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표정과 행보에선 실존적 불안 같은 게 자주 읽혔다. 약속했던 국민과의 ‘소통’은 없었다. 조율되지 않은 대화를 피하는 눈치였다. 민감한 이슈와 관련해 법적으로 책잡힐 소지를 두지 말자는 참모들의 조언이 있었을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월성원전의 폐쇄 과정에서 나타난 관련자들의 신경증과 조급도 대통령 심기의 반영이었기 쉽다. 정권 차원의 금기(禁忌)인 듯 어떤 일에도 사과하지 않았다. 사과 과정에서 불가피한, 사실관계에 대한 인정이 나중의 법적인 다툼에서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걱정했을 게다.

세밑엔 자신이 천명한 원칙(5대 중대범죄 땐 사면 제외)을 어겨가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사면했다. 불투명한 사면 결정 과정에서도 모종의 불안을 감지한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보복의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야권을 분열시키고 한명숙씨의 복권을 호도하자는 내부 합의가 있었겠지만, 대통령 입장에선 행여 자신에게도 닥칠지 모를 ‘보복’의 중압감을 심리적으로나마 덜고 싶었을 게다.

말하자면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같은 것인데, 그 불안은 경기 종료 휘슬이 임박할수록 커진다. 5개월 후면 대통령이 바뀐다. 골키퍼도, 벤치의 스태프들도 신경이 날카로울 때다.

한국 현대사의 최대 이슈 ‘퇴임 이후’

70여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물러나거나 쫓겨나거나 사라졌다. 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은 물러났고, 이승만·박근혜는 쫓겨났다. 박정희는 사라졌다. 쫓겨나거나 사라지는 대신 임기를 채웠다고 무사했던 것도 아니다. 김대중·김영삼은 물러나기 직전 아들들의 구속을 지켜봐야 했다. 퇴임 후의 신산(辛酸)과 고초(苦楚)를 미리 감당한 것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예외적 행운이었다. 이명박은 퇴임하고 한참 후에 수감됐다. 노무현은 투신했다. 전두환은 사형을, 노태우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사면됐다.

대통령의 ‘퇴임’과 ‘퇴임 이후’는 한국 현대사 내내 핫이슈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실존적 불안과 측근들의 절박한 충정, 그리고 신경증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그리고 정권 말의 그 스산한 풍경 속으로 이제쯤 주역(周易)을 끌어들이려 하는데, 참으로 심란한 한국 현대사를 앞에 두고 주역이 건네는 첫 마디는 ‘무왕불복(無往不復)’이다.

동백꽃 같은 운명 그리고 주역

무왕불복….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없다는 의미다.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게 없다? 무슨 뜻인가. 회자정리(會者定離)란 말을 한다. 만나면 헤어진다. 그러나 거자필반(去者必反)이 따라붙는다. 헤어졌다가도 또 만나는 것, 간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것, 그게 세상 흘러가는 이치다. 은밀하지만 오묘한 반복과 윤회의 구도야말로 주역이 간파한 세계의 실상이다.

그런데 무언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은 축복인 동시에 재앙이다. 선(善)은 선으로 돌아오지만, 악(惡)은 악으로 돌아온다. 세상을 굽어보는 천상의 그물은 허술한 듯 촘촘하다고 한다. 여기저기 끊어지고도 제 할 일을 한다. 하지만 생사를 건 노력으로 그물이든 윤회든 끊고, 뚫고, 탈출해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이들도 있게 마련이다. 세상일은 알기 어렵다. 그래도 ‘무왕불복’을 주창하는 주역의 어딘가에 모종의 실마리가 있겠거니 믿으며 좀 더 파고들어 보자.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모진 운명과 관련해 주역은 두 가지 괘를 건넨다. 하나는 택천쾌(澤天夬), 다른 하나는 산지박(山地剝)이다. 두 괘의 경우 모양부터 살펴야 하는데, 주역의 암호를 해독하는 방법 중엔 직관도 있기 때문이다. 번잡한 해설을 배제하고 괘의 모양에서 직접, 사태의 조짐을 포착하는 방식이다.

