 상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의 수많은 학생들이 코너와 비슷한 상황에서 죽음을 택했으며, 지금도 비슷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오직 살아있는 에반들을 위로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때 고통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은 또 한 번 배제되며, 그의 죽음은 대상화된다. 코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의 고통을 생략하는 것 역시 영화가 철저히 ‘산 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증거다.(자살한 코너가 에반의 자살을 막아주는 도구로 쓰인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면 과장일까?) 영화의 말미에서 에반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지만, 영화는 어쩐지 관객이 에반을 비난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듯 먼저 그를 변호하고 나선다.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디어 에반 핸슨’에는 뚜렷한 장점이 있다. 영화는 에반이 순식간에 영웅이 되는 과정이나, 코너가 친구에게만 유서를 쓰고 가족에게는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은 가족들이 비난받는 모습을 통해 소셜미디어를 둘러싼 문제들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다. 소셜미디어는 수많은 사람을 연결하고 그만큼 빠르게 미담을 확산시키기도 하지만, 근거 없는 소문을 순식간에 퍼뜨리기도 한다. 소셜미디어는 누군가를 외로움에서 구원해줄 장치이면서 동시에 고립과 조롱을 불러오는 도구이기도 하다.

토니상을 석권한 뮤지컬을 원작으로 하는 만큼 오래 듣고 싶은 좋은 노래들도 많다. ‘에반 엄마’ 줄리안 무어와 ‘코너 엄마’ 에이미 아담스는 등장만으로도 영화 팬들에게 즐거움을 안기며, 감정의 세밀한 면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청량한 음색으로 훌륭한 노래를 들려준다.

개봉 2021년 11월

감독 스티븐 크보스키

주연 벤 플랫, 줄리안 무어, 에이미 아담스, 케이틀린 디버, 아만들라 스텐버그,

      닉 도다니, 콜튼 라이언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뮤지컬, 드라마

국가 미국

러닝타임 137분

박수영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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