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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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전원철(54) 박사는 29개 이상의 언어를 구사한다. 비교적 ‘흔한’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는 기본이다. 스페인어, 라틴어, 아랍어, 몽골어, 터키어, 티베트어, 우즈벡어, 만주어, 페르시아어,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오롱키어, 어웡키어, 다와르어, 부랴트어, 타타르어, 거란어 등을 구사한다. 전 박사가 지난해 낸 책 ‘고구려-발해인 칭기스 칸’에는 15개 언어로 쓰인 150권의 책이 참고서적으로 언급돼 있다.

기자는 이 언어의 장인(匠人)을 검증해 보겠다며 몽골인 지인을 동원한 적이 있다. 의사인 지인은 전 박사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렇게 말했다. “천재다. 몽골에 발도 디딘 적 없는 사람이 몽골어를 이 정도로 구사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지난 6월 20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전 박사에게 그만의 언어 정복 비결을 물었다. “무조건 원서를 한국어 번역본과 나란히 두고 읽었다. 기초 문법을 익힌 후 원서를 읽어나가면 고급 문법은 자동으로 깨칠 수 있다. 동기(서울대 외교학과 졸업)들이 ‘군주론’(마키아벨리)을 한국어판으로 읽을 때, 나는 이탈리어 원서와 한국어판을 같이 두고 대조해가면서 읽었다. 그전에 먼저 이탈리아어 문법을 1~2주간 공부했다.”

- 쉽게 언어를 익히는 노하우가 있다면. “습관이다. 규칙적으로 공부하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다. 매일 1시간씩 들여다봤다. 버스, 지하철, 화장실에서 보내는 자투리 시간을 적극 활용했다. 귀찮더라도 반드시 사전을 들고 다녔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찾아보고, 주변의 관련 단어들도 같이 읽어보며 연필로 표시한다. 자연스럽게 복습하게 된다. 어휘 수를 늘릴 수 있다.”

- 가장 어려웠던 언어는 어떤 언어였나. “아랍어다. 공군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처음 공부했다. 책도 없이 아랍어과를 나온 동기생과 훈련 중 휴식시간마다 대화를 하며 조금씩 배웠다. 7년 전에 본격적으로 공부했는데, 역시 나이 탓인지 학습 속도가 느리더라.”

- 가장 과학적인 언어를 든다면. “모든 언어는 나름의 어법 규칙이 있다. 어떤 게 더 과학적이라 단정할 순 없다. 다만 가장 규칙적인 어법을 갖춘 언어를 들 순 있다. 퉁구스-우랄-알타이어라고 생각한다. 한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골어, 투르크어가 이에 속한다. 영어, 독어 같은 게르만어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의 라틴 계열 언어보다 문법이 훨씬 규칙적이다.”

전 박사는 대학 졸업 후 외교부와 유엔에서 근무했다. 1996년에는 유엔 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을 맡아 1년간 체첸에 머물기도 했다. 당시 체첸과 러시아는 전쟁 중이었다. “UN 관용차를 타고 체첸공화국, 다게스탄공화국, 북오세티아공화국을 오갔다. 전쟁난민을 위한 인도적 구호사업을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그 나라들의 경계는 해발 5600m가 넘는 캅카스산이다. 산중에서 갑자기 구호물자 트럭에 총탄이 날아오거나 국제기구 직원들이 납치되고 살해당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어느 날, 전 박사에게도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해질녘 산길을 넘어가는 중이었다.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나타났다. 총을 들이대며 차를 세웠다. 현지인 아바르(Avar)족 청년이었던 조수가 내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체첸인이다, 조심해.’ 문을 천천히 열고, 체첸인 사내들에게 말을 걸었다. ‘살람 알라이쿰, 노흐치 이기시?(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체첸 사람인가요?)’ 총을 들이댄 얼굴이 싹 바뀌었다. 놀라며 반가운 표정으로 답해왔다. ‘와 알라이쿰 살람, 이고.(당신에게도 평화가 있기를. 그렇소.)’”

