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교사인 아내가 며칠 전 식사 자리에서 “아이들이 탈레반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의아했습니다. 뉴스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요즘 아이들이 왜 탈레반에는 관심을 두는지 궁금증이 일더군요. 아내의 설명을 들어보니까 아이들의 구체적인 관심 대상은 ‘공포’로 보였습니다. 요 며칠 신문과 TV를 장식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카불 탈출 행렬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을 저렇게 공포에 떨게 만드는 탈레반이 도대체 뭐냐는 의문을 가졌다는 얘기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목숨을 건 피란’이 사실 외계인이나 좀비에게 쫓기는 영화 속 군중만큼이나 비현실적으로 와닿을 겁니다. 우리 세대야 원체험자들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 자랐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6·25와 피란길은 교과서에서나 보는 화석 같은 스토리일 겁니다. 그런데 진짜 현실에서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장면이 벌어지니 궁금증이 일었을 법도 합니다. 카불 공항에서 이륙하던 미군 수송기 바퀴에 매달려 있다 공중에서 추락한 사람들이 16세, 17세 또래들이었다는 뉴스를 접하면 얼마나 끔찍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실감날 겁니다.

아프간인들의 탈출 행렬을 전하는 기사에 ‘같은 나라 사람들인데 뭐가 그리 무섭냐. 호들갑 떨지 말라’는 조롱성 댓글도 보이던데 아프간인들이 도망치려는 공포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역자를 처단한다며 사람의 목과 귀와 코를 예사로 벱니다. 이슬람 샤리아법(종교법)에 따른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탈레반들은 과거 집권기 여자아이의 교육 금지, 공공장소에서 부르카 착용 등 여성의 삶을 폭력적으로 억압했습니다. 여기에 저항하면 채찍과 돌이 날아듭니다. 최근 외신이 전한 사진을 보니까 탈레반 병사의 채찍질로 피투성이가 된 한 소년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더군요. 지난 집권기인 2001년 세계문화유산인 거대한 바미안 석불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폭파해버리는 그들의 무자비함을, 소년의 사진을 보며 다시 떠올렸습니다.

일각에서는 탈레반도 세월이 흘러 세대교체가 됐기 때문에 변한 게 아니냐는 시선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카불에 입성하기까지 그들이 한 행동을 보면 과거와 달라졌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얼마 전 탈레반이 재점령한 칸다하르주에서 친정부 인사 수십 명이 끌려나와 처형당하는 장면이 공개돼 충격을 줬습니다. 유엔아프간지원단(UNAMA)이 지난 7월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군 철수 시작일인 지난 5월 1일 이후 두 달여 만에 보고된 민간인 사상자 숫자가 통계 작성 후 최대치인 2392명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이 중 사망자만 783명에 달한다는 겁니다.

이번호 김회권 기자가 쓴 기사를 보면 탈레반의 폭력성은 분명 악성(惡性)입니다. 외견상 그들은 종교적 원리주의를 명분으로 무자비함을 보이는 것 같지만 거기에 더해 민족 갈등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탈레반의 근간인 파슈툰족이 다른 부족을 죽일 명분은 차고 넘치는 듯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혼란 속에서 제가 주목하는 것은 탈레반에 맞서는 용기가 그래도 살아있다는 점입니다. 탈레반의 총구 앞에서도 얼굴을 드러내고 시위를 벌이는 여성들의 사진은 감동적입니다. 현지에서도 이 시위 여성들을 ‘영웅’이라 부르는 모양입니다. 탈레반이 재점령한 아프간이 다시 ‘암흑의 시간’으로 빠져들까요, 아님 희미한 변화라도 보일까요. 시련에 직면한 아프간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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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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