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해석 손정도 평생 선교·독립운동
지린성 인근에 한인 정착촌 건설 독립운동기지로 삼아
고문 후유증으로 숨져

아들, 수향 손원일 독립운동가의 피 이어받아 소학교 때부터 독립만세 운동
광복 직후 해군 창설 해군참모총장 이어 국방부 장관
(좌) 손정도 목사 (우) 손원일 제독
(좌) 손정도 목사 (우) 손원일 제독

해석(海石) 손정도(孫貞道)는 3·1운동을 계획했다가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된 독립운동가다. 해석의 맏아들 수향(水鄕) 손원일(孫元一)도 일제에 고문을 당하는 등 핍박을 받다가, 광복 후 해군을 창설하여 초대 해군 참모총장에 이어 국방부 장관을 지냈다.

해석은 1882년 7월 28일 평남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 446번지에서 지방재력가 유림인 손형준과 오신도 사이의 5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오흥리는 넓은 벌판과 강을 낀 주위에 나지막한 야산들이 오밀조밀 펼쳐진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마을이었다. 마을 서쪽 끝에 있는 산 너머 황해의 푸른 파도가 해석에게 큰 뜻을 심어준 마음의 고향이기도 했던 셈이다.

해석은 1895년 두 살 위인 박신일과 결혼했다. 22살 때 그는 향시(鄕試)를 보러 평양으로 가던 중 우연히 묵게 된 목사집에서 기독교 교리와 서구문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과거를 포기한 채 귀향했다. 그는 상투를 자른 데 이어,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마저 때려 부쉈다.

“평소 괄괄하고 열정적인 성품이던 청년은 당장에 몸을 떠는 감동을 맛보았다. 불과 하룻밤도 안되는 사이에 청년 손정도는 기독교에 몸을 맡기는 변신을 이룬 것이다.”(손원일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6년 9월 29일)

해석은 이 때문에 가문에서 쫓겨나 평양으로 올라온다. 그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파견된 문요한(존 무어) 목사의 목사관에서 일하면서, 숭실중학·전문학교를 다닌다. 문중의 눈총을 받으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부인도 평양으로 뒤쫓아와 기독병원(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한다. 1909년 서울 협성신학당(현 감리교신학대학)에 입학한 해석은 상동교회에 다니면서 이승만·이동녕·이시영·최남선 등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선각자들과 친분을 쌓으며, 도산 안창호와도 대면한다.

평생을 괴롭힌 일제의 고문

1910년 그는 목사가 되어 평양감리교선교부에서 1년간 시무하다 만주 파견 선교사로 선정된다. 1912년 안동·길림·간도지방을 순회하며 선교 활동에 몰두하던 중 가쓰라(桂) 일본수상 암살모의로 체포된다. 전기고문과 불로 몸을 지지는 등 일제의 혹독한 고문은 그의 얼굴 곳곳에 흉터를 남겨, 그 후유증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시어머님은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겨울밤 시아버지께서 곤하게 주무시다가 갑자기 깨어 일어나시더니 급히 온 방을 헤매시더래요. 그래서 ‘왜 그러세요’ 하고 물으니까 ‘일본 경찰이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를 가지고 내 얼굴과 몸을 지지니 너무 뜨거워서요’라고 대답하셨대요. 그후에 그 꿈대로 감옥에 가두고 불젓가락으로 얼굴을 지지면서 독립 일 하는 동지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였으나, 끝까지 한 사람의 이름도 말하지 않으시고, 준수한 그분의 얼굴에는 불에 지진 흉터만 남아있었다고 해요.”(맏며느리 홍은혜씨의 증언)

해석뿐만 아니라 부인, 아버지, 어머니, 아들, 손자 모두 8명이 옥살이를 하였으며, 특히 장남인 원일은 일제 경찰이 머리털을 휘감아서 잡아 뽑아,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로 출옥했다고 한다.

해석은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1년 후 무혐의로 풀려난다. 일제는 ‘북간도에 독립무장학교를 세우기 위해 황해도의 금광을 습격하려 했다’는 혐의를 씌워 또 다시 체포한다. 이번에도 무혐의로 판명되었으나, 일제는 전남 진도로 어이없는 귀양살이를 보낸다. 2년 만에 가석방된 해석은 서울 동대문교회, 정동교회에서 시무한다.

