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메르신 인근의 토크마르성.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이 고성은 십자군전쟁 당시 구호기사단이 사용했다.
터키 메르신 인근의 토크마르성. 지중해를 내려다보는 이 고성은 십자군전쟁 당시 구호기사단이 사용했다.

최고(最古)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른바 세계 제1의 노포(老舗) 기업은 어디일까? 일본 오사카(大阪)에 있는 건설회사 곤고구미(金剛組)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서기 578년 설립 이래 지금까지 무려 1443년 동안 이어온 인류 문명·문화사의 금자탑 같은 기업이다. 100여명의 최고 장인을 보유한, 사찰 건립과 문화재 보수에 특화된 기업이다. 곤고구미의 뿌리는 6세기 백제에 있다. 당시 쇼토쿠태자(聖徳太子)가 사찰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면서 백제에 장인 파견을 요청한다. 3명의 목공 장인이 일본에 도착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금강(金剛), 즉 일본어로 곤고다.

한국인 대부분은 세계 최고 노포 기업의 원류가 한반도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듯하다. 정반대 의견은 어떨까? 남의 나라에 가서도 1443년 이어온 기업이 있는데, 한국에는 100년 이상 된 노포가 손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한반도 고대 역사가 이웃 나라에는 지금까지도 유지, 재현되고 있다는 사실은 또 어떨까? 부수고 무너뜨리는 세계관으로 보면 노포에 관심을 둘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전 세계 어디에 가도 ‘노포=품격과 역사와 전통’으로 풀이된다.

일본은 전 세계 1위에서 7위까지의 최고 노포들을 가진 나라다. 200년 역사를 가진 노포 기업 5586개 가운데 60% 정도인 3146개가 일본산이다. 곤고구미는 그 같은 일본식 노포 문화의 상징이자 대표주자다. 6세기 한반도의 건축기술이 일본을 압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사 논쟁으로 날밤을 새는 나라가 한국이다. 상식이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다. 어제를 이어온 오늘, 그리고 한층 더 발전될 내일이 보통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다. “내가 왕년에 말이야, 1980년대에는 말이지…”라는 어제의 기억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꼰대’라 부른다.

휴머니즘 실천에 앞장섰던 가톨릭 노포

‘가톨릭 노포’는 11세기 십자군의 하이라이트인 구호기사단(Knights Hospitaller)을 살펴보다 떠올린 키워드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1099년 이후 ‘교황 호위무사’로 떠오른 조직이 바로 구호기사단이다. 십자군 대부분은 국왕이나 귀족들에게 예속된 군대였다. 급료, 음식, 군장 등 모든 것이 국왕이나 귀족들로부터 제공됐다. 기사단은 다르다. 세속적 차원이 아닌, 신성(神聖) 교황이 임명하고 통솔하는 ‘신의 군대’다. 교황이 내린 십자가 문양과 함께 가톨릭의 정통성이 부여됐다. 교황의 인정을 바탕으로 가톨릭 신자로부터의 헌금이나 인적 봉사가 이어진다. 따라서 교황의 명령만 받을 뿐, 유럽의 국왕이나 귀족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립조직이다. 구호기사단은 1118년 창설된 템플기사단(Ordre des Templiers)과 더불어 교황 직속의 양대 호위무사였다.

‘구호기사단=가톨릭 노포’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1113년 교황의 군대로 인정받은 이래 21세기까지 지속된 그 장구한 역사에 있다. 템플기사단은 프랑스 국왕 필립 4세의 명령으로 1312년 한순간에 사라진다. 템플기사단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기사단 자체를 아예 해체한 것이다. 반면 구호기사단은 창설 이래 무려 909년이 지난 2022년에도 활동하고 있다.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베네딕토회는 가톨릭을 지탱하고 확장해가는 대표적인 교황 친위 조직들이다. 대부분 13세기 이후 나타났다. 이들보다 100여년 이른 12세기 초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구호기사단의 아류라 볼 수 있다. 십자군전쟁과 함께 등장한 구호기사단이야말로 가톨릭을 수호해온 최고의 노포라 볼 수 있다.

