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에 10년 넘게 살아본 덕분에 요즘 아파트 건설 계획으로 시끄러운 태릉 일대는 제게 무척 친숙한 곳입니다. 주말이면 불암산을 타다가 삼육대 쪽으로 하산해 태릉으로 이어지는 가로수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씩 입장료를 내고 태릉에 들어가면 무성한 숲이 몸속 열기를 식혀 주었습니다. 이번 호에 이동훈 기자가 쓴 대로 태릉을 처음 가본 사람들은 서울에 이렇게 좋은 소나무 숲이 있나 감탄하기 일쑤입니다. 오죽하면 신림(神林)이라는 별칭까지 얻었겠습니까. 태릉 소나무 숲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일품입니다.

태릉과 맞은편 육군사관학교 사이를 가로지르는 6차선 도로 역시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힐 만합니다. 이 화랑로 양옆으로는 우람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가을이면 길가에 낙엽들이 수북이 쌓입니다. 육사 쪽 가로수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폐경춘선 옛 역사가 보존돼 있고 철로를 이용해 만든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경기도 경계선까지 길게 이어져 있습니다. 도로변 가로수길과 경춘선 산책로 사이의 숲속에는 목공 공방들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나무 다듬기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 평화롭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 아름다운 숲길들을 이리저리 누비다가 육사와 인근 서울여대에서 쏟아져 나온 젊은이들의 웃음소리와 마주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이번 호에서 지적했지만 이곳의 태릉과 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합니다. 서울의 다른 조선왕릉들과 함께 어려운 절차를 뚫고 지정됐고, 문화유산의 ‘완전성’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인근의 태릉선수촌 등 시설들을 지방으로 다 내려보냈습니다. 거기에 쓴 돈만 5000억원이 넘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태릉은 서울 시내 조선왕릉 8기 중 보존 상태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렇게 가꾸고 키워온 태릉 일대 유무형 가치들과 자연미는 지난 8월 4일 정부의 부동산 대책대로라면 훼손되고 사라질 위기를 맞습니다. 이곳에 1만가구의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면 이 일대는 그냥 평범한 아파트촌으로 바뀔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유네스코는 자신들이 지정한 문화유산의 완전성이 도시개발로 훼손될 가능성을 진즉부터 경고해 왔습니다. 숲이 사라지고, 문화유산이 훼손될 만큼 이 일대 아파트 건설이 긴급한 것인지 의문을 갖는 주민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여당 소속 구청장과 의원들조차 저밀도 개발을 해서 공원은 남겨 달라고 호소하는 것도 이 일대의 자연을 조금이나마 살려 보려는 의도일 겁니다. 노원구 주민들은 태릉을 살리자며 거리로 뛰어나올 태세입니다. 이곳만이 아닙니다. 지난 정부 대책이 들쑤셔놓은 곳들이 서울에 하나둘이 아닙니다. 여당 소속 과천시장은 천막 농성 중이고, 친문이라는 마포구 여당 의원도 임대아파트 건설 절대 반대를 외칩니다. 서울 아파트 공급을 어디에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이냐는 논의는 둘째치고 가장 먼저 의문이 드는 것은 이 정부의 일하는 방식입니다. 원전 재가동 여부를 둘러싸고 난데없이 숙의민주주의라는 걸 들고나왔던 사람들이 수천 가구에서 1만가구의 아파트를 짓는 정책은 몇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후딱 만들어내 그냥 밀어붙입니다. 원전만큼이나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설 계획을 만들면서 숙의는커녕 논의나 상의, 심지어 통보조차도 없습니다. 주민들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합니다. 열혈 지지자들에 이끌려 이 정권이 민주주의의 궤도에서 크게 이탈하고 있다는 경고음이 자꾸 나오고 있습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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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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