택천쾌는 아래로부터 기세등등하게 치고 올라오는 다섯 개의 양(陽) 막대 위에 음(陰)의 막대 하나가 위태롭게 걸린 형국이다(). 어렵고도 외롭게 정권을 지탱하고 있지만, 밑으로부터의 저항과 반발을 감내하지 못한다. 쫓겨나고 만다.

붉은 동백꽃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다. 동백꽃을 두고 세 번 피어난다는 얘기를 한다. 가지 위에서 한 번, 땅에 떨어지고 한 번, 마음속에서 한 번…. 꽃잎 쌩쌩할 때 추락하는 동백꽃에 대한 역설적 찬양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잔혹하기 그지없다. 제 수명을 다하기 전에 툭, 난데없이 떨어지는 동백의 참혹한 운명….

동백꽃의 궤적을 한국 현대사에 대입하면 한 번은 군중, 한 번은 탄핵에 의한 추락이 있었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동백의 붉은 기운엔 짙은 혈흔이 배어 있는 셈이다. 쫓겨나는 지도자들에게 택천쾌의 괘가 던지는 마지막 속삭임도 두렵기 짝이 없다. 호소할 데가 없으리라(무호·無號). 끝내 흉한 일이 생기리라(종유흉·終有凶).

“10년 동안 쓰지 못한다”

택천쾌의 음양을 죄다 뒤집으면 산지박이다(). 가장 위쪽 양의 막대는 택천쾌 끝에 달려 있던 음의 막대처럼 외롭지만, 그래도 양의 기운이니 아래서부터 거슬러 올라온 음의 에너지를 감당한다. 위태로운 균형 끝에 가까스로, 그리고 스스로 물러난다.

김대중·김영삼·이명박·노무현·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산지박의 박(剝)은 벗겨진다는 뜻이다. 과감한 결단을 뜻하는 쾌(夬)와는 사뭇 다른 뜻이다. 나무의 거죽이 벗겨지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견뎌낸 뒤의 일이다. 주어진 시절을 누린 후에 벌어지는 사태다. 박정희의 사례는 택천쾌에도, 산지박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물러나지도 쫓겨나지도 않았다. 사라졌다.

문제는 쫓겨나는(택천쾌) 대신, 물러난(산지박) 대통령들에게 훗날 닥치는 모진 운명이다. 주역은 그들의 운명에 대해 어떤 설명을 건넬까. 산지박()에서 산뢰이(山雷頤·) 괘로의 변화를 제시한다. 지도자가 순조롭게 물러날 때 산지박 괘는 중지곤() 괘로 변한다. 넓은 평야 같은 순항이 시작된다. 그러나 정권 이양의 와중에 밑단에서 돌발적인 변화가 생기고 만다. 맨 아래의 음 막대가 때 이르게 양의 기운을 취하면서 정국이 반전되고 경색되는 것이다.

산뢰이 괘의 모양을 보라. 중간지대의 음 막대들을 위아래 양의 막대가 짓누르고 있다. 산뢰이의 ‘이(頤)’는 턱을 뜻한다. 위아래 턱을 움직여 무언가를 강하게 씹는 상황이다. 괘의 형상을 직관하면 강력한 위아래 틀로 누군가를 가두는 모양이기도 하다. 괘의 해설 중 ‘십년물용(十年勿用)’이 예사롭지 않다. 10년 동안 쓰지 못한다. 정상적으로 물러난 줄 알았는데 다시 거세당한다. 모처에 갇히고 만다.

왜 매번 이런 일이 벌어질까. 왜 쫓겨나야 하나. 물러나고도 또 왜 고초를 겪어야 하나. 반복처럼, 윤회처럼 사람은 갇히고, 상황은 막힌다. 어디에 잘못이 있을까. 해답은 물론 쫓겨나기 전, 물러나기 전 지도자의 처세(處世)에 있다.