구호기사단은 이름 그대로 다치거나 배고픈 사람들을 돕는, 십자군 구호 단체를 의미한다. 전장에 나가 싸우기도 하지만, 주된 업무는 의료와 자선 사업에 있다. 십자군전쟁은 1905년 교황 우르반 2세의 명령으로 시작돼 1291년 이스라엘 서부 해안 아크레(Acre)성이 이슬람에 함락되면서 종결된다. 전부 8회에 걸친 유럽 초유의 연합작전을 통한 성지(聖地) 탈환의 역사다.

결과는 실패다.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은 제1차 십자군전쟁 때인 1099년 단 한 번에 그쳤다. 시칠리아를 기반으로 한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드리히 2세(Frederick Ⅱ)가 예루살렘에 무혈입성한 적도 있지만, 불과 16년 만에 다시 이슬람에 넘어간다. 200년 정도 이어진 십자군전쟁의 절반은 성지 예루살렘 탈환과 무관했다.

교황 직속의 ‘천사의 군대’

십자군전쟁은 유럽은 물론,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심지어 이집트 출신 이슬람 영웅들의 탄생 무대이기도 했다. 성전에 관련된 수많은 무용담이 등장했다. 거의 1000년 전 역사지만, 당시 탄생된 전설적 인물들의 신화가 지금까지도 지중해와 이스라엘 곳곳에 남아 있다. 구호기사단 역시 십자군전쟁 당시 등장한 수많은 서방 영웅들 가운데 하나다. 개인이 아닌, 조직 차원의 영웅으로 당대 유럽인 대부분이 꿈꾸는 ‘천사의 군대’로도 통했다.

당대에 태어난 기독교 신자라면, 구호기사단 참가를 열망했을 것이다. 칼에 의존한 피의 성전이 아닌, 의료와 자선을 우선시한 ‘휴머니즘 실천’이 구호기사단의 주된 업무였기 때문이다. 전쟁 도중 다친 군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가톨릭 신자들도 의료와 자선의 대상이었다.

십자군전쟁은 군인만이 아니라 보통의 유럽인들이 체험한 역사이기도 했다. 전쟁터라고 하지만, 십자군이 점령한 성지에 들러 신의 축복을 체감하려는 유럽인들로 전장이 터져나갔다. 현대인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성지에 들르는 것 하나만으로도 생전의 죄가 사라지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예루살렘 성지순례가 12세기 이래 지속됐다. 하지만 여행 도중 사망자와 부상자, 기아자가 속출했다. 구호기사단은 성지 순례자들이 기댄 유일한 보호처였다. 부상은 물론, 식량도 해결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예루살렘 현지에만 통상 1000여명을 치료할 수 있는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간호사로 구성된 구호단원도 있었다. 전문 지식과 경험을 가진 의료진들이 상시 대기했다고 한다. 환자 수송용 마차를 운용하면서 현지 수술을 행하는 응급체제도 갖추고 있었다.

구호기사단과 함께 교황 직속 호위무사로 활약한 템플기사단의 전투복과 무기들.(왼쪽) 오른쪽은 구호기사단의 문양과 검은 망토 차림의 구호기사단을 형상화한 조각.
구호기사단과 함께 교황 직속 호위무사로 활약한 템플기사단의 전투복과 무기들.(왼쪽) 오른쪽은 구호기사단의 문양과 검은 망토 차림의 구호기사단을 형상화한 조각.

카바라조가 남긴 구호기사단 총독 초상화

루브르박물관은 필자를 구호기사단으로 연결해준 추억 속의 공간이다. 이미 20여년 전이지만, 루브르에 들렀을 때 카라바조(Caravaggio)가 그린 몰타 총독(Alof de Wignacourt) 초상화와 접한 적이 있었다. 정확히 1607년 제작된 유화로 카라바조가 망명생활 도중에 그린 그림이다. 1606년 35살의 카라바조는 사소한 말싸움 끝에 살인을 저지른다.

