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그린북’에서 1962년 미국 남부를 순회공연하는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마허샬라 알리 분)의 자가용 운전사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토니 립으로 나온 비고 모텐슨(60)과의 인터뷰가 최근 할리우드의 런던호텔에서 있었다. 연기파인 모텐슨은 이 역으로 오는 2월 24일 열리는 제91회 아카데미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 외에도 작품, 남우조연(마허샬라 알리), 각본 및 편집상 후보에도 올랐다.

날카로운 눈매의 모텐슨은 나이보다 많이 젊어 보였는데 매우 지적이고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매섭게 생긴 것과는 달리 인자하고 겸손했는데 질문에 가끔 유머를 섞어가며 진지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는 시인이자 미술가, 사진작가, 작곡가이기도 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그린북’의 장면들.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 박사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그린북’의 장면들.

- 토니 역을 완벽히 소화하는 데 힘이 들었는가. “처음에는 무척 신경이 쓰였다. 나는 토니와 달리 이탈리안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혹시나 그 점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리고 훌륭한 이탈리안 미국인 배우들도 많기 때문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극본을 읽으면서 크게 감동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알찬 글이었다. 깊이가 있을 뿐 아니라 재미도 만점이었다. 각 개인이 서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이어서 사람들이 크게 감명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다르고 처음에는 상대방을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두려워 말고 ‘헬로’하며 접근하면 궁극적으로 가까워질 수 있다는 얘기는 요즘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값진 것이다.”

- 토니는 인종차별주의자인데 그런 사람을 연기하는 느낌이 어땠는가. “그가 하는 인종차별적인 말과 행동을 어느 정도 써야 할지에 대해 피터 파렐리 감독과 신중히 논의했다. 우리는 그런 말과 행동은 실제로 토니가 한 것인 데다가 그가 돈 셜리와 여행을 하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선 그의 바닥도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어느 것도 숨기지 말아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재미가 있긴 하지만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다.”

- 영화에서 튀긴 닭과 핫도그를 즐겨 먹으면서 비만한 모습인데 진짜로 그런 것들을 많이 먹었는가. “처음에는 그것들을 진짜로 즐겼다. 아주 맛있었다. 그러나 체중을 늘리려고 포식을 하다가 점차 싫증이 나면서 주말에 집에 돌아오면 정상적인 음식을 먹었다. 월요일에 촬영장에 나가니 의상 담당자가 내 체중이 줄었다면서 도넛과 피자를 더 먹으라고 종용하더라. 그래서 체중을 늘리려고 자기 전에 과식을 하고 디저트도 곱빼기로 먹었다. 건강상 아주 나쁜 일이다. 체중은 40파운드(18㎏) 정도 늘었다. 먹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근육을 두드러지게 하려고 역기도 들었다.”

- 실제 토니 가족을 만났는가. “감독 파렐리는 오래전에 돈 셜리를 먼저 만나 그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그가 사망한 뒤에야 영화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돈으로부터 자기 얘기를 영화화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공교롭게도 돈 셜리와 토니 두 사람은 2013년 같은 해에 사망했다. 난 토니의 가족을 만나 식사도 함께 하고 그들로부터 토니와 돈 셜리의 여행에 관한 얘기도 자세히 들었다. 토니의 가족 절반 정도가 영화에 실제로 나온다. 그들 외에도 영화에는 비(非)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오히려 그것이 영화의 사실성을 잘 살려주고 있다. 피터는 그런 면에서 도박사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운도 따라줬다. 그는 배우들과 제작진에게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달라고 할 정도로 열린 사람이다. 모두가 영화 제작에 참여한 셈이다.”

- 영화에서 토니는 아내에게 좋은 단어를 제대로 못 찾아 쩔쩔매면서 사랑의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당신이 마지막으로 사랑의 편지를 손으로 쓴 것은 언제인가. “난 토니보다는 멋진 단어를 구사할 줄 안다. 그러니까 그보다는 사랑의 편지를 쉽게 쓸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어가 아니라 마음의 진정성이다. 그래서 토니의 아내는 남편의 서툰 글에서 진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애인(스페인 배우 아리아드나 길)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글은 이틀 전에 보낸 엽서다. 난 늘 이메일이 아니라 편지를 써서 보낸다. 우체국이 없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손으로 쓴 편지나 엽서를 보내지 않는데 난 엽서를 자주 이용한다. 난 여행할 때면 종이와 펜을 늘 갖고 다닌다. 세계적으로 수는 줄고 있지만 아직도 우체국은 있다. 따라서 얼마든지 편지를 쓸 수가 있다.”

