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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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호 서울대 자연과학대 학장을 만나러 간 10월 15일은 서울대 개교기념일이었다. 휴일이어서 자연대 행정동인 515동 사무실은 대부분 닫혀 있었으나, 이준호 학장만 사무실을 열어놓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자 이준호 학장은 “주간조선 창간 50주년을 축하한다”고 환히 웃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이 학장이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에 첫선을 보인 주간조선은 창간 50주년 기념호에 한국 기초과학의 현주소 얘기를 담기 위해 이 학장을 찾아갔다.

“10월이 되면 자연과학자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매년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할 때는 마음이 안 좋다.” 이 학장은 ‘한국 과학자는 언제 노벨상을 받느냐’는 사회적 압박감에 대해 이렇게 부담감을 표현했다. ‘대덕의 과학자들’을 주간조선에 연재하고 있는 나는 이 학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과학자들이 다들 열심히 연구하고 있더라. 시간이 지나면 연구가 쌓여서 노벨상을 받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느냐.” 이 학장은 “그렇다. 올해는 노벨상 얘기가 좀 덜 나온 것 같다”고 동감을 표시했다.

이 학장에 따르면, 서울대 자연대는 대학 평가에서 세계 20위권이고, 뛰어난 연구자가 많다. 세계적인 학술지인 셀(Cell), 네이처, 사이언스에 실리는 논문이 늘어나고 있다. 한국 연구자는 지난 1년간 셀 2편, 네이처 1편, 사이언스 2편의 논문을 기록했다.

“올해 노벨상 받은 분들을 보자. 1990년대 연구로 받았다. 노벨상이라는 게 이르면 10년 전 연구, 보통은 20~30년 전 연구로 받는다. 돌아가서 한국의 1990년대 연구를 보면 세계적인 학술지에 논문을 낸 생명과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생명과학부 교수인 이 학장은 생명과학부 중심으로 얘기를 들려줬다. 생명과학자가 셀, 네이처, 사이언스가 아니라 바로 그 아래쪽 학술지인 분자세포생물학저널(Journal of Molecular Cell Biology·JMCB)에 논문을 게재한 게 1998년쯤이다. 그러니 지금 생명과학 쪽에서 한국의 연구자가 노벨상을 받기는 쉽지 않다는 얘기다. “지금은 한국의 연구 수준이 높아져, 일본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듣는다”고 이 학장은 말했다.

이 학장에게 어떤 분야에서 서울대 자연과학대 교수들의 연구가 두각을 보이고 있으며, 나중에 노벨상 수상으로 연결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 학장은 “지금 연구 업적을 우리가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어떤 게 중요한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그게 중요했구나 하는 걸 깨닫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일본 도쿄공업대의 오스미 요시노리(大隅良典) 명예교수는 2016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다. 그는 효모 연구로 생명과학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효모가 세포 내 불필요하게 된 미토콘드리아 등을 잡아먹는 오토 파지(autophagy·자가포식) 논문을 1993년 발견했다. 이준호 학장은 “오토파지 연구는 처음에는 주목받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요하다는 걸 인정받은 경우”라고 말했다. 후학들이 덤벼들어 연구를 집중적으로 하면서 그 분야가 커졌다는 것.

이 학장은 2006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앤드루 파이어 예도 들었다. 앤드루 파이어는 이 학장과 연배도 비슷하고 예쁜꼬마선충을 연구한다는 점도 같다. 앤드루 파이어는 ‘RNA간섭’에 대한 연구 실적을 인정받아 노벨상을 받았다. 이 학장은 “처음에 앤디가 네이처에 관련 논문을 냈을 때는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인지 몰랐다. 나와 비슷한 중급 연구자였다. 학회에서 만나면 ‘앤디’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하고 그랬다. 하지만 나중에 RNA간섭이 중요하다는 게 확인되었고, 후속 연구가 이어지면서 이 분야 연구가 커졌다”라고 말했다.

이 학장은 6년째 매년 12월 첫째 주에 스웨덴에 가고 있다. 마침 방문 날짜가 노벨상 수상일과 겹쳐 항상 노벨상 수상자 강연을 듣는다. “블루LED를 발견한 일본 노벨상 수상자의 스톡홀름대학 연설을 들었다. 삶이 감동이었다. 1980년대 일본 학회 에피소드를 들려주는데, 자신이 속한 블루LED 연구 관련 학회는 참석자가 전부 20~30명밖에 안 됐다고 했다. 바로 옆방에서 당시에 잘나가던 학회는 참석자 수가 400~500명이었다고 했다.” 이 학장이 말하는 블루LED를 발견한 일본 노벨상 수상자는 2014년 수상한 나카무라 슈지(미국 샌타바버라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다.

이 학장에게 ‘지식 경계를 확장하는 지식의 최전선에 도전하는 게 학자로서 할 일이고, 그런 지(知)의 최전선에 몸을 던지는 게 젊은 연구자가 해야 할 일 아닌가’라고 물었다. 이 학장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최전선이 어디인가를 좇으면, 연구의 유행과 트렌드의 첨단을 따라갈 수 있다. 그건 새로운 게 아니라, 트렌드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한국 대학들의 생명과학부만 해도 새로 임명된 교수를 보면 신경과학 분야가 많다고 했다. 이게 트렌드라는 것.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재임 때 뇌지도 제작 관련 ‘브레인 이니셔티브’ 프로젝트를 시작한 바 있다. 뇌 연구가 물론 중요하다. 좋은 논문이 쏟아져 나온다. 미국에서 신경과학을 연구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교수가 된다. 그런데 그게 바로 유행을 따르는 연구라고 이 학장은 말했다. 이 학장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연구해야 한다. 어떤 게 좋아하는 거냐? 그건 본능적인 것이다. 방향성은 없다. 그렇게 해야 한국 기초과학의 토양이 건강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집중이냐, 많은 연구자에게 나눠주느냐