- 순순히 보내줬나. “어디에서 왔냐고 묻더라. ‘우리는 UNHCR(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소속이고 나는 한국인’이라고 답했다.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자고 가라고 손을 잡아끌더라. 결국 양고기 구이까지 대접받고, 사내의 집에서 하룻밤 잤다.”

기자는 그의 아파트를 방문한 적이 있다. 집안 곳곳엔 그림인지 글자인지 알 수도 없는 언어로 쓰인 책들이 말 그대로 널려 있었다. 책의 여백엔 공부한 흔적이 빼곡했다. 설명을 들어보니 대부분이 역사책이다. 터키, 몽골, 우즈베키스탄, 이란, 러시아 등 다양한 나라에서 공수했단다. ‘몽골비사’, 페르시아어 사서 ‘선별된 역사’ 등의 책이다. “여러 언어로 쓰인 역사책을 읽어왔다. 역사 속 단어들의 어원을 규명할 수 있었다. ‘몽골’과 ‘칭기스 칸’이 그 예다. 칭기스 칸은 한문으로는 돌궐(突厥), 페르시아 및 투르크어로 투르키스탄으로 불리던 땅을, 통일 후엔 ‘몽골’이라 불렀다. 몽골이 무슨 뜻인지 몽골 학자들도 잘 모른다. 나는 이게 우리 옛말에서 나온 거라 생각한다. ‘말 키우는 고을(나라)’을 뜻하는 ‘몰(말·馬)-골(忽·郡·國)’, 즉 ‘말갈(靺鞨)’에서 나온 말이다.”

- 칭기스 칸은 무슨 뜻인가. “페르시아, 중세 투르크어, 몽골어와 한문 등으로 된 동서방 사서에 기록된 칭기스 칸 선조의 계보를 비교 연구했다. 그가 고구려의 ‘말갈’ 군왕 출신이었던 발해왕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의 제19대손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보면 칭기스 칸을 ‘친기(친구이) 칸(Chinghi Kane)’이라고 부른다. 발해 건국 후 최초 15년간의 이름이던 ‘진국왕(震國王)’을 가리킨다. 아명인 ‘테무진’은 고구려 제3대왕 ‘대무신(大武神)왕’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칭기스 칸이 고구려 왕가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 요즘엔 어떤 연구를 하고 있나. “고구려가 망하고 왕족과 백성들이 당시 돌궐, 즉 투르키스탄으로 갔다. 이들은 적어도 12개 이상의 이른바 ‘투르크왕가’를 세웠다. 페르시아, 아랍어, 카자흐-우즈벡-아제르바이잔의 언어로 쓰인 투르크어 사서를 찾아내어 계보를 밝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 도종환 문체부 장관 후보자 지명 후 이른바 ‘유사 역사학’ 논쟁이 불거졌다. “기존 역사계, 즉 ‘강단사학’에선 ‘한민족사’가 아니라 ‘한국사’라는 말을 쓴다. 오늘날의 국경을 토대로 ‘국가사’ 측면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한다. 이를 ‘반도사관’이라고 비판하는 재야사학 측은 주로 고조선, 고구려의 국경이 어디였는가를 중점적으로 거론한다. ‘한사군 위치 논쟁’이 대표적 예다. 저는 영토는 민족의 성쇠에 따라 확장되었다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본다.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이나 대영제국의 성쇠가 대표적 예다. 우리 역사도 크든 작든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현재의 국토만을 배경으로 두고 연구하는 ‘국가사’가 아니라 ‘민족사’를 중심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본다.”

- 민족사로 역사를 보는 나라가 있나. “터키를 예로 들 수 있다. 터키인들은 선조들이 8세기의 돌궐비문이 발견된 몽골고원과 만주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를 거쳐 약 1000년 전 오늘날의 터키에 도달한 역사를 서술하며 통칭해 ‘터키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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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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