“동대문교회는 손정도의 설교에 매료된 교인들이 점점 늘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동대문교회에서의 생활이 1년도 되지 않은 1915년 4월, 그는 현순 목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 제6대 담임목사로 임명됐다.…손정도의 설교는 청년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의 설교로 정동교회에도 교인들이 대거 몰려들었고, 손정도를 추종하는 청년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서서히 정동교회를 압박했다.”(‘손원일 제독’ 오진근·임성채)

가족보다 배고픈 동포들을 위해

해석은 1918년 일제를 속이기 위해 평양으로 ‘위장 이사’를 한다. 그의 독립운동이 본격 가동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는 독립운동단체인 신한청년단에 입당하며, 기흘병원에 입원 중인 이승훈과도 자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협의하곤 했다. 이듬해 해석은 상하이로 탈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의정원 의장(지금의 국회의장, 부의장은 김규식)에 선출된다.

“이때 손정도의 생활은 다른 독립운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몹시 궁핍했다. 1919년 말, 공부하기 위해 상하이에 온 두 딸, 진실과 성실의 학비와 생활비도 대기 힘든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처지에서도 손정도는 힘없이 떠도는 동포들을 도와주었다. 그중 하나가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을 자기 집에 함께 살도록 한 일이다. 안중근 의사는 유족으로 부인 김마리아와 딸 현생, 아들 준생을 남겼다. 이들이 상하이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손정도는 곧장 그들을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았다.”(‘해석 손정도의 생애와 사상연구’ 김창수·김승일)

1921년 8월 임정 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어, 각파 위원들을 모아 태평양회의 참가를 위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강연회를 연다. 상하이 임정과 이승만 중심의 독립운동 진영을 연합시키고자 한 노력이었던 셈이다. 이해 10월 해석은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조성을 위해 김구·여운형·조상섭·김인전·이유필·양기탁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한다. 또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데 대해 안창호와 의견을 모으고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이상촌, 즉 농민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한다. 이 계획은 만주와 상하이 지역에 대규모 한인정착지를 조성해 동포들의 생활근거를 마련하고 힘을 길러서, 조국광복운동의 기지로 삼는 것이었다.

1921년 늦가을, 상하이 임시정부를 떠나 본업인 목사로 되돌아간 해석은 만주동포들과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지린(吉林)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어 평양에 있던 아내와 아들 원일 원태, 딸 인실을 불러들였다. 그는 지린성 밖에다 165㎡(50평)쯤 되는 벽돌 건물의 교회와 목사관을 세워 의지할 곳 없는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들은 너나없이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해석은 그들보다는 형편이 나은 편이어서 동포들이 도움을 청할 때마다 기꺼이 도와주었고, 그들에게 억울한 사정이 있을 때는 그들 대신 관청을 출입하며 변호사 역할도 했다. 때로는 독립군 수십 명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어떤 때는 노자까지 쥐어주었다.

나는 걸레와 같은 삶을 살겠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손원일, 홍은혜, 맏아들 명원, 둘째 동원, 어머니 박신일, 맏딸 영자. ⓒphoto 이수완 전 명지대 교수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손원일, 홍은혜, 맏아들 명원, 둘째 동원, 어머니 박신일, 맏딸 영자. ⓒphoto 이수완 전 명지대 교수

이즈음 해석은 자녀들에게 ‘걸레의 삶’을 강조하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비단옷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러나 걸레는 하루만 없어도 집안이 엉망이 되므로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걸레와 같은 삶을 택해 불쌍한 우리 동포들을 도우며 살겠다.”

조부로부터 고모(인실)를 통해 장손에게 전해진 ‘걸레 철학’을 명원씨는 이렇게 이해했다.

“저는 그저 솔선수범해서 ‘더러운 것 치우기’ 정도로만 생각했으나, 철저히 나를 숨기고 남을 내세우라는 것이었지요. 영광은 국민에게 돌리라는 것이니, 자기만을 나타내려는 요즘의 정치인들이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해석은 숙원이던 농업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지린에서 젠다오(間島) 쪽으로 약간 떨어진 어무셴에 3000일경(日耕)이 되는 농토를 샀다. 일경은 농부 한 사람이 하루갈이를 할 수 있는 땅의 넓이. 이 땅을 사기 위해 그는 고향에 있던 막대한 유산을 모두 처분했다. 이렇게 산 땅을 동포들에게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 했다. 그러나 농업공사의 조성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겠다는 그의 포부는 일제의 탄압으로 위기에 직면했다. 일제가 만주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만주의 군벌들과 손잡고, 독립운동가들을 억압하고 체포 구금하게 되자 모든 독립운동가는 이 지역을 떠나 쫓기는 몸이 되었다.

