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봄볕이 좋습니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걷혀 하늘도 푸릅니다. 투명하게 쏟아져내리는 봄볕이 나른함을 부르는 날입니다.

봄은 나른해야 제맛입니다. 유년 시절 기억을 더듬어봐도 항상 봄은 나른했습니다. 교실 창으로 쏟아지는 봄볕에 취해 수업시간 꾸벅꾸벅 졸던 기억은 다반사입니다. 집 마루에 걸터앉아 봄 햇살에 반짝이는 화단의 꽃을 바라보다가 까무룩 잠든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봄은 나른하지 않습니다. 시인 나태주는 ‘오지 않는 봄’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봄은 오지 않는다/ 봄은 먼 나라에서 귀양살이하는 몸이시다/ 우리가 아는 봄은 봄의 껍데기, 봄의 소문일 뿐이다’.

아마도 시인은 찰나처럼 지나가는 봄을 아쉬워하면서 ‘봄은 오지 않는다’고 썼을 겁니다. 시인이 ‘봄은 내년에도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봄이기에 봄은 봄답다’고 썼으니까요.

시인은 소문처럼 다가오는 봄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다려보라고/ 기다리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곧 풀려나 노래하고 춤추며 당도하리라고/ 봄은 끊임없이 소리와 향기와 숨결만을/ 보내온다’.

소문만 듣고, 소리와 향기와 숨결만을 느끼다가 ‘진짜 봄이 왔나?’ 하고 묻는 순간 벌써 여름이라는 것이 시인의 안타까움일 듯합니다. 그래도 시인은 스쳐지나가는 봄을 느끼나 봅니다. 시인의 예민한 촉수는 찰나 같은 시간도 낚아챕니다. 하지만 저 같은 범인들에게는 언제부턴가 봄이 봄 같지 않습니다. 우리의 봄에서 나른함이 실종됐습니다.

봄의 길목인 3월은 어느 순간 ‘잔인한 4월’ ‘위기의 6월’을 잉태하는 시간이 돼버렸습니다. 봄볕 가득한 광장에 긴장과 함성이 넘쳐나고 사람들의 눈에 다시 핏발이 섭니다. 영국 시인 엘리엇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얘기했는데, 사실 봄은 생명과 함께 죽음도 다시 깨어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잔인하다는 뜻일 겁니다. 영국 시인에게 봄은 ‘추억과 욕정이 뒤섞인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는’ 시간입니다. 차라리 모든 것이 잠든 겨울이 시인에게는 더 편할지 모릅니다.

누가 저한테서 봄을 앗아갔을까요. 대학 시절 개학만 하면 3월의 광장은 최루탄 가스로 뒤덮이곤 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면 그래도 개나리가 지천에 만개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캐하고 희뿌연 공기 속에서 봄을 숨 쉬기 힘들었습니다. 나른함은 온데간데없고 누군가를 향한 증오만이 광장에 감돌았습니다.

지금은 미세먼지가 최루탄 대신 봄을 가려버렸습니다. 미세먼지 가득한 봄 광장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모여 뭔가를 요구합니다. 기자의 눈에 봄은 나른함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과 경계의 계절입니다. 천안함 용사 46명의 목숨을 앗아간 잔인한 시간도 3월이었습니다. 겨울이 물러나면서 휴전선 너머로부터 평화가 아니라 차가운 긴장감이 엄습하는 봄도 숱하게 겪었습니다.

올해 봄도 편하지는 않습니다. 미세먼지만이 아닙니다. 겨울의 추위를 견딘 사람들이 여전히 실업의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웅크렸던 살림살이가 봄기운을 타고 나아질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지난 봄 판문점에서 활짝 편 것 같던 평화의 꽃망울은 아지랑이 속의 신기루로 끝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저에게 다시 나른한 봄이 찾아올까요.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키워드

#마감을 하며
정장열 편집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