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돌아가는 세상일을 보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주변 여러 사람이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자책하고 절망하며 산다. 물론 그 반대로 기뻐하고 환호하고 으쓱거리고 자신감에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만사가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이 원하는 쪽으로 진행될 때 행복해한다. 반면에 일이 내 뜻에 거슬리게 진행될 때는 좌절하고 분노하고 상처 입고 불행해하고 고통받는다. 그러나 설령 일이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진행돼 처음 원하던 바를 얻게 되었다 하더라도 행복은 잠깐이다. 또 다른 무엇을 원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은 계속 행복과 만족을 느끼기 위해서 새로운 갈망의 대상을 택하고 이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한다.

이런 인간의 속성은 우리 DNA 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어린아이에게 장난감을 주면 재미있게 갖고 놀다가 곧 싫증을 내며 또 다른 것을 찾는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어서 울음을 터뜨릴 때 우리는 흔히 “네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는 없어”라고 말해준다. “왜 안 되나요?”라고 아이가 되물으면 “나중에 어른이 되면 알게 돼”라고 답한다.

그러나 어른이 된 우리는 어떠한가. 내가 원하는 것(어린이의 경우 장난감)을 얻지 못하더라도 어린아이같이 행동하지 않고 의젓하고 성숙하게 행동하는가. 많은 경우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세상사가 자신의 방식대로만 진행되기를 바라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원하며 산다. 원하는 방식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아이와 똑같이 혼란스러워한다.

우리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웃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의 유치함에 미소 짓거나 화를 내지만 사실 우리와 아이들과의 차이점은 우리가 자신의 ‘유치한’ 감정을 아이들보다 더 잘 감추는 방법에 익숙하다는 것에 불과하다.

세상만사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정서적·정신적 통증이 찾아온다. 무엇을 해서, 아니면 하지 않아서 자신을 비난하거나, 자신이 무가치하다거나 자기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때 우리는 자기 비난의 고통을 겪는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다면 자기 비난과 후회가 결합된 죄책감을 맛보게 된다. 반대로 내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특정 인물, 상황, 사회, 환경에 분노, 증오, 적개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이 모든 감정에는 아픔이 들어 있다. 그 통증이 순간적으로 격렬하게 찾아올 때 이런 생각과 감정이 따라붙는다.

“이런 세상에…” “말도 안 돼” “미치겠네” “날 죽이려고 하네” “왜 세상은 항상 이 모양이지” “저런 인간은 지옥에나 떨어져야 해” “왜 저런 인간은 잘되고 나는 이 모양이지” “내 또 그럴 줄 알았어” “난 불가능이야” “난 안돼” “이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이 진저리 나는 고통, 영원히 나를 괴롭힐 거야”….

이때 우리는 대체로 다음 두 가지 방식으로 대처한다. 첫째는 이런 정서적 통증을 비밀스럽고 무거운 짐처럼 가슴 깊숙이 안고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못 본 척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선 해결책이 되지 않고 더욱 복잡하게 얽힐 뿐이다.

사실 통증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주려는 전령(傳令)이다. 신체적 통증을 보라. 통증을 느낄 수 없다면 뜨거운 난로에 손을 대 큰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맹장이 터져도 내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를 것이다. 급성통증일수록 중요한 어떤 일이 내 신체에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즉각적인 주의와 대처를 취할 것을 알려준다.

신체적 통증과 마찬가지로 정서적 통증 또한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하는 전령이다. 감정은 적어도 자신으로부터는 인정받아야 한다. 자연스레 느껴져야 하고 만나야 한다. 다른 방법은 없다. 우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거나 억누른다면 결국에는 곪아 터져서 해결책과 평온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반대로 정서적 통증이 순간적으로 증폭 과장돼 ‘벌컥’ 반응을 보이고 비분강개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폭발적 감정에 휩싸이고 조종을 당해 더 큰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런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며 우리를 더욱 구속하고 일생에 걸쳐 반복되는 반응 패턴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더구나 상대방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는 행동이 수반됐다면 사태는 더욱 복잡해진다.

살다 보면 겪을 수밖에 없는 여러 고통을 최소화하고 잘 극복하려면 우리가 통증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에 대한 대응이 지혜로워야 한다.

아프다고 펄펄 뛰는 식의 반응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양 숨기는 식의 반응도 아니다. ‘제3의 방식’, 오히려 통증을 ‘손님’으로 바라보면서 복합적으로 밀려오는 슬픔, 분노, 죄책감, 상처, 무서움, 혼란을 단순히 알아차릴 수 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치유의 씨앗이 생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이 얘기가 여러분에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 부언하자면 삶의 고통(자신의 감정)을 피하거나 은폐하지 말고 담담히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말한다. 통증이 당신이 아니듯 여러 생각과 감정도 당신이 아니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마음의 치유력은 놀라워 아픈 감정을 그냥 바라보고 받아들이기만 해도, 강도는 떨어지고 차츰 시간이 지나 평온이 찾아온다. 그때 우리는 깨달음이나 해결책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음’이 바로 그 해결책일 수 있다.

※ 이 글은 존 카밧진의 저서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치유’를 참고하여 만들었습니다.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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