‘강호동양학’ 정도라 불러주면 섭섭하지 않겠다. 이제는 변두리로 물러났지만,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처세의 비급 역할을 겸하던 사주 명리는 공직(公職)에 임하는 자세를 ‘절제’ 한 단어로 요약한다. 사주 체계에서 ‘관(官)’이라는 용어로 줄여 부르는 미덕이다. 명리를 논하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사주에서 통제와 절제를 뜻하는 ‘관’의 요소가 강하게 포착될 때, 공직 또는 관료의 운명을 읽는다. 반대로 공직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관’의 요소, 즉 절제의 미덕을 체득하라고 조언한다.

주역도 유사한 덕목을 제시한다. 연못에 담긴 물의 높이로 정치적 상황과 지도자의 자질을 논한다. 예컨대 가뭄이 들어 연못(澤) 바닥에만 물(水)이 남은 상황이라면 지도자는 곤란할 수밖에 없다. 지독한 곤경을 뜻하는 택수곤(澤水困)의 상황이다. 반대로 적당히 차오른 물(水)이 연못(澤) 위로 찰랑찰랑하다면 어떨까. 절제를 뜻하는 수택절(水澤節)의 괘는 바람직한 리더십이 보기 좋게 펼쳐지고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사주도 주역도 지도자의 처세로 절제를 강조한다.

지난 5년, 중독이었나 절제였나?

‘제왕적 대통령제’는 우리 정치권의 오랜 화두다.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상태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제왕적 권력은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지 않고 포식한다. 권력과 권력의 주변이 한데 섞여들어 아수라장을 만든다. 집중된 권력을 향해 몰려드는 구애와 유혹 앞에서 권력은 큰 산처럼 멈춰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권력은 술보다 취하기 쉽고, 중독의 정도와 파급도 강력하다. 절대 권력의 절대 부패는 돌이켜지지 않는 알코올중독과 같은 것이다. 중독은 절제의 정반대편에 선다.

무왕불복이란 말을 다시 떠올려보자. 전직 대통령들을 괴롭혔던 그 극악한 일들이 또 들이닥칠까. 문 대통령과 측근들의 불안에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해답은 중독과 절제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의 지난 4년7개월은 중독의 세월이었을까, 절제의 세월이었을까.

현직 대통령에 대한 결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절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독의 징후 또한 명백했다. 월성원전 폐쇄 과정에서의 무리수가 그랬고, ‘통치행위’란 단어로 반대 진영과 언론을 겁박하던 사후 대응이 그랬다. 조국 사태 등에서 일관되게 보여준 당파적(사실은 당파적 고려밖엔 남지 않았던) 집착이 그랬다. 그 과정에서 불한당 취급당한 사정기관 수장들의 전향과 관련해서라면, 누군가를 비난할 게 아니라 비난받아야 한다. 이론적 근거 박약한 소득주도성장에, 시민을 신민(臣民) 취급한 K방역을 보태 자영업자들을 녹다운시킨 데 대한 무반성도 ‘중독’이 아니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현명한 제약’만이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

언젠가 한 법학자의 인터뷰를 보다가 “현명한 제약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이 강렬해 메모해 두었다. 법과 법치의 본질이 담긴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대통령들은 안타깝게도 ‘현명한 제약’과 거리가 멀었다. 쫓겨나야 했고(택천쾌), 쫓겨나는 대신 물러나고도(산지박) 자유를 잃어야 했다(산뢰이).

오는 5월로 문재인 정부의 5년 집권이 끝난다. 청와대 사람들은 화낼지 모르지만, 문 대통령 홀로 한국 현대사의 오랜 굴레로부터 독야청청 자유로울 것이라 확신할 근거는 아쉽게도 없다. 사적(私的)인 악담이 아니라 사적(史的)인 추론이니 분노하지 않았으면 한다. 예나 지금이나 뻔한 권력구조 속의 대통령일 뿐이다. 방심하는 순간, 누구도 중독을 피할 수 없는 자리다.

남은 5개월은 그나마 짧지 않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으로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의 5년이 부디 중독 아닌 절제의 세월로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다. 우리도 이제는, 정상적으로 연금 받으며 퇴임 후를 지내는 대통령을 봐야지 않겠나. 어찌됐든, 불안과 공포는 대개 자신의 과오에서 비롯한다는 사실만은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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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형 주역연구가·‘강호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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