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헬싱키의 노키아 매장 ⓒphoto 블룸버그
핀란드 헬싱키의 노키아 매장 ⓒphoto 블룸버그

매년 의례적으로 해왔던 ‘다사다난한 해’라는 말이 올해는 개인적으로나,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핀란드에나 딱 들어맞는 한 해였다. 올해 유럽연합(EU) 지역의 경제가 전반적으로 큰 위기를 겪은 가운데 핀란드도 그 부담을 같이 공유해야 했다. 오랫동안 세계 휴대폰시장을 주도했던 핀란드의 대표적 기업 노키아가 한없는 추락으로 국내외 언론의 조롱거리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노키아는 올해 자금 부족으로 핀란드 내 본사 사옥을 매각하기에 이르렀으며 지난 6월에는 직원 1만명을 해고한다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 중 3700명은 핀란드에서 근무하는 직원으로 이는 무려 핀란드 전체 직원의 40%에 해당한다.

그런데 태풍의 눈은 더 고요하다던가…. 정작 핀란드 내에서 체감하는 위기 의식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덜했다. 노키아는 급격히 하강세를 타고 있다지만 핀란드 경제는 생각보다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은 듯하다. 이미 수년간 노키아는 많은 생산 시설과 R&D 연구소를 해외로 이전, 2000년 핀란드 노키아 매출이 핀란드 GDP의 4%를 차지했을 때와 대비하여 2011년에는 그 비율이 0.5%로 급격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포스트 노키아 시대를 준비하라

핀란드는 오히려 요즘 ‘포스트 노키아(Post Nokia)’ 시대에 대해 새로운 희망을 걸고 있다. 앵그리버드 게임을 만들어 세계 모바일게임계를 평정한 업체 로비오(Rovio)를 필두로 세계가 주목하는 여러 신생 회사들이 핀란드에서 속속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도 이전에는 노키아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어했지만 요즘은 스스로 스타트업(Start-up)을 창업하거나 아니면 취업을 하더라도 성장의 가능성이 더 큰 스타트업 회사가 인기다.

얼마 전 슬러시(Slush)라고 하는 북유럽 최대의 스타트업 이벤트에 참여했었다. 이 이벤트는 핀란드뿐만 아니라 기타 북유럽 국가와 러시아, 중국에 이르기까지 모두 500여개의 스타트업 회사와 200여명의 투자자가 참여,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문전 성시를 이루었다. 핀란드에서 살며 이렇게 사람이 많은 경우는 처음 겪어볼 정도였다. 슬러시 이벤트 개최 측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참여자들이 늘어난다”며 “작년에는 1500명이었는데 올해는 무려 3000명이나 몰렸다”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 카타이넨 핀란드 총리 등 굵직한 정치계·경제계 인사도 많이 참여하여 이 이벤트를 축하해 주었는데, 카타이넨 핀란드 총리는 이벤트를 여는 축사에서 “스타트업은 핀란드 경제의 미래를 책임지는 생명선(lifeline)”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포스트 노키아 시대에 대처하는 노키아의 자세다. 회사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키아는 직원을 해고할 때 이들을 그냥 거리로 내모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창업의 길을 열어주려 한다. 노키아는 ‘브리지(Bridge)’라는 해고자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 해고자들이 창업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면 1인당 2만5000유로(약 3500만원)까지 지원해준다.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해고자들을 적당히 팀으로 짜주어 창업 자금의 크기도 키워주고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조언도 해준다.

자신의 집에 난 불도 끄기 어려운데 나가는 사람 창업까지 지원해 주는 것이 잘 이해가 안 가서 이 분야 전문가인 한 대학교수에게 질문하니 “노키아가 세계적 기업이 되기까지 핀란드 정부로부터 든든한 지원을 받았는데 그때 받았던 은혜를 나라에 되돌려준다는 의미가 있으며, 또 하나는 기업이 단순히 영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윤리적 책임을 져 나가는 좋은 예”라는 답이 돌아왔다. 비록 예전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뒷모습까지 아름다운 기업, 노키아를 보유한 핀란드가 살짝 부러웠다.

뒷모습이 아름답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노키아뿐만이 아니다. 며칠 전 우연찮게 만난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전 대통령의 퇴임 후 뒷모습도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1년 전 핀란드 정치 상황은 지금의 한국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지난 1월 핀란드는 대선을 치렀고 12년 만에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돼 3월에 취임식을 가졌다. 할로넨 대통령은 퇴임 후 이전에 살던 동네 아파트로 조용히 이사갔다. 그 모습을 TV뉴스로 지켜보며 우리나라 대통령이 퇴임 후 거주지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문제로 사회에서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했다. 평범하게 보일 수도 있는 핀란드 대통령의 퇴임 과정이 그래서 더 특별해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전 대통령이 이삿짐을 싸서 평범한 아파트로 이사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멀티플렉스 영화관에 갔다가 또 놀라운 광경 하나를 목격했다. 퇴임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에서 전임 대통령에 대한 다큐멘터리 장편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전관에 대한 예우인가”라고 생각했지만 영화관으로 들어가는 중장년층 관객들의 긴 행렬을 바라보며 국민이 얼마나 대통령을 좋아하고 따랐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서민으로 돌아온 퇴임 대통령

서민적인 대통령, 최초의 여성 대통령으로 알려진 타르야 할로넨 전 대통령을 실제로 만나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서민적이었다. 신발을 갈아 신을 때 살짝 구멍 난 양말이 보이기도 했고, 감기가 걸려 몸이 많이 아프다면서도 약속된 장소에 무거워 보이는 큰 가방을 직접 메고 혼자서 온 점도 그랬다. 가방을 들어주는 수행원이나 보디가드가 눈에 띄지 않았다.

필자와 지인들은 타르야 할로넨 대통령이 대통령직 퇴임 후 얻은 조그마한 사무실에서 열린 파티에도 초대를 받았다. 같은 빌딩 입주자들이 할로넨 대통령 사무실에 많이 모여 있었다. 할로넨 대통령은 직접 구운 케이크를 이웃에게 대접하며 정답게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전 대통령과 마주한다는 부담을 가진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할로넨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도 큰 가방을 본인이 직접 들고 다닌다든지, 전속 미용사가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머리를 만지고, 외유 중에는 여행용 다리미로 호텔에서 직접 다림질을 하는 등 소탈한 모습으로 화제에도 많이 올랐고 국민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할로넨 전 대통령에게 “왜 굳이 그렇게까지 하셨냐”고 물어보니 “어쩌면 내가 서민적 뿌리를 잊지 않고 그렇게 했기 때문에 퇴임 후 다시 일반 시민으로 돌아오는 것이 한결 수월했다”고 대답했다. 핀란드 사람들에게 “타르야 할로넨 대통령이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을 하면 거의 대부분이 ‘우리 중의 한 명(one of us)’이라고 대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퇴임한 대통령이 ‘우리 중의 한 명’으로 다시 돌아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을 꿈꾸며 핀란드에서 본 2012년을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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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
이보영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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