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망우리공원은 성지 순례 코스 같은 곳입니다. 실향민인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모두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상들의 묘를 찾아 산길을 헤맬 때면 구도자의 순례길처럼 엄숙했습니다. 망우리공원은 요즘 평지에 조성된 공원묘지들처럼 잘 정비된 곳이 아닙니다. 산기슭마다 묘지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산세도 비슷비슷해 길을 잘못 들면 묘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길을 잘못 들어 낭패를 봤던 기억도 납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너라도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을 잘 기억해야 한다”고 엄하게 당부했습니다. 산을 타면서 지형을 머리에 담는 일은 어린아이에게는 힘든 일이었습니다. 망우산에 가면 아직도 그때의 의무감 같은 것이 떠오릅니다.

조상의 묘에만 집중했던 제 눈길이 주변까지 더듬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들면서입니다. 우연찮게 신혼집도 망우산 근처에 잡아서 주말이면 운동도 할 겸 종종 망우리공원을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광활한 묘지 일대를 조금씩 탐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취직 후 성묘를 갔다가 할아버지 묘를 보살펴온 분에게 “기자가 됐다”고 인사했더니 묘 건너편 저 멀리를 가리키며 “문필봉(文筆峯)이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분은 제가 글을 쓰는 기자가 된 것도 할아버지 덕분이라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망우산과 마주 보는 불암산이 문필봉으로 불린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망우리공원을 탐구하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그곳이 역사의 무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곳을 살피면 살필수록 곳곳에 잠들어 있는 역사적인 인물들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거기 묻혀 있거나 묻혔다가 이장한 분들의 이름은 일일이 나열하기 쉽지 않을 만큼 많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들만 추려도 독립지사 한용운, 최초 극영화 ‘아리랑’의 나운규, 조선학 선구자 문일평, 시인 박인환, 아동문학 선구자 방정환, 한국민주당 초대 당수 송진우, 근대 최고의 화가 이중섭, 동아일보 초대 주필 장덕수 등 부지기수입니다. 이분들의 묘와 사연을 하나씩 더듬어보는 것은 최고의 역사 순례 코스입니다. 실제 많은 사람이 지금도 망우리공원을 찾아 그런 역사 답사를 합니다. 산등성이를 도는 순환도로에는 ‘역사 문화 사색의 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도 붙어 있습니다.

이번주 커버스토리에 언급된 죽산 조봉암 선생도 망우리공원에 묻힌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선생은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후 망우리에 묻혔습니다. 지금은 말끔히 단장된 묘 입구에 선생의 어록비도 있는데, 거기에 새겨진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라는 글귀가 눈길을 끕니다. 저 역시 이 어록비와 선생의 묘를 가끔 찾아 이 비운의 정치인이 생전에 무엇을 꿈꿨을까 생각해 보곤 했습니다.

이번주 커버스토리가 발굴한 김일성 육성 기록은 조봉암 선생이 우리 헌정 사상 첫 ‘사법 살인’ 피해자라고 여겨온 분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 기록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조봉암 선생에 대한 김일성 육성 기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이 기록에 담긴 ‘조봉암의 진실’이 뭔지는 앞으로 학자들이 풀어야 할 숙제일 듯 싶습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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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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