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때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photo 바이두
6·25전쟁 때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전선을 시찰하고 있다. ⓒphoto 바이두

기밀해제된 구(舊)소련 정부 문서에는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었던 김일성과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彭德懷) 간의 날카로운 대립도 담겨 있다. 1966년 작성된 해당 문서에는 “전쟁 기간에 김일성과 펑더화이를 수반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 사이에 날카로운 불화가 생겼다”며 “한번은 김일성이 펑더화이의 사령부로 이동했을 때, 중국 측 경비대는 김일성을 막아섰고 오랜 시간 동안 억류했다”고 적고 있다.

중국 경비대 김일성 억류

김일성은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6·25전쟁 도발 당사자였고, 펑더화이는 1950년 10월 25일 중공군이 참전한 후부터 정전협정 당일(1953년 7월 27일)까지 전쟁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때는 김일성(조선인민군 총사령관)과 펑더화이(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둘 다 자신의 친필서명을 정전협정문에 남겼다.

하지만 전쟁을 도발하고 실질적으로 주도해온 양자 간 불화는 그전에도 널리 회자돼 왔다. 중국에서는 “펑더화이가 김일성 뺨을 두 차례 때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왔다. 이 같은 감정싸움이 제3자라고 할 수 있는 소련 측 정부 문서를 통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실제로 해당 문서는 “펑더화이는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고, 이 같은 의견을 망설임 없이 표현하였다”며 “중국 지휘관들의 조선인에 대한 태도에서는 대국주의적 습성과 노골적인 경시까지 관찰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해당 내용이 들어간 문서를 발견한 표도르 째르치즈스키 국민대 선임연구원(한국명 이휘성)은 “중·소 분쟁 시절에 작성된 문서이고 보고를 받은 올렉 라흐마닌 소련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이 반마오(反毛)주의자였던 것을 감안하면 반중감정이 어느 정도 포함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문서는 마지막 결론에서 “요즘(1966년)도 중국 지도자들은 인민지원군이 조선전쟁(6·25)에 참가했던 사실을 이용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압박하고 북한을 자신들의 모험적인 입장에 지지하도록 동요시킨다”고 중국에 비판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문서가 작성된 1966년은 마오쩌둥이 극좌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시기다.

‘조선대백과’에서 사라진 펑더화이

소련 측이 지적한 이 같은 불화 때문인지, 북한 당국이 편찬한 공식 백과사전인 ‘조선대백과사전’에서도 ‘펑더화이(팽덕회)’라는 이름 자체가 통째로 빠져 있다는 것도 이번에 확인됐다. 펑더화이는 6·25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공을 세운 ‘10대 원수’(개국원수) 가운데 주더(朱德)에 이어 서열 2위로 꼽히는 장군이다.

중국에서는 소위 ‘항미원조전쟁’(6·25전쟁을 부르는 중국식 표현) 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군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맞붙어 전쟁을 원점으로 돌려놓은 맹장으로 추앙받지만, 1959년 ‘루산(慮山)회의’ 때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해 실각한 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조리돌림당하다가 1974년 사망했다.

펑더화이의 이름이 조선대백과에서 빠져 있는 것은 마오쩌둥, 주더,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은 물론이고 6·25 때 펑더화이 밑에서 근무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의 이름까지 나오는 것과 비교해도 분명 이례적이다. 펑더화이의 이름은 ‘조국해방전쟁(6·25전쟁)’ ‘중국인민지원군’ ‘정전협정’을 기술하는 대목에서도 통째로 빠져 있다. 되레 펑더화이의 맞수로 유엔군 총사령관을 지낸 맥아더는 ‘미국의 반동적 군인’이란 제목과 함께 “조선침략전쟁 시기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침략전쟁을 총지휘하였다”고 조선대백과에 기술돼 있다.

이번에 입수한 구소련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과 펑더화이 간의 불화는 1·4후퇴(1951년 1월 4일) 직후 38선 이남으로 추가 남진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펑더화이는 남진을 주저했지만 김일성은 추가 남진을 주장했었다. 해당 문서는 “중공군은 38선에서 전선을 유지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도부의 전략 노선에 따라 서울에서 북쪽으로 후퇴했다”며 “그들(중공군)은 동부전선에서도 미군이 점령한 38선 이북지역에서 미군을 몰아내기 위해 싸우는 조선군(북한)의 노력을 지원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이어 문건은 “조선인(북한)들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서울을 버린 것을 반대했고, 동부전선에서 조선 부대들을 지원하지 않았다고 책망했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수많은 조선인(북한)들은 조선인민군의 후퇴와 높은 사상자 수에 중국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봤다. 그들(북한)은 중국의 지원군이 한 달 전에 왔더라면 상황은 완전히 다를 수도 있었고, 1950~1951년 겨울 중국인민지원군의 성공적인 전진 당시에 미국인들을 조선반도에서 제거하고 나라를 통일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고 적고 있다.

이 같은 불화에는 중공군 참전 직후 전쟁의 주도권을 사실상 펑더화이에게 빼앗긴 김일성의 위기감도 한몫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 예가 문건에 등장하는 박일우에 관한 언급이다. 해당 문서는 “중국인들은 조선인민군 지휘관들과 밀착하려고 시도했다”며 “박일우라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조선인민군 대표단장의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썼다. 북한 정권 초대 내무상을 지낸 박일우는 옌안군정학교(교장 김두봉) 부교장 출신으로 친중공 계열 ‘옌안(延安)파’로 분류되는데, 소위 ‘중·조연합지휘부’ 내에서 북한 측 입장을 대변하는 부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이에 문건은 “김일성은 여러 차례 박일우가 마오쩌둥의 개인 대표자인 것처럼 활동해 조선노동당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자신을 당 위에 놓도록 시도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다”며 “중국인들도 박일우를 김일성의 반대(파)로 사용하며 다양한 술책을 일으켰다”고 기술했다. 1955년 숙청된 것으로 알려진 ‘박일우’ 역시 조선대백과에서는 이름이 통째로 빠진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째르치즈스키 연구원이 추가로 입수한 ‘소비에트 군대 총참모부 작전총국 총국장에게’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따르면, 펑더화이는 보급선이 길어질 것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추가 남진을 멈췄고, 압록강까지 전략적 후퇴도 고려했던 것으로 돼 있다. 1951년 6월 16일 작성된 이 문건은 고체르긴 소련군 소장(한국군의 준장에 해당)이 당시 소련군 총참모부 총작전국장(니콜라이 로모프)에게 보낸 것으로 “펑더화이는 한 번에 압록강까지 후퇴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보급로가 대단히 짧아질 것이므로 미군을 더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고 적고 있다.

심지어 당시 중국 측은 적어도 10년 정도는 전쟁을 이어갈 생각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문서는 “중국 동지들은 적군(유엔군)이 중공군의 후방에 상륙할까 걱정하고 있다. 그래서 바닷가에 대단히 큰 병력을 유지하고 남조선으로 진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들은 조선전쟁이 10년 동안 계속될 수도 있다고 한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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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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