이후 로마에서 탈출해 몰타로 도망간다. 당시 몰타는 이슬람에 맞선 가톨릭 최전선이었다. 한국의 휴전선 최전방이라 보면 된다. 구호기사단은 16세기 이래 몰타에 정착한 뒤 이슬람에 맞서 싸운, 당대 가톨릭 최전선 결사대였다. 카라바조가 그린 초상화의 총독은 바로 구호기사단의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로마에서 얻은 화가 카라바조의 명성은 가톨릭 수호 최전선 몰타에까지 알려졌을 듯싶다. 몰타 총독도 즐거운 마음으로 초상화를 맡겼을 것이다. 추정컨대 카라바조는 로마 교황의 호위무사 격인 몰타 총독에게 자신의 사면을 부탁했을 듯하다.

그러나 ‘살인자 화가’ 카라바조의 본성은 몰타에서도 숨길 수 없었다. 현지 구호기사단과 말싸움을 벌이다가 끝내 칼을 휘두른다.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운 좋게 탈출해 다시 이탈리아로 도망간다. 교황의 사면을 애타게 기다리다가 병으로 사망한 것은 몰타 탈출 2년 뒤인 1610년 38살 때다.

가톨릭 노포로서의 구호기사단에 대한 관심은 ‘루브르-카라바조-몰타’로 이어진 어제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됐다. 13세기 말 십자군전쟁이 끝난 뒤 구호기사단은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지중해의 로데(Rhodes)와 시칠리아, 16세기 몰타를 거쳐 19세기 이후 유럽 전역으로 흩어진다. 지금도 이탈리아, 영국, 스웨덴, 네덜란드에 구호기사단들이 거주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구호기사단의 주권이다. 단순히 가톨릭 외곽단체만이 아니라, 국가에 준하는 주권을 가진 외교 주체자로 활동하고 있다. 국제법에 의해 보호·인정된, 로마를 수도로 하는 구호기사단 SMOM(Sovereign Military Order of Malta)이 바로 주인공이다. 전 세계 110개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주권 조직으로, 자체 통화와 우표, 나아가 여권까지 발행하고 있다. 영토는 없지만, SMOM을 구성하는 시민 3명과 자원봉사자 10만여명을 거느린 합법적인 주권체다. 국가라 부를 만한 주권체는 아니지만, 영토나 국민 없이도 유지되는 유엔에서 보듯, 국제사회에서의 주권체로 당당히 나서고 있다. 한국과는 관계가 없지만, 구호기사단 지부는 한국에도 있다. 2016년 한국지부 창설 이래 배우 안성기씨를 비롯한 14명이 주도하고 있다고 한다.

토크마르성에 새겨진 흔적들

터키 메르신에 있는 토크마르성(Tokmar Castle)은 지중해에 흩어진 수많은 아르메니아의 흔적을 찾던 중 발견한 곳이다. 지중해를 눈앞에 둔, 해발 350m 산에 세워진 고성(古城)이다.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는 축성(築城)의 달인이다. 십자군전쟁 당시 가톨릭 연합군을 위해 수십여 개의 성을 신축·개축·보수해 제공했다. 물론 공짜가 아니었다. 성을 통한 경제 특수가 십자군전쟁 기간 중 아르메니아에 불어닥쳤다. 멀리 가면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한 히타이트 시대로 이어지지만, 13세기 한때 구호기사단이 머물렀던 성이 바로 토크마르이다. 십자군의 정열이 식은 15세기, 오스만튀르크에 함락되면서 폐허의 땅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성의 흔적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아직 남아 있다. 지중해 해안가 도로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른 성과 달리 구글 지도 없이 육안으로도 찾아갈 수 있다. 들어가는 길 전체가 울창한 소나무로 채워져 있다. 자동차로 올라가는 길의 경사가 거의 30도 정도로 급하다. 위로 올라가자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지중해를 배경으로 들어선 토크마르는 전형적인 비잔틴 형식으로 축조된 성이다. 대리석이나 큰 바위가 아니라, 작은 돌들을 벽돌처럼 연결해서 축성하는 기법이다. 21세기 시멘트보다 강력한 로마 콘크리트를 통해 높이 쌓아가는 식이다. 이렇게 쌓은 건물들은 보통 무너질 때 벽돌이 하나씩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높이 세워진 벽 전체가 한꺼번에 붕괴된다. 콘크리트 접착력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거의 무너진 상태지만, 성의 서쪽에는 지금도 십자군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작은 석관(石棺)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성 안의 넓은 공간을 채웠을 의료용 침대와 구호시설을 상상해봤다. 가톨릭에서는 부정하겠지만, 십자군전쟁 당시 유럽의 의술은 거의 원시 수준에 머물렀다.