가족의 안전을 걱정한 해석은 지린성 밖에서 성문 안 뉴마제 거리로 이사했다가, 둘째 딸 성실의 신병 치료를 위해 1930년 베이징으로 이사했다. 그 후 그는 농업공사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혼자서 지린으로 왔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고문후유증으로 급속히 나빠졌다. 해석은 1931년 2월 19일 지린의 동양병원에서 별세, 지린성 밖 베이산 동쪽 기슭에 묻혔다. 임종시 유족은 아무도 없었으나 그를 따르던 동포들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줬다. 1963년 3월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을 추서받았다.

평소 자녀들에게 “천대받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는 과학사회와 산업사회가 될 텐데, 그때는 개인의 실력과 능력이 가장 중요하게 될 것이니, 어떤 분야에서건 최고의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해석은 부인 박신일과 사이에 2남3녀를 뒀다.

장남 원일은 1909년 5월 5일(음력)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때 부친은 서울에서 협성신학당에 다니고 있었고, 모친은 평양에서 여섯 살난 진실과 네 살난 성실 두 딸을 키우고 있었다. 모친은 세 자식을 혼자 키울 정도로 생활력이 강하고 의지가 굳었다. 원일의 아호 수향은 해군 시절 ‘바다의 사나이’에게 노산 이은상이 지어준 선물이다.

수향의 가족은 1918년 평양으로 이사하나 부친이 망명길에 나서 어려움에 직면한다.

“손정도의 상하이 망명을 눈치챈 일본 경찰은 어머니 박신일을 끌고가 무수한 매질과 함께 협박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의 망명을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뗐다. 결국 그녀는 풀려났지만 형사들의 감시의 눈빛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원일은 그날 밤새도록 신음하는 어머니의 이마에 물수건을 갈아 드리는 누나들을 열심히 도왔다.”(‘손원일 제독’)

1919년 초, 수향은 광성소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어느날 담임선생이 수향을 불러 “머지않아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3월 1일을 기해 평양에서도 만세를 부르게 돼 있는데, 그때 사용할 태극기를 함께 만들자”고 말했다. 수향은 문요한 목사의 집 으슥한 구석방에서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평양에서도 만세시위의 날이 밝자 학생과 시민들이 대동문 앞 네거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오가 되자 네거리는 이미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원일은 품에 감춘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그때 군중의 맨 앞줄에 섰던 원일과 어린 학생들은 물벼락을 뒤집어쓰고 골목으로 도망쳤다. 만세는 늦은 밤까지 계속됐다. 만세운동은 어린 원일의 마음에 후련한 느낌을 안겨줬다.”(‘손원일 제독’)

어린 수향은 친구들과 포도 서리도 즐겼다. 중국인 채소밭에서 무를 뽑아 먹고 도망치다가 똥통에 빠진 적도 있었다. 표면이 바싹 말라 그냥 밭인 줄 알고 뛰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화난 얼굴을 떠올리며 인적 드문 청룡산으로 달려가 옷을 벗어 흐르는 냇물에 빨아 널고는, 다 마를 때까지 숲속에 숨어 있다가 한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특히 운동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 배구, 농구, 야구, 축구 등 모두 잘했다. 1921년 수향은 아버지를 따라 지린으로 이주, 유문중학을 다니다가 원광중으로 옮겨 졸업한다. 김일성도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원일은 김일성보다 세 살 위여서 그때는 이미 학교가 달라 김일성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동생인 원태와 인실은 김일성의 당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키 크고 뚱뚱한 모습의 김일성은 어디서 들었는지 혁명이 어떻고 하며 으스대기를 잘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이름은 김성주였다고 한다. 손정도는 동포들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었다. 그중에는 김일성도 있었다. 손정도는 자신의 친구인 김형직이 사망하자 어려움에 처하게 된 그의 아들 김일성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손원일 제독’)

아들에게까지 이어진 일제의 고문

손정도 목사와 손원일 제독을 말하는 홍은혜씨와 명원씨.
손정도 목사와 손원일 제독을 말하는 홍은혜씨와 명원씨.

