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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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카드가 보인다. ‘생명과학부 안지훈 교수 Science에 논문 게재’라고 쓰여 있다. 그 밑에는 작은 글씨가 덧붙여 있다. ‘2013년에 이어 두 번째 쾌거!’. 사이언스(Science)는 최상위 과학학술지. 그런데 고려대학교 하나과학관 인근에 걸려 있는 사이언스 논문 게재 축하 플래카드는 하나가 아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니 모두 세 개다. 하나과학관 3층에 취재가 약속된 안지훈 교수 연구실이 있다.

지난 10월 13일에 만난 안지훈 교수는 식물학자다. 그는 ‘무엇을 연구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하더니 “대기온도 반응에 대한 개화, 그에 대한 생명체 반응을 연구한다”라고 말했다. 연구 분야가 식물학 책에 나오는 분류로 치면 어떻게 되는지를 다시 물었다. 그는 “고전적인 개념으로 분류하면 유전학자”라고 했다.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연구 키워드를 묻자 ‘대기온도 인지’ ‘개화’ ‘애기장대’, 꽃을 피게 하는 개화 호르몬인 ‘화성소(花成素· florigen)’와 같은 단어들을 얘기했다.

하지만 “나의 실험실(Lab)은 세계 최고를 지향한다. 남들 하는 정도로 해서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라는 그의 말은 명료했다. 축하 플래카드가 알려주듯 그는 사이언스에 지금까지 모두 세 개의 논문을 썼다. 그는 “지난 20년간 화성소라는 한 우물을 파고 있다”라며 연구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의 실험실은 세계 최고를 지향”

“식물은 환경에 따라 발달을 조절한다. 진화의 역사에서 동물은 ‘이동’을, 식물은 ‘유연성’을 얻었다. 동물은 달라진 환경이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곳을 떠나면 된다. 식물은 움직일 수 없다. 대신에 주위 환경 변화를 인지하는 능력을 발달시켰다. 가령 기온이 떨어지면 일시적으로 추운지, 겨울이 다가오는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식물은 환경 변화에 따라 발달을 조절할 수 있다. 처음에 정해진 일정대로 신체발달이 진행되는 동물과는 다르다. 사람은 날씨 등 환경 변화에 상관없이 2차 성징이 초등학교 고학년 때 정해진 대로 나타난다. 하지만 식물은 음지에 사느냐, 양지에 사느냐에 따라 꽃피우는 시기를 다르게 한다. 꽃피우기에 국한해서 보면 잎에 있는 센서가 대기온도를 감지한다. 그리고 꽃을 피울 온도가 되었다고 판단하면, 꽃이 필 위치에 있는 ‘줄기 정단(shoot apex)’에 그 신호를 보낸다. 이때 잎에서 줄기 정단으로 보내는 신호물질이 화성소다. 그러면 줄기 끝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

식물학자들은 오랫동안 화성소를 찾아왔다. 꽃을 피우는 식물, 즉 현화식물은 화성소를 갖고 있다. 그는 “현화식물은 식물 중에서 고등한 식물이다. 동물로 치면 진화의 역사에서 늦게 출현한 척추동물에 해당한다”라고 말했다. 미국계 러시아 식물학자 미하일 체일라칸(Mikhail Chailakhyan·1902~1991)이 1936년에 현화식물에는 꽃을 피우게 자극하는 호르몬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고, 미지 물질에 ‘플로리겐’, 즉 화성소라고 이름 붙인 것이 연구의 계기였다.