-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극우파들이 집권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불확실성 시대에 살고 있다. 권력과 돈에 대한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 불확실성을 이용하고 있다. 이런 일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와 유럽 등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반(反)이민 정서가 확산되고 있다. 이로 인해 사방에 공포가 만연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위정자들은 이를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난 낙관론자여서 이런 현상이 언젠가 바뀌리라고 본다. 인간의 진보는 높낮이를 통해 이뤄진다. 요즘은 그것이 아래로 내려가고 또 옆길로 새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세상이 옳은 길을 못 간다고 해서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궐기하고 옳지 않은 것을 시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우리 사회가 병이 든 것은 반드시 도널드 트럼프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매일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와 같은 작은 문제로부터 병이 시작된다고 봐야 한다.”

- 체중 늘리기가 쉬웠다고 했는데 줄이기는 어땠는지. “더 어렵고 재미도 덜했다. 입맛이 든 맛있는 것들을 더 이상 먹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젠 나이가 먹어 체중 줄이기에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비만한 몸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고 걱정하기까지 했다.”

- 마허샬라 알리와 호흡이 잘 맞았는지. “그는 참으로 멋진 훌륭한 사람이다. 그는 연기파이면서 매우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다. 그리고 신사다. 민감하고 지적이며 사려가 깊은 사람이다. 우린 아주 사이좋게 지냈고 또 함께 많이 웃었다. 우린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잘 돌아갔다. 그와 보낸 시간이 어찌나 즐거웠던지 촬영이 끝나는 것이 슬펐다. 그와 함께 이미 찍은 장면을 개선하겠다고 피터에게 말했지만 피터는 시간도 없고 돈도 떨어졌다면서 집에 가라고 하더라.”

- 이 역은 당신으로선 흔치 않은 코미디 역인데. “우스운 것은 근본적으로 진지하게 마련이다. 이 영화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즐기고 웃다 보면 진지한 점도 받아들이게 된다. 나도 연기를 하면서 그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 요즘 같은 분열의 시대에 예술인들은 세상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얘기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선 내가 알 수가 없다. 좋은 얘기들은 언제나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난 지금 우리가 극단적으로 바닥에 빠져 있다고 보진 않는다. 그러나 소통이 불편한 것만은 사실이다. 진보적인 아이디어가 발걸음을 주춤하고 있다. 차별과 편견이라는 것은 자생력을 지닌 교묘한 것이어서 제대로 이해하기도, 또 처리하기도 매우 힘들다. ‘깜XX’이라는 말을 안 쓰고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또 민권법이 있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요즘 시의에 잘 맞는 것이다. 남에게 관심을 갖고 무지를 극복하고 남을 이해하며, 첫인상을 초월해 자기와 다른 사람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야말로 비단 요즘만이 아니라 항상 필요한 얘기다. 민권법이 채택된 이래로 우리가 바라던 것만큼 개선되지 못한 것은 유감이나 그것은 인간의 근본 기질 탓이다. 삶의 한 부분이다.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은 최선을 다해 살라는 것이다. 마음 열기를 멈추는 순간 우리는 화석처럼 되고 만다. 이 영화가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여는 데 작은 기여를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 당신의 견해를 바꾸도록 한 사람들이라도 있는지. “내 견해를 바꾸도록 한 사람들은 한두 명이 아니다. 감독과 정치가들뿐만이 아니라 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내 견해를 바꾸도록 만들었다. 택시운전사와 슈퍼마켓과 우체국에서 함께 줄을 서 있던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그때까지 몰랐던 것을 깨달은 경우가 부지기수다. 당신이 어느 수준까지 원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매일 일어날 수 있다.”

박흥진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HFP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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