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검찰청사 앞에서 연거푸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이나 정치세력에 항의하는 시위는 흔한 일이다. 그러나 특정 사법기관이 대규모 시위대의 표적이 되기는 처음이다. 이처럼 사법기관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의 가장 전형적인 양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단지 ‘또 하나의’ 집회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포퓰리즘을 일상어처럼 남발하면서도 정작 그 정치적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다. 실제로 우리는 포퓰리즘을 기껏해야 선심성 정책쯤으로 알고 있다. 이로 인해 포퓰리즘이 현실 속에 어떻게 스며들고, 민주주의를 어떻게 위협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포퓰리즘을 경고하는 주장은 많아도 이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의외로 적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포퓰리즘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간단명료한 연구서가 등장했다. 바로 카스 무데와 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의 ‘포퓰리즘’(Populism·2017)이다. 이 책은 포퓰리즘의 정의·역사·사례·민주주의와의 관계 등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포퓰리즘은 세계 어디에서나 좌우를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내리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포퓰리즘이든 ‘순수한 민중(people)’과 ‘부패한 엘리트’를 대비시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즉 모든 포퓰리즘은 한결같이 보통사람(ordinary people)들을 옹호하고 기득권층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포퓰리즘이란 “사회가 궁극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동질적인 두 진영으로, 즉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엘리트’로 나뉜다고 여기고, 정치란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심이 얇은 이데올로기다.” 특히 여기서 ‘중심이 얇다’는 것은 포퓰리즘이 현실영합적일 뿐, 결코 심도 깊은 체계적인 주장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것은 일반적으로 민족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다른 체계적 이데올로기에 기생하게 마련이다.

이처럼 포퓰리즘은 민중의 순수한 의지가 부패한 엘리트에 의해 저지당한다고 보고 민중의 직접적 참여를 독려한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저항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집권의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특히 집권 중인 포퓰리스트는 기존 엘리트 집단이나 경제권력을 상대로 여전히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민중의 분노를 촉발시켜 권력을 강화하려고 한다.

포퓰리즘은 19세기 후반에 러시아와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민중 속으로(브나로드)’ 운동이 대표적이다. 미국에서도 중서부의 ‘순수한’ 농민을 북동부의 ‘부패한’ 엘리트와 대비시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 이후로도 인종주의, 매카시즘, ‘티파티’ 운동 등 다양한 포퓰리즘이 명멸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최근에 이민 문제를 둘러싸고 극우적 포퓰리즘이 유행하고 있다.

이런 지역들에서 포퓰리즘은 지배적 지위를 점하지 못했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지난 세기 초반 대공황 때부터 줄기차게 포퓰리즘이 성행했다. 정치적 부패가 극심하고 민중은 착취당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포퓰리즘이 세를 얻었다. 하지만 그것은 민중의 지위향상보다는 오히려 생활파탄으로 막을 내리곤 했다.

무엇보다 포퓰리즘은 민중 동원에 기반한다. 흔히 대통령중심제에서는 개인적 리더십에 의한 동원이 성행하고, 의원내각제에서는 포퓰리즘 정당에 의한 동원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지도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지도자 중에는 카리스마적 스트롱맨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여성, 기업인, 또는 종족 지도자들이 나서기도 한다. 흔히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이야말로 정치 기득권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정치 아웃사이더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지못해 정치에 참여한 정치 신인이라는 이미지 전략을 구사한다. 하지만 그 역시 실제로는 핵심적 인사이더이지만, 표면적으로 아웃사이더를 교묘하게 표방할 뿐이다. 이로 인해 민중은 결국 엘리트의 이익에 또다시 이용당하고 만다.

물론 포퓰리즘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정치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정치적 관심을 자극하고 기성정치가 외면했던 쟁점을 물위로 끌어내는 순기능도 있다. 이를 통해 민중의 정치적 참여를 촉발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주장이 바로 직접민주주의론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에 포퓰리즘은 직접민주주의를 표방한다.

사실 민주주의는 복잡한 제도다. 그 특징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핵심은 간단하다. 바로 자유선거와 다수결이다. 선거도 결국 다수결로 승패를 정한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에서는 재판도 다수결로 했다.(소크라테스도 다수결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처럼 다수의 뜻을 내세우는 포퓰리즘의 주장은 일견 민주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포퓰리스트들이 예외 없이 직접민주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이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히 말해 ‘자유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다수결인 데 비해, 자유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예외성을 인정하는 제도다. 대표적인 것이 독립적인 사법기관의 구성이다. 사법적 정의는 결코 다수결의 대상이 아니다. 이처럼 다수결의 원칙을 받아들이되, 다수의 폭정은 불허하겠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대원칙이다.

포퓰리즘이 다수결이나 다수 이익의 장(場)인 입법이나 행정에 영향을 미치기는 비교적 용이하다. 그러나 사법에 대한 공격은 논리적 근거를 갖기 어렵다. 반대로, 사법에 대한 공격이 성공하면 포퓰리즘은 더이상 거칠 것이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법에 대한 직접적 압박은 심각한 현상이다. 이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의 전면화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민주주의의 아킬레스건은 다수의 폭정이다. 그것은 반드시 ‘다수’의 전횡만 가리키지 않는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의 ‘자유론’에서 과도하게 조직화된 ‘소수’의 전횡도 다수의 폭정에 포함시킨다. 이처럼 다수 또는 다수를 가장한 소수의 전횡은 민주주의의 암 덩어리다.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민주주의를 넘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포퓰리즘은 엘리트 정치가 극단화되어 민중의 현실이 외면당하는 곳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포퓰리즘이 왜곡된 정치를 바로잡는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민중은 아웃사이더를 가장한 엘리트들에 의해 이용되고 만다. 결국 포퓰리즘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보다 오히려 사회를 더욱 피폐하게 만든다.

우리는 광화문 집회와 서초동 집회를 바라보며 경쟁적 세 대결에만 흥미를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권력 일반에 대한 항의와 달리, 사법부에 대한 직접적 공격은 성격상 전혀 다른 일이다. 그것은 정의마저 다수결로 좌우하려는 횡포다. 한편 미디어 역시 다수결이 아니라, 정의를 관장하는 기구다. 이대로 가다가는 미디어가 다음번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

‘포퓰리즘’은 우리에게 민주주의 차원에서 포퓰리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를 날카롭게 일깨워준다. 오늘날 정치가 다수의 민중을 소외시키고 점점 엘리트들만의 쟁투로 흐르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문제다. 이에 대한 뼈아픈 성찰과 대응이 향후 민주주의의 최대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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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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