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한 공업사에서 작업자가 일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서울 시내 한 공업사에서 작업자가 일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지원책은 잘 없다. 자동차 부품업체들 중에 전기차 부품 만드는 곳은 지원이 많은 것 같은데 우리처럼 내연기관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곳은 정부 지원 덕을 본다는 곳이 없다. 이러다 진짜 문 닫을 판이다.”

업력 15년의 경남 창원시 한 자동차 부품업체의 대표는 “자금난이 정말 심각하다”고 말했다. 최근 추가 대출 문의를 하기 위해 거래은행 영업지점을 찾았는데 6개월 전만 해도 3%대였던 금리가 지금은 7%대까지 올랐다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내가 생각하는 이자 마지노선은 3%였는데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올라갔다. 이미 차입금이 25억원 정도 있고 상환 부담이 커서 공장을 옮길까도 생각했는데 지금의 공장을 매입하겠다는 곳도 없다. 이번에 가니 담보 대출도 안 된다고 했다.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충남의 한 지자체에서는 공사 발주 프로젝트들이 ‘터지는’ 사례 때문에 담당자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자체 관계자는 “경기가 안 좋다 안 좋다 해도 어떻게든 자금을 조달해서 진행해왔던 업체들이 요즘은 진짜 위기인 것 같다. 진행하다가 엎어지는 게 여러 건이다. 예전 같으면 발주 기업을 상대로 난리쳤지만 그분들도 지금은 죽고 사는 문제니까 우리 컴플레인이 신경이나 쓰이겠나 싶더라”고 말했다.

 지금처럼 힘든 시기는 과거에도 있었다. 미국발 금융위기로 휘청대던 2008년은 그런 점에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는 때다. 현재와 닮은 점이 많아서다. 환율의 변동성, 집값의 하락, 주가의 폭락, 채권시장의 경색 등 2008년은 마치 2023년의 데자뷔 같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이 핵심 키워드로 떠오른 때가 2008년이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관계자는 “IMF 때는 대기업부터 연쇄도산해서 문제였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한계기업들의 붕괴가 우려됐기 때문에 구조조정이란 단어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라고 기억했다.

한계기업 정리가 어려운 이유

연구자들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한계기업은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을 이자 비용으로 나눈 비율)이 3년 연속 1 미만인 곳을 말한다. 영업으로 벌어들인 이익으로 대출 이자조차 갚지 못하는 상태가 3년 이상 지속된 기업으로 이해하면 쉽다. 3년이란 기간을 둔 건 대외의존도가 높고 경기 순환형 기업의 비중이 큰 우리 산업 구조 때문이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한계기업을 보통 ‘좀비기업(Zombie Firms)’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강시기업’이라고 한다. ‘좀비’든 ‘강시’든 거의 시체 상태지만 죽은 상태로 겨우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같다. 이처럼 한계기업 중 상당수는 죽은 상태로 겨우겨우 영위해가는 곳들이다. 물론 좀비 취급에서 탈출해 다시 생명을 얻는 기업도 있기 마련이다.

생각 같아서는 확 정리하면 그만일 것 같지만 막상 한계기업은 ‘계륵’ 같은 존재다. 한계기업 중 상당수는 중소기업이고, 이들을 마냥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나라 사업체 중 99%가 중소기업이고 10명 중 8명이 이곳에서 일한다. 게다가 일자리 문제는 정부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실직 이후의 삶을 정부가 감당할 순 없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그랬다. 한계기업 구조조정을 해결하겠다는 메시지를 정부는 계속 내보냈다.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기업들 옥석을 가리겠다. 생존 가능 기업에는 유동성을 지원하되 한계기업은 퇴출을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과연 그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착착 진행됐을까.

앞선 이명박 정부 청와대 관계자의 이야기다. “가계 파산은 빚 있는 가정이 무너지지만 기업 파산은 빚 없는 가정도 무너지게 한다. 구조조정을 한다면 실직 이후의 플랜B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준비가 미흡했다. 이건 어느 정부나 마찬가지다. 정부나 정책금융기관에서는 고용이 붕괴된 뒤 생길 지역 경제 파장 등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정치적 후과도 염려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정권이든 금융권을 불쏘시개로 활용해 고용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유혹을 떨쳐낼 수 없다. 우리 때도 은행에서 불만이 많았다. 여신 강화하고 유동성을 적절한 곳에 공급하라고 했다가 중소기업 연쇄부도 나지 않게 대출 내주라고 하기도 했다. 정반대의 메시지가 나오니 볼멘소리 하는 거였다. 이런 혼선 때문에 노무현 정부 때도 한계기업은 늘었고 이명박 정부 때도 그랬고. 한계기업이 줄어들 수가 없었다.”

한계기업에 대한 정리는 이런 흐름 속에서 지지부진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지금의 한계기업은 얼마나 될까. 통계치는 조사기관마다 다르다. 기준이 저마다 달라서다. 그래도 공통점이 있다. 적어도 줄어든 역사는 없다. 그리고 이 문제를 경제주체들이 심각하게 바라본다는 증거는 쏟아지는 보고서가 증명하고 있다.

2022년 6월 20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2022년 6월 20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은행장 간담회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쏟아지는 ‘한계기업’ 관련 보고서

한국은행은 2021년 말 기준 국내 외부감사 의무 대상 기업(2만4005개) 중 한계기업 비중이 14.9%라고 발표했다. 2008~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증가한 숫자다. 2022년 전망치는 더 올라간다. 2022년 한계기업 비중이 18.6%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게 한은의 예측이다. 최근 1년 동안 기업대출 증가세가 이어지고, 국내 기준금리가 3.0% 정도까지 오르고 환율 및 원자재가격 때문에 단위 영업비용이 1% 추가로 증가하는 상황을 가정했을 경우이긴 하지만 한은의 추정대로 된다면 지금까지 집계한 데이터 중 가장 큰 규모로 한계기업이 존재하는 셈이다.

2022년 예상되는 한계기업의 차입금도 그 기업체 수에 비해 많다. 분석대상 기업의 총차입금에서 한계기업 차입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9.5%가 될 것으로 한은은 추정했다. 2021년과 비교하면 한계기업의 숫자는 3.7%포인트 늘었고 한계기업의 차입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4.7%포인트 증가한다고 한은은 본다.

기업 구조조정은 산업은행이 중심이 된다. 산업은행 KDB 미래전략연구소는 한은보다 한계기업의 비중을 더 높게 본다. 지난해 7월 이 연구소는 ‘한계기업 현황과 시사점’이란 보고서를 냈다. 2011~2021년 10년에 걸친 한계기업 조사 결과를 담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말 기준 한계기업은 조사 대상 2만4515곳 중 4478곳인데 2011년 1353곳과 비교하면 무려 3125곳이 늘었다. 2011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한계기업은 매년 증가했는데 2016년(2165곳)부터 2021년까지, 불과 5년 사이에 두 배 정도 급증했다. 특히 한계기업을 벗어나지 못하는, 정말 ‘좀비