수향은 1930년 중국 국립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한 후 중국 해군의 원양항해사 시험에 합격하여, 독일 상선을 타고 세계일주를 한다. 그는 상선 근무를 끝내고 상하이에 머무는 동안 큰누이(진실)가 살고 있는 서울에 다니러 왔다가 붙잡혀 1개월 넘게 고문을 받는 등 곤욕을 치른다.

“갑자기 형사가 악을 썼다. ‘평양에서 네 놈의 체포를 의뢰해 왔다. 너 같은 악질이 경성에 침입했다는 걸 알지 못했다는 것이 창피하다.’ 형사들은 그의 아버지 손정도를 봐도 능히 그럴 만한 사람이라며 사실을 자백하라고 원일을 족쳐댔다. 종로경찰서에서의 심문은 1주일간 계속되었다. 똑같은 심문과 똑같은 고문이 되풀이됐지만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1주일이 지나자 원일은 평양에서 온 형사들에게 넘겨졌다.…평양의 형사들도 역시 경찰서의 지하실에 원일을 처넣었다. 잠시 후 일본인 형사와 조선인 형사가 들어와 옷부터 벗겼다. 12월의 추운 날씨였지만 춥다는 느낌은 잠시뿐이었다. 몽둥이와 가죽채찍이 번갈아가며 몸을 휘감았다.…정신을 잃으면 알몸 그대로 수돗가로 끌고가 물을 부었다. 정신이 들면 이번에는 물을 먹였다. 물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으면 한 놈이 발로 배를 딛고 굴렀다. 그러면 뱃속에 들었던 물이 펌프처럼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런 후 또다시 물을 먹였다.”(‘손원일 제독’)

수향은 출감 후 큰 자형 윤치창과 동업으로 남계양행이라는 상점을 5년간 경영한다. 1940년 동화양행 상하이지점장으로 나갔다가 광복되던 날 귀국하자 정긍모·민병증·김일병 등과 해군 창설에 앞장선다. 그는 1945년 11월 11일 11시 서울 관훈동 옛 충훈부 터에서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립, 대한민국 해군의 요람을 일군다. ‘해군은 신사여야 한다’고 믿는 그는 한자 ‘十一’을 세로로 쓰면 ‘士(선비 사)’ 자가 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창설일을 ‘士’ 자가 2개 계속되는 11월 11일로 정했다. 또 육·공군에 앞서 가장 먼저 창군한 기록을 보이기도 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초대 해군 참모총장에 임명된다. 6·25전쟁 중에는 해병대로 하여금 경남 통영 탈환작전을 성사시켜, ‘귀신 잡는 해병’이란 별명을 달게 하기도 했다.

“1950년 8월 23일, 통영 상륙작전을 취재하러 왔던 미국 뉴욕타임스의 마거릿 히긴즈 종군기자는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적군을 기습적인 양동작전으로 공격해 적의 점령지를 탈환한 한국 해병대의 전공을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손원일 제독’)

뒤이어 인천상륙작전 때는 한국해병대원들과 함께 9·28 서울수복 때까지 적탄 속을 뚫고 고락을 같이 했다.

“노도와 같이 진격하는 상륙군의 한가운데에는 해병대 얼룩무늬 전투복에 철모를 눌러쓰고 안경을 낀 마흔한 살 중년의 해군총수가 있었다. 그는 20세 전후의 새파란 젊은 해병용사들과 함께 최전선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손원일 제독’)

1953년 국방장관이 되어서는 미국을 여러 차례 오가며 7억달러의 원조를 받아내, 10개의 예비사단을 창설하는 등 국군 현대화의 초석을 다진다. 정일권은 회고록에서 “7억달러의 군원(軍援)을 얻어낸 데는 손 제독님의 원만한 성품과 인간적 매력에 흥미를 느낀 닉슨 부통령과 윌슨 국방장관의 도움이 컸다”고 밝혔다.

