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 인근 한 콘퍼런스 빌딩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21일(현지시간) 뉴욕 유엔 총회장 인근 한 콘퍼런스 빌딩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 약식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아프레 무아, 르 델뤼주(Apres moi, le deluge).”

프랑스 문학이나 예술, 나아가 혁명사에 관심이 있다면 어디선가 접했을 말이다. 영어로 풀면 ‘내가 죽고 난 뒤에는 홍수(After me, the flood)’라는 의미다. 18세기 중엽 프랑스 루이 15세가 자식인 루이 16세에게 반복해서 들려줬던 말이었다고 한다. 원래 루이 15세의 애인이자 화류계를 주름잡던 마담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가 했던 말로,  본래 단수 ‘내(moi)’가 아니라 복수 ‘우리(nous)’가 원어였다고 한다.

이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느냐는 것은 프랑스 지성계의 오랜 숙제 중 하나다. 총론으로 보면 ‘방관, 체념’에 빠진 말로 해석된다. ‘내가 죽은 뒤 세상을 전부 휩쓸어갈 홍수가 오든 말든’이란 의미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하와이가 물에 잠기든, 핵폭탄이 터져 지구가 두 동강이 나든, 죽고 난 뒤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다. 프랑스 지성계에서는 염세적 세계관에 기초한 ‘자기 천동설’ 예언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세상을 지배 통치해온) 내가 죽으면 (홍수와 같은) 지구 종말에 직면할 것이다.’ 실제 루이 16세는 1793년 콩코르드광장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아버지의 말이 프랑스 왕가의 비극을 갈파한 예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말이 저주라는 해석도 있다. ‘내가 죽은 뒤 지구는 사라져야만 한다. 대홍수가 와서 프랑스를 전부 쓸어버려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내가 죽고 난 뒤 홍수’는 짙은 안갯속에 빠져든 한국 외교의 현주소를 보면서 떠올린 단상이다. ‘내가’의 주체는 문재인 정권, ‘홍수’는 막다른 골목에 접어든 한·일 외교의 오늘을 의미한다. 문 정권 때 시작된 위안부·징용 문제에 관한 법원의 판결 결과가 2022년 대일외교의 ‘근본적 장애’로 정착되고 있다. 예언일지 저주일지 모르겠지만 문 정권 퇴임과 함께 한·일 외교 전체가 대홍수에 떠내려가기 직전이다. 눈앞의 모든 것을 한순간 쓸어버리는 것이 홍수다. 광복 이후 어렵게 구축된 77년간의 한·일 우호관계가 한순간 땅바닥으로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위안부·징용 문제는 팬데믹 이후의 세계 평화와 경제를 다룬 최근 유엔총회 기간 중에도 논의됐다. 지난 9월 19일 한국의 박진 외무장관과 일본의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외상이 뉴욕에서 55분간 만나 한·일 갈등 해법 찾기에 나섰다고 한다. 새삼스럽게 위안부·징용 문제에 대한 도덕적, 역사적, 법률적 논의에 나설 생각은 없다. 민족, 자주, 주체에 기초한 반일논리로 보면 이른바 ‘죽창론’만이 답일 것이다. 그러나 글로벌 관점에서 보면 국내용 반일 만병통치약이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팬데믹 이후 지구촌의 현실이지만, 어제 아니 내일보다도 한층 중요한 것이 ‘지금 당장’이다. 배부른 한량들이나 ‘어제’에 빠질 뿐이다. 당장 먹고살 문제에서부터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지도 모를 핵무기 위협이 발등의 불이다.

잘못된 진단이길 바라지만, 두 나라 간의 갈등이 계속 이어질 경우 ‘한·일 디커플링’이 현실화될 수 있다. 현재 지구를 두 동강 내고 있는 미·중 디커플링에 준하는 모습이 한·일 두 나라 사이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문자적 의미지만 ‘디커플링=관계단절’이다. 미·중 디커플링은 경제·군사·외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미 부분적으로 시작됐지만, 인적 교류는 물론 심지어 문화도 디커플링의 대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할리우드에서 중국 관련 영화가 중단된 지 오래다. 한·일 디커플링은 어떨까? 국교 단절이나 상대가 완전 항복할 때까지 목을 조이는 식의 디커플링은 아닐 것이다. 평화와 웃음은 있지만 개인 차원의 교류들만 양국을 간신히 이어주는 위태로운 시간이 들이닥칠 수 있다. 정부나 공식적 차원의 대화가 사라진 ‘어정쩡한 관계’가 한·일 디커플링의 실체일 수 있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도중 한·일 정상회담이 반전을 거듭하다 ‘마침내’ 열렸다고 한다. 2년9개월 만에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와의 30분간 만남이 굳게 닫힌 한일 관계의 물꼬를 틀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한·일 관계의 앞길에는 정상 간의 30분간 만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암초 투성이다. 한국의 대통령실은 “두 정상은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법치 등 상호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양국이 국제사회와 함께 연대해 나가자는 데 공감하고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지만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등 양국 간 현안을 두고는 견해차가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통령실이 이번 회담 결과를 발표하면서 “현안을 해결해 양국 관계를 개선할 필요성에 공감했다”면서도 외교 당국 간 대화를 계속 협의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힌 것은 앞으로 넘어야 할 장애물이 남아있다는 방증이란 분석이 나온다.