‘플로리겐’으로 밝혀질 물질을 처음으로 분리

안지훈 교수의 플로리겐 연구에서의 첫 주요 기여는 ‘플로리겐’으로 나중에 밝혀질 물질인 ‘FT(Flowering Locus T)’ 유전자를 처음으로 분리한 것이었다. 이 연구가 1999년 사이언스에 실린 첫 번째 논문이다. 논문은 그가 미국 샌디에이고 인근 라호야에 있는 ‘소크생물학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할 때 썼다. 연구실 책임자는 데틀레프 바이겔(Detlef Weigel). 이 논문에는 연구를 수행한 제1저자 이름이 셋이나 올라 있다. 바이겔 교수는 1994년부터 FT 유전자를 분리하고 그 정체를 알아내려고 박사후연구원 두 명을 투입했으나 연구가 지지부진했다. 그런데 서울대에서 박사학위(1997년)를 받고 1998년 랩에 합류해 세 번째로 투입된 안지훈 박사후연구원이 플로리겐으로서의 중요한 특성을 발견했다. 그래서 FT 관련 연구를 하다가 포기하고 떠난 전임자들과 함께 안 교수가 공동 제1저자로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소크연구소에 갔을 때는 외환위기 때라서 그의 연구 환경이 최악이었다. 한국연구재단은 환율이 올라서 당초 약속한 박사후연구원 연수 경비의 일부만 지원하겠다고 했다. 일단 미국 샌디에이고에 가기는 했지만 당초 얘기와는 달리 절반 정도에 불과한 돈을 확보했을 뿐이라는 그의 얘기를 들은 독일인 바이겔 교수는 상당히 불만족스러워했다. 안지훈 교수는 “그 시절 독일인이 쓰는 영어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이런저런 인종차별을 경험했다”라고 그때를 돌아보며 속쓰려 했다.

당시는 FT가 식물학자들이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플로리겐’이라는 건 몰랐다. 그랬기에 플로리겐을 찾기 위한 식물학자 간 경쟁은 계속됐다. 2005년 사이언스에 논문이 하나 나왔다. 플로리겐을 찾았다는 연구 결과였다. 안지훈 교수에 따르면, 당시 플로리겐의 정체를 놓고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mRNA(메신저 리보핵산) 아니면 단백질이었다. 잎에서 플로리겐이 mRNA 형태로 혹은 단백질 형태로 ‘줄기 정단’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추리였다. 2005년 사이언스 논문은 mRNA라고 주장했다. 플로리겐은 FT이고 FT는 mRNA 형태로 이동한다는 내용이었다.

플로리겐 이동 형태에 대한 논란

안지훈 교수는 2001년 귀국한 후 고려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있으면서도 플로리겐의 정체를 찾는 연구를 계속 했다. 그는 플로리겐의 이동 형태가 mRNA는 아닌 것 같다는 결과를 얻었다. 논문으로 쓸 정도의 충분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간 얻은 데이터를 보면 FT가 mRNA 형태로 이동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사이언스에 mRNA로 이동한다는 논문이 나와 버린 것이다. 이 결과를 반박을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논문을 낸 연구자는 우베 닐슨(Ove Nilsson)이라는 스웨덴인인데, 그는 소크연구소의 같은 실험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안지훈 교수는 “남이 된다고 하는 연구를 ‘내가 해보니 안 된다’라는 식으로 반박하는 논문을 쓰기는 힘들다.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플로리겐이라는 성배를 찾는 연구는 스웨덴 학자 닐슨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닐슨의 논문은 그해의 10대 과학적인 발견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2년 후 사이언스에 닐슨의 연구를 부정하는 논문이 실렸다. 독일 막스플랑크-식물재배연구소(쾰른 소재)의 조지 코플랜드(George Coupland) 그룹이 “플로리겐인 FT는 단백질 형태로 잎에서 줄기 정단으로 이동한다”라는 논문을 냈다. 결국 닐슨 그룹은 2005년에 발표했던 논문을 철회해야 했다. 2005년 논문의 제1저자는 중국인 다오 황(Tao Huang)이었다. 안지훈 교수에 따르면 논문을 철회할 경우 철회에 관련하여 논문을 써야 한다. 닐슨 그룹이 다오 황이 남긴 데이터를 갖고 실험을 다시 해보았으나, 당초 논문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철회 논문은 2005년에 발표한 결과를 재현할 수 없다고 썼다. 그러면 당초 연구를 한 제1저자는 어떤 책임을 지는지 궁금했다. “제1저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했을 때는 결과가 그렇게 나왔으니 철회에 동의할 수 없다”라고 주장한다고 안지훈 교수는 설명했다.

안지훈 교수가 기르는 유전자 돌연변이 식물들.
안지훈 교수가 기르는 유전자 돌연변이 식물들.