이 학장은 정부의 과학 정책과 관련, 학계에서 계속되는 이슈가 있다고 했다. 정부가 의지를 갖는 ‘기획과제’에 연구비를 몰아주느냐, 많은 연구자에게 연구비를 나눠주느냐는 문제이다. “2016년쯤 학회 중심으로 의견을 모아 국회에 청원을 냈다. ‘큰 과제만 있다. 목적을 가진 사업에만 국가가 연구비를 지원한다. 이런 연구에는 많은 연구자가 참여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연구자 중심의 지원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학장에 따르면 한국연구재단에 연구비를 신청하는 과학자 100명 중 10명도 연구비 지원을 못 받을 정도였던 때도 있었다.

물론 희망은 있다. 국회 청원을 주도한 사람이 노정혜 당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인데 노 교수가 지난 8월 한국연구재단 이사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 학장은 노 이사장에게 변화를 기대하고 있다. ‘기획과제’로의 쏠림현상을 바로잡아, 개인 연구자가 주제를 정해 수행하는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학장은 현재는 좀 완화됐으나 2~3년 전에는 “민란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국가 R&D 예산 규모가 작지는 않다고 들었다.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 아닌가?’라고 다시 물었다. 이 학장은 “기초과학연구비 자체가 적다”고 반박했다. “기초과학이라고 하면, 응용분야의 기초도 있고, 원천기술의 기초도 있다. 어디에 줄을 긋느냐에 따라 기초과학 연구비 규모가 달라진다. 선진국 대비 국가 R&D 총액이 적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기초과학연구비 부족은 여전히 심하다.”

이 학장은 서울대 자연과학대 신임 교수 정착비를 예로 들었다. “신임 교원 정착비가 부족하다. 대학본부 지원금 4000만원 포함해서 모두 2억원을 만들어준다. 이 액수로는 연구를 시작하기 위한 실험실을 꾸리기 힘들다.” 이 정도의 지원으로는 장비조차 제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학장은 지난 6월 학장으로 취임했다. 임기는 2년이고, 재임할 수 있다. 서울대 자연과학대는 한 학년 수가 250명이고, 교수 수는 250명이다. 교수 대 학생 비율이 1:4이다. 수리과학부, 물리·천문학부, 통계학과, 화학학부, 생명과학부, 지구환경과학부, 과학기술학 연계전공 등 5개 학부, 2개 학과가 있다.

이 학장은 “학생의 생활수준 편차가 크다”면서 사회발전연구소가 부유층과 빈곤층 출신 재학생을 조사한 결과를 들려줬다. 두 그룹 학생에게 자신의 미래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어들, 즉 ‘word cloud’를 물어보는 방식의 조사를 한 결과, 부유층 출신 학생은 ‘교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쪽의 단어들을 많이 말했다고 한다. 반면 빈곤층은 소소한 행복 관련한 얘기를 했다. “서울대는 한국을 이끄는 리더를 키우는 곳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들이 꾸는 꿈이, 꿈의 크기가 (빈부 차에 따라) 너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꿈의 사다리를 연결하는 일을 해보려 한다.”

근로장학금 3억 마련 나서

이 학장은 근로장학금 3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힘을 쓰고 있다. 자연대에 들어와서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와 연구를 하려면, 학교 밖의 아르바이트보다는 교내 근로장학금을 받을 수 있으면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어려운 학생 100명에게 줄 장학금 3억원을 마련하기 위해 동문 등을 대상으로 접촉하고 있다고 했다. 이 학장은 “자연대는 동창회도 약하다”며 성과가 아직은 미미함을 드러냈다.

이 학장은 서울대 미생물학과 1980년 학번으로,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학에서 1994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전학 및 발생학을 연구한다. 예쁜꼬마선충이라는 1나노미터 크기의 생물을 1989년 칼텍 박사과정 때 알았고, 이때부터 30년 가까이 연구하고 있다. 예쁜꼬마선충은 신경세포가 300개여서, 특정 행동을 지시하는 신경세포가 어느 것인가를 알아내기가 비교적 쉽다. 가령 예쁜꼬마선충은 ‘히치 하이킹’이라는 행동을 한다. 환경이 나빠지거나 해서 멀리 옮겨가 살 필요가 있으면 꾸불꾸불 기어다니던 평소 행동과는 달리 몸을 수직으로 바짝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지나가던 쥐며느리의 몸에 달라붙어 멀리 이동한다.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면 쥐며느리에게서 떨어진다. 이런 행동, 즉 몸을 일으켜 세우는 행동을 하는 신경세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내 이준호 학장은 2012년 네이처 뉴로사이언스에 게재한 바 있다. 예쁜꼬마선충의 이런 행동은 생물체의 ‘종 확산 행동’ 중 하나이다. 이 학장의 랩(연구실)에서는 7~8명의 연구자가 예쁜꼬마선충 관련 연구를, 나머지 절반은 다른 연구를 한다고 했다. 이 교수의 랩에 있던 젊은 연구자들이 쓴 ‘벌레의 마음: 예쁜꼬마선충에게 배우는 생명의 인문학’(김천아·서범석·성상현·이대한·최명규 지음, 2017)은 인간이나 미생물이나 생명체로서 보편성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줘 화제가 된 바 있다. 이 학장에 따르면 예쁜꼬마선충은 초파리, 박테리아, 쥐와 함께 생물학자가 연구하는 대표적인 모델 동물이며, 한국에 예쁜꼬마선충 연구자는 대학원생까지 포함해 100여명이 있다고 한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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