수향은 1958년 초대 서독대사를 지내며, 1963년에는 국민의당에 참여하여 제5대 대통령선거 당시 박정희 대신 허정을 지지하기도 했다. 군인은 절대로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기본철학이었다. 수향은 1980년 2월 15일 국군통합병원에서 별세,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해사 교가 작곡한 부인은 ‘해군의 어머니’

수향은 1939년 홍두영과 김인재 사이 8남매 중 다섯째인 홍은혜(이화여전 음악과 졸업)와 결혼하여 5남매를 낳았다. 홍은혜(95)는 막내 시누이인 손인실(YWCA회장 역임)과 대학 동기동창이다. 마침 같이 간 사진작가가 자신의 어머니(김경현·전 중앙여고 교사·미국 거주) 얘기를 꺼내자 ‘경현이는 붙임성있고 참 똑똑했던 친구였다’면서 손을 꼭 잡았다. 홍은혜씨는 해군 초창기에 해군 간부 부인들을 중심으로 군함 구입을 위한 범국민적 성금활동을 벌이는가 하면, ‘바다로 가자’ 해군사관학교 교가 등을 작곡하기도 해 ‘해군의 어머니’로 불려오고 있다. 현재 서울 신길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맏아들 명원(70·오션라크 회장)씨는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 3녀인 김영숙(65·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허광수(한국나이키 회장), 정몽준(국회의원, 한나라당 전 대표)씨와 동서가 됐다. 명원씨의 맏딸 숙희씨는 존 오코넬(미국인)씨과 결혼했으며, 둘째 딸 정희씨는 홍정욱(국회의원)씨와 결혼했다. 수향의 차남 동원(68·미 가톨릭대 건축과 졸업)씨는 서동선(의사·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수향의 3남 창원(58·연세대 졸업)씨는 박용덕씨와 결혼했다.

해석의 차남 원태씨(상하이 교통대·세브란스의전)는 미국으로 이민, 네브래스카주립대병원 교수를 지냈다. 그는 1991년과 1994년 두 차례에 걸쳐, 유문중 동창인 김일성의 초청을 받아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유신(이화여대 졸업)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뒀다. 해석의 장녀 진실씨(시카고대 가정과 졸업)는 윤치호의 아우인 치창(주터키대사 역임)씨와 결혼, 2남2녀를 뒀다. 해석의 차녀 성실(이화학당 졸업)씨는 신국권(상하이 교통대 졸업)씨와 결혼했다. 그의 본명은 신기준이었으나 중국 천지를 휩쓰는 그의 축구 솜씨에 반한 임어당(철학자)이 ‘나라를 되찾는 사람이 돼라’는 뜻으로 개명해 주었다. 해석의 3녀 인실(이화여전 영문과 졸업)씨는 문병기(세브란스의전·미 일리노이대 졸업)씨와 결혼, 1남1녀를 뒀다. 문씨는 1983년 7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말라위에 지원파견돼 2년간 봉사활동을 펴, ‘한국판 슈바이처’로 추앙받기도 했다.

바로잡습니다

주간조선 2141호 ‘한국의 명가’ 장준하 편과 관련, 유족과 기념사업회의 요청으로 ‘실족사’를 ‘의문의 실족사’로 고칩니다.

내가 본 해석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해석 손정도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벌인 의로운 선각자이다. 본래 유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스스로 체험에 의해 ‘서구적 가치에 의해 세상이 바뀌고 있는 과정’을 기독교가 주도하고 있음을 실감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사명이라고 파악했다. 그의 선교사업은 사실상 독립운동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설교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나라 사랑을 외치며 일제의 조선침략을 비판했다. 이러한 설교로 교인들의 수는 나날이 늘어갔으며 그는 일제의 요시찰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본 수향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편찬과장

수향은 바로 우리 해군을 위해 태어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망명시절 중국 상하이에서 대학 항해학과를 다닐 때부터 그분은 해양보국의 꿈을 착실히 키워오신 것이니 해군 창설을 위한 ‘준비된 인물’처럼 보여진다. 광복이 되자마자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분의 집안 인맥은 일사천리로 해군을 창설하는 데 밑바탕 역할을 했다. 뿐더러 그분은 항상 장병들의 선두에서 솔선수범하는 자세로 고락을 함께 하여 큰 감명을 주기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 때 해군의 총수임에도 해병대원들과 함께 선두에 나선 그분의 전투자세는 이번에 성공한 청해작전에도 그 맥이 연면하게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근대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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