당시 이슬람 기록에 보면 십자군들이 부상을 당하면 무조건 신체를 잘라낸 뒤 불로 지졌다고 한다. 이후 신에게 기도하면서 치료도 안 하고 방치해 둔 것이 유럽 의료행위의 전부였다. 병세가 악화되면 악마 때문이라 말하면서 곧바로 죽은 사람 취급했다고 한다. 당시 이슬람이 이미 상용화한 외과용 수술 도구 자체가 십자군에는 없었다. 인간이 아닌 신의 자비가 12세기 유럽 의술의 기본이었다. 이슬람 의료 지식과 수술 도구는 십자군전쟁 기간 중 유럽이 얻은 최대의 전리품 중 하나다.

십자군 당시 감시대로 활용한 듯한 공간이 보였다. 안에 들어가자 지중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항상 느끼지만, 지중해의 바람은 따뜻하고도 부드럽다. 지중해에 필적할 만한 훈훈하고도 달콤한 바람이 과연 전 세계 어떤 바다에 존재할지 의문이다. 토크마르는 유럽과 예루살렘을 잇는 보급로인 동시에 성전에 나서려는 유럽 젊은이들의 중간 기착지 역할도 했다. 성지 순례에 나선 가톨릭 신자들이 부상이나 허기로 고생할 때 도와준 오아시스 역할도 했을 것이다.

토크마르에서 보면, 지중해 너머 남동쪽이 성지 예루살렘이다. 십자군전쟁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왕과 귀족들은 ‘예루살렘=스펙 쌓기 현장’으로 생각했다. 전쟁에 참가하지만, 대부분은 곧바로 자신의 군대와 함께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예수와 관련됐다는 ‘성스러운’ 유물 수집은 필수였다.

현장에 남아 매일 이슬람 전사들과 대면한 것은 템플기사단, 구호기사단 같은 교황 직속 호위무사들이었다. 스펙 차원이 아닌, 종교적·신앙적 사명감에서 시종일관 참전, 봉사했다. 무보수로 헌신하려는 유럽 곳곳의 젊은이들이 기사단을 지속시킨 원동력이다. 이슬람에 맞서다 전사하는 것이 기사단의 행복이자 염원이었다.

예수의 행적에 나타난 공통분모 중 하나지만, 굶주리고 병든 자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 예수가 보여준 기적의 대부분은 음식이나 병에 관련된 것들이다. 남을 제압하고 신의 아들이 가진 힘을 증명하려는 기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칼을 통해 이슬람을 제압했던 템플기사단은 동성애 집단으로 매도된 채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빵과 간호에 주목했던 구호기사단은 21세기 지금까지도 건재하다. 템플기사단이 보면 억울하고도 원통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행적을 본다면 왜 ‘구호기사단=가톨릭 노포’인지 이해할 듯하다. 칼이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결코’ 노포가 될 수는 없다.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사찰 건립·보수 전문회사 곤고구미가 세계 최고 노포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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