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려하던 대로 ‘백신 디바이드’가 현실로 들이닥치고 있습니다. 일부 국가들은 코로나19 백신이 남아돌고 있는데 우리는 뒤늦게 백신 확보가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대통령이 러시아 백신 도입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린 날, 백신 접종률이 가장 높은 이스라엘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000만회분 처리가 고민이라는 뉴스가 뜹니다. 우량 백신을 서둘러서 다량으로 비축해둔 국가의 즐거운 비명이 부럽습니다.

얼마 전 우리가 미국을 향해 ‘백신 스와프’를 제안했지만, “국내 백신 접종에 집중하겠다”는 미국의 답은 명확한 노(No)였습니다. 그런 미국이 넘쳐나는 화이자·모더나 백신 지원을 미끼로 전 세계를 줄 세우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옵니다. 백신이 실제 외교 무기가 되는 냉혹한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국민에게는 각자도생 DNA가 새겨져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 혹독한 고생을 한 경험 때문인지 위기를 만나면 국가를 믿지 않고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선다는 겁니다. 여기에는 위기는 늘 위정자들이 만들었고, 위기를 극복하는 건 늘 백성들의 몫이었다는 나랏님에 대한 오랜 불신도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백신 대란을 겪으면서 이 각자도생 DNA가 다시 꿈틀거릴 지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미국 알래스카주 여행 상품을 찾는 전화가 폭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든 생각입니다. 알래스카주가 외국 여행객들이 입국하면 공항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놔주는 관광 진흥책을 펼 계획이라는데, ‘백신 여행’에 관심을 보이는 한국인들의 극성을 탓하기에는 정부의 무능이 너무 커 보입니다.

코로나19 사태 초창기 마스크 대란을 겪은 정부가 왜 다시 백신 대란을 초래했을까요. 이 실패의 과정 역시 나중에 세세히 밝혀 백서로 남겨야겠지만, 당장 드는 생각은 애초에 정책 집행자들이 잘못된 판단을 했을 거라는 의구심입니다. 이런 의구심은 최근 청와대 첫 방역기획관으로 임명된 기모란 국립암센터 교수의 과거 발언을 보고 짙어졌습니다. 기 교수는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에 출연해 mRNA 방식의 화이자·모더나 백신에 대한 불신을 여러 차례 내비쳤습니다. 이들 백신이 제때 개발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화이자나 모더나 같은 경우는 mRNA 방식을 처음 써본 것이기 때문에 좀 더 불안감이 크다”고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기 교수는 “백신이 급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국은 지금 일단 환자 발생 수준으로 봤을 때,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그렇게 급하지 않다”는 겁니다. 기 교수는 여권에 영향력을 미쳐온 방역전문가로 통합니다. mRNA 백신에 대한 그의 이런 인식은 아마 상당수 여권 인사들과도 공유했을 겁니다. 이런 잘못된 인식과 판단이 겹치고 쌓이면서 백신 기근을 불러왔다고 보여집니다.

결국 책임은 최종 결정을 내리는 대통령의 몫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청와대 회의에서 “그간 백신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서라는 지시를 몇 번이나 했는데, 여태 진척이 없다가 이런 상황까지 만들었느냐”는 취지로 참모들을 질책했다고 했는데 그 질책은 우선 스스로에게 했어야 맞습니다.

인류사의 교훈대로 리더는 아무도 안 가본 길로 무리를 이끄는 사람입니다.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깊이 관찰해 불안하지만 새로운 길로 인도해 무리를 살리는 것이 리더의 숙명입니다. 진정한 리더가 있느냐 없느냐가 ‘백신 디바이드’를 불러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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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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