민족, 자주, 주체에 입각한 반일논리의 연장선이지만, 왜 한국이 마치 구걸하듯 일본에 매달리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죽창론을 앞세워 ‘당당, 통 큰’이란 수식어를 쓰면서 윤석열 대통령을 비난, 비하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듯하다. 윤 대통령도 당당하고 통 큰 반일을 외치는 순간 지지율이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인기는 동네나 골목에서 통할 뿐이다. 21세기 한·일 관계는 과거 35년의 역사가 아니라, 글로벌 큰 그림 속에서 접근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왜 한·일 정상회담을 외교 현안으로 붙잡고 있는지에 대한 배경이자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크게 세 가지 관점의 전방위 시각이 필요하다.

지난 4월 13일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 등이 참가한 미국과 일본의 합동 군사훈련이 일본 근해에서 벌어지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4월 13일 에이브러햄 링컨 항공모함 등이 참가한 미국과 일본의 합동 군사훈련이 일본 근해에서 벌어지고 있다. photo 뉴시스

1. 한·일 수출입 불균형 심화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는 245억달러에 달했다. 대일 수출이 280억달러, 대일 수입이 525억달러였다. 2022년에도 약 300억달러 정도의 대일 무역적자가 예상된다. 2021년의 경우 대중 무역흑자가 242억달러, 대미 무역흑자가 226억달러에 달했다. 중국이나 미국에서 벌어들인 돈을 고스란히 일본에 바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목소리를 높여 ‘일제 보이콧’을 주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애국 이벤트는 되겠지만 ‘찻잔 속 태풍’에 그칠 뿐이다. 옷·음식·음료 같은 소비재가 아니라, 화학·기계·재료·부품 같은 산업제품이 일본에서 사오는 수입품의 주류이기 때문이다. 반일 보이콧 리스트에 올릴 만한 제품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반도체나 첨단제품을 만들기 위한 재료나 공장 설비 같은 것들이 일제 수입품의 주류다. 화학, 기계, 설비에 대한 일제 보이콧은 자살행위라 볼 수 있다. 한국이 자체 개발해서 세계 1위로 올려놓기까지는 일제 산업제품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은 기초과학이나 소재가 아닌, 조립과 같은 제조업에 특화한 나라다. 일제 산업제품 대체재가 한국에 없다. 다른 나라에 가도 비싸고 질적 수준도 떨어진다. 독자 개발에 나설 경우, 연구자금도 막대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반도체처럼, 조립에 기초한 제조업에 특화할수록 일제 의존도도 심해진다. 

한·일 수출입 불균형은 정치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다. 고유한 경쟁력에 기초한 특화산업의 분산과 협조를 통한 한·일 공존공영이 답이다. 한국은 인력 공간 에너지, 일본은 기술 특허 관련 노하우를 지원하면서 글로벌 시장에 공동참여할 수 있다. 이 경우 정치가 신호등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양국의 글로벌 경제에 관한 ‘윈윈(Win-Win)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정치적 조정이 없다면, 300억 아니 500억달러에 육박할 대일 무역적자 심화로 나갈 수밖에 없다.

10월 이후  본격화될 듯하지만, 일본이 문을 열면서 한국인들의 일본 관광 열기가 달아오를 것이다. 일본을 좋아해서만이 아니라, 일본 제품이 싸기 때문에 도쿄로 향할 것이다. 무역뿐만 아니라 관광수지 적자도 급증할 수밖에 없다. ‘돈’은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갈등해결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다. 한·일 관계가 어긋나고 닫힐수록 일본이 아니라 한국에 ‘절대’ 불리하다. 

 

2. 글로벌 차원의 지정학적 변화

군사안보 차원의 관점이지만, 한국의 글로벌 위상 약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의 약화가 아니라 일본의 위상 강화가 배경에 있다. 지난 9월 14일 미·일 국방장관이 워싱턴에서 만났다. 중국을 염두에 둔 미·일 동맹 강화가 주목적이지만, 일본이 추진하는 1000기의 미사일 개발이 한층 더 관심을 끌었다. 사정거리 1000㎞ 이상의 일제 고성능 미사일 개발과 배치에 대한 미국의 전폭적 지지가 공표됐다. 행간을 읽어야 이해할 부분으로 크게 두 가지 사안이 떠오른다. 

첫째 사정거리 ‘1000㎞ 이상’이란 점이다. 1000㎞가 아니라, 1000㎞ 이상의 미사일이다. 중국은 물론 대만, 북한, 한국도 사정거리에 두는 미사일이다. 극단적 해석이지만, 미국을 사정거리로 두지 않는 미사일이라면 전부 가능하다.