애기장대 개화 시기 조절 유전자를 밝히다

안지훈 교수가 아쉬워하는 건, 이 대목에서 자신이 과학사에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사이언스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라도 닐슨 교수의 논문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걸 남겼어야 했다. 강한 의심을 가졌음에도 고민만 하다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 결과, 내가 우베 닐슨 그룹의 논문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지 못하여 과학사에 기여를 하지 못한 게 되었다”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 안지훈 교수는 한국에서 뭘 했나? 그는 ‘플로리겐’의 정체를 파헤치는 연구는 접고, 플로리겐을 조절하는 상위 부분으로 연구 초점을 옮겨가서 애기장대의 개화 시기를 조절하는 유전자가 무엇인지를 연구했다. 그게 SVP 유전자라는 걸 알아냈고 2007년 학술지 ‘유전자와 발달(Genes and Development)’에 논문을 발표했다.(사이언스에 투고했으나 거절되었다.) 안지훈 교수는 “SVP를 발견한 이 연구는 식물의 대기온도 반응과 관련한 최초의 논문이다. 이 분야를 열어젖힘으로써 획기적인 기여(seminal contribution)를 했다고 학계에서 평가받고 있다”고 자랑했다. 논문 제목은 ‘SVP 유전자는 대기온도에 반응해서 애기장대의 개화를 조절한다’이다. 안지훈 교수가 논문 검색 사이트 구글스칼라를 열어 다른 연구자가 이 논문을 얼마나 인용하는지를 보여줬다. 피인용 횟수가 610회나 됐다. 매년 40회 정도 인용되고 있으니 대단한 피인용 횟수였다. 안지훈 교수의 당시 연구 이야기다.

“하나과학관으로 옮겨오기 전에는 고려대학교 ‘녹지캠퍼스’에 연구실이 있었다. 배양실은 건물 지하에 있었고. 당시만 해도 젊을 때이니 밤늦게까지 연구를 했다. 어느 날 밤 10시에 애기장대를 키우는 배양실에 가봤다. 16도라는 저온에서 애기장대를 키우는데, 한 돌연변이 애기장대가 꽃을 빨리 피운 걸 보았다. 추위를 못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른 애기장대는 저온에서 추우면 꽃피우는 시기를 늦춘다. 그래서 추위를 못 느끼게 하는 돌연변이가 무엇인지를 찾아 나섰다. SVP 유전자가 망가지면 추위를 못 느낀다는 걸 알아냈다. 식물은 추위가 오면 버티면서 온도가 올라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SVP 유전자가 잘 작동하는 애기장대는 날이 추우면 잎만 더 만들면서 따뜻해지기를 기다린다.”

그의 두 번째 사이언스 논문(2013년)은 ‘SVP-FLM-β’라는 단백질 복합체 발견이 핵심이다. 2007년에 발견한 SVP 단백질이 FLM-β 단백질과 만나 복합체(SVP-FLM-β)를 이룬다는 걸 알았다. 알고 보니 복합체는 플로리겐인 FT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억제 전사인자였다. 세포 내 핵 안으로 들어가 FT 유전자 인근에 결합해 그 유전자의 발현을 억제한다. 발현이 억제되면 세포는 관련 단백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안지훈 교수는 “SVP가 FLM-β을 끌고 와서 FT 발현을 조절한다는 걸 발견한 게 주요 내용”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SVP 단백질이 FLM-β와 복합체를 이루는데, 이게 고온과 저온에서 다르다. 저온에서는 복합체를 잘 만든다. FT 단백질을 못 만들게 발현을 억제해서 꽃을 피지 못하게 한다. 고온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복합체를 이뤄야 하는 SVP 단백질이 만들어지기는 하나 잘 분해되고, 또 FLM-β 단백질은 처음부터 적게 만들어진다.”

