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약속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 TV를 켜니 노인들이 울먹이고 있습니다. 홍수가 할퀴고 간 전남 구례 마을의 할머니가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데 말이 울음 속으로 잦아듭니다. 억센 사투리로 나름 씩씩하게 시작한 말이 결국 꺽꺽 하는 울음으로 끝나 버립니다. 뉴스 화면에는 진흙에 범벅이 된 가재도구가 마당 한가득 쌓여 있고, 움막 같은 텐트를 가리키며 집이라고 합니다. 모기에 뜯겨 한숨도 못 잤다면서 태풍까지 온다고 두려운 표정을 짓습니다. 다시 번진 코로나19는 이재민들을 학교 강당 임시숙소에서 몰아내고 도와주러 오던 자원봉사자 수도 10분의 1로 줄였다고 하소연합니다.

이 노인들처럼 엎친 데 덮친 것 같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듯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코로나19 신규 환자가 반년 만에 최다인 441명이라는 뉴스가 떴습니다. 봄에 시작한 코로나19 사태가 사람들을 올해 내내 수렁으로 끌고 들어갈 태세입니다. 경제의 V 자 반등은 이미 물 건너가는 분위기입니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전환되고 침체의 골이 계곡처럼 깊어지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에 잠길지 아직은 잘 실감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TV 화면 속 할머니의 울음을 보고서야 어렴풋이 알아챘듯이 숫자가 주는 공포는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아마 한국인에게 2020년은 뇌리에 깊숙하게 각인될 듯합니다. IMF가 터진 1997년에 이어 가장 잊지 못할 한 해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기억이 즐거운 기억보다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입증된 얘기입니다. 미국 컬럼비아대 르네 헨 신경과학 교수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의 뇌는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우선적으로 기억한다고 합니다. 위기나 두려움을 매우 중요한 정보로 여기고 장기 저장해서 과거의 위기를 반복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한다는 것입니다. 실험용 쥐를 과거 겪었던 것과 비슷한 무서운 환경 속에 다시 집어넣으면 뇌 속 해마가 ‘기억의 동조화’ 현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 많은 사람의 뇌 속에는 IMF 기억으로의 동조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을지 모릅니다.

끔찍했던 IMF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래도 따뜻했던 장면들이 있습니다. 금 모으기의 기억이 대표적입니다. 그 장면을 떠올리면 아직도 온기가 느껴집니다. 대대적인 방송 캠페인 덕분이긴 했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어려움 속에서도 나라를 살리겠다며 금붙이를 꺼내들었습니다. 저 역시 그때 아이들의 돌반지 등등 얼마 되지 않는 금붙이를 내놓았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낸 리더십이 그립습니다. 모두를 끌어안고 함께 가는 리더십이 있었기에 큰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과장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지금 코로나19 시련을 헤쳐나가고 있는 리더십에서는 푸근함과 온기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찬바람만 쌩쌩 도는 느낌입니다. 바이러스를 퍼뜨린 집단을 찾아내 엄벌한다면서 눈을 부라리기 일쑤입니다. 모두가 겪고 있는 어려움과 시련의 책임을 일부에게 떠넘기기 급급합니다. 모두가 모두를 위해야 어려움을 이길 텐데 서로가 서로에게 삿대질만 하고 있습니다. 이유와 곡절이 있겠지만 코로나19와 싸우는 의사들도 난데없이 엄벌 대상이 돼버렸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 훗날 떠올릴 만한 따뜻한 리더십을 만날 수 있을까요.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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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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