둘째는 미국이 단행한 2019년 중거리 핵전력 폐지조약(INF)에 대한 보완책으로서의 일제 미사일이다. INF 조약의 결과지만, 현재 미국에는 사정거리 500~5500㎞의 지상배치 미사일이 없다. 일본 미사일 개발과 배치가 미국의 약점을 보완할 대체 무기란 것이 너무도 명확하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미사일 개발은 북한을 타깃으로 할 뿐이다. 미국이 사사건건 개입하는 것도 물론이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동아시아 전체의 안보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일본은 중국, 나아가 러시아를 염두에 둔 글로벌 군사전략을 통해 미국과의 안보 일체화에 매진하고 있다. 한·일 간 의사소통이 막힌 상태에서 ‘일본=동아시아 안보 총사령부’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한반도 문제라 해도 중국을 시야에 둔 일본이 앞장서서 대응해 나가는 추세다. 현재 일본은 ‘한국=미국과 동맹국인 나라’라는 식의 제3자적 입장으로 대하고 있다. 일본의 직접 상대로서의 한국이 아니라, 미국의 동맹이란 이유에서 한국을 상대하고 있다. 한국보다 베트남·필리핀·인도네시아·인도 같은 중국 주변 해양세력들과의 관계증진을 한층 중요하게 본다. 갈등 해소는 한·일 두 나라만이 아닌, 군사 안보 차원의 대미 관계를 강화할 전제조건이라 볼 수 있다.

 

3. 대일 단기채무의 인화성   

9월 이후 한국 외환시장이 불안하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과 달러 유동성이 대폭 축소되면서 외환위기 가능성이 언급되고 있다. 일본은 물론 미국과의 통화스와프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한국 신문 사설에 등장하는 판이다. 정부는 외환보유액이 ‘무려’ 4364억달러(9월 5일 기준)에 달한다면서 ‘쓸데없는’ 우려라는 식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 갖고 있는 대외채무를 고려하면 ‘쓸데 있는’ 우려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6월 말 기준으로 무려 6620억달러의 대외부채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 3월의 6540억달러보다 늘어난 액수로, 9월 말에는 더 증가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저런 수식어로 피해가고 있지만, 개발도상국에서의 국가부도나 외환위기 뉴스가 터지는 순간, 그 여파가 서울로 튈 것이다.

외환시장 동요와 윤 대통령의 한·일 외교가 무슨 관계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아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한국이 갖고 있는 대외채무의 상당액이 일본발(發)이기 때문이다. 특히 단기채무의 경우 일본 자본이 압도적이다. 올해 6월 기준으로 한국의 1년 내 단기외채 규모는 1838억달러에 달한다. 전체 외채 6620억달러의 30%, 외환보유액 4364억달러의 41.9%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만약’이지만, 일본이 단기외채 연장을 거부하고 신규 외채 공급도 중단할 경우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가 재현될 전망이다. 일본은 정경분리 정책에 익숙한 나라다. 한·일 관계가 갈등으로 치닫는다고 해도 ‘돈의 영역’까지 건드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2022년은 다르다. 일본 경제 자체가 엔저(円低)로 고생하고 있고, 미국발 경제추락이 ‘장기간’ 세계로 확산할 것이란 전망이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내일의 경제상황이 불투명해지면서 수익보다 안전 위주 정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 세계 최고의 투자규모를 자랑하는 나라다. 약 3조달러의 대외 투자 덕분에 1년에 벌어들이는 금융 수익만도 최하 2000억달러에 달한다. 오해하기 쉬운데, 일본은 무역국가가 아니라 금융국가로 변신한 상태다. 무역 적자가 아무리 늘어난다 해도 미국, 유럽에 뿌린 3조달러 투자를 통해 보충해낼 수 있다. 급추락 엔저라고 하지만 복원력이 강하다. 그러나 투자규모가 3조달러에 달한다고 해서 무조건 돈을 뿌리지는 않는다. 경제동물답게 조금만 틈이 보여도 대출 연장이나 신규 대출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정경분리 정책에 익숙한 일본이라지만, 미·중 디커플링 심화와 함께 일본의 자세는 급변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제재에 맞춰, 일본의 대중 수출금지 품목들이 거의 매일 추가되고 있다. 윤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한·일 갈등 해결은 위안부·징용 이슈를 넘어선 제2차 외환위기의 방지라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위안부·징용에 관한 한국 측의 결자해지가 없는 한 일본이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한·일 관계 대홍수의 근원은 현 정권과 무관하다. 홍수에 맞서 지금 당장 반일로 나설 경우, 윤 대통령도 지지율이 오르면서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뜰 수 있다. 지난 5년간 보여준 내로남불 정권보다 한층 더 박수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일 디커플링의 피해와 그 홍수의 여파는 전부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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