연구의 돌파구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생각의 전환이 어려웠다”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SVP나 FLM-β는 모두 저온에서 꽃이 피지 못하게 한다. 같은 일을 하는 유전자를 자연은 두 개나 만들지 않는다. 왜 애기장대는 저온에서 꽃이 피지 못하게 하는 유전자를 두 개나 갖고 있는 것일까 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유전자를 각각 망가트린 유전자변형 애기장대를 만들었다. 각각의 유전자가 망가진 애기장대가 꽃을 피우는 게 온도에 따라 어떻게 차이를 보이는지 확인했다. 두 단백질이 작동하는 온도 범위가 달랐다. SVP가 훨씬 넓은 범위(5~30도)에서 억제활동을 하고 있었고, FLM-β는 보다 좁은 영역(16~27도)에서 FT가 만들어지는 걸 막고 있었다. 알고 나면 어렵지 않은 일이었는데 수없이 많은 가능성 중에 그들이 담당하는 온도 영역이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은 전북대 교수로 일하는 당시 이정환 박사후연구원이 제1저자로 연구를 했다.

“식물 연구 인기가 없어 아쉬워”

식물 연구는 요즘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을까? 안지훈 교수는 “학생들이 식물 연구를 하면 기업에 취직이 잘 안된다고 생각한다”며 아쉬워했다. 안지훈 교수 실험실 인원을 보면 식물학 연구가 인기가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학원생은 3명이고, 박사후연구원은 8명이라고 했다. 대학원생 2명이 내년에 입학 예정이기는 하지만 대학원생이 적은 건 식물학을 공부하겠다는 새로운 사람이 별로 없다는 얘기다. 그 대신 박사 연구자가 많은 건, 식물학자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 젊은 연구자에게 안지훈 교수 연구가 인기 있다는 증거다. 안지훈 교수 실험실에서 연구하면 성과를 내어, 사이언스와 같은 좋은 학술지에 논문을 쓸 수 있고, 그러면 일터를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안지훈 교수의 세 번째 사이언스 논문은 지난 9월 3일에 나왔다. 안지훈 교수는 “FT가 세포 안에서 만들어져 어떻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최초로 밝힌 연구”라고 말했다. FT는 ‘체 요소(seive element)’라는 곳을 통해 이동한다. ‘체 요소’ 역시 세포로 만들어지나, 나중에 세포의 핵이 사라지고 양분 이동 통로로 사용된다. 이곳에서 FT가 만들어지면 편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체 요소’ 옆에 붙어 있던 세포, 즉 동반세포(companion cell)에서 FT가 만들어진다. FT는 동반세포에서 만들어진 뒤 세포막에 붙들려 있다. 이때 FT를 붙드는 건 PG라는 인지질이다. 기온이 올라가면 FT가 풀려난다. 안지훈 교수 그룹이 16도와 23도라는 두 조건에서 실험하니 23도에서 FT가 풀려났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체 요소’로 세포벽을 통해 이동했다.

그는 서울대 식물학과 84학번이다. 대학원 박사 지도교수는 이종섭 교수다. 이 교수는 1996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식물학 학술지 ‘플랜트 셀(The Plant Cell)’에 논문을 썼다. ‘플랜트 셀’이 식물학 분야의 최상위 학술지라고 했다. 이 논문이 갖는 의미는 대한민국 학술원에서 만든 책자 ‘한국의 학술연구’가 보여준다. 안지훈 교수가 책자 속 문장을 보여줬다. “한국 분자생물학의 괄목할 만한 발전은 먼저 식물분자생물학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96년 안(지훈) 등은 대두의 익스텐션(extension) 유전자의 발현 조절에 대한 연구 결과를 이 분야의 최고 권위지인 플랜트 셀에 발표함으로써 연구의 국제화 달성에 기여하였다.”

당시 연구에 대해 안지훈 교수는 “콩의 세포벽을 만드는 유전자를 찾았다”라고 말했다. 콩의 뿌리에서는 안쪽 깊숙한 곳에서 곁뿌리가 자라나온다. 이때 뿌리의 바깥쪽 세포는 상처를 입는다. 상처를 치유하는 일을 하는 것이 이 단백질(extension)이고, 단백질이 보이는 자리가 곁뿌리가 나올 곳이라는 알림 표지가 된다. 그는 1998년 4월 어느 날 오후 5시 소크연구소로 박사후연수 과정을 떠나는 비행기에 탔는데, 떠나는 날 낮 12시까지 이종섭 교수 실험실에서 일했다고 했다. 마무리 지어야 할 연구가 남아 있어서 최대한 일을 더 해놓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안지훈 교수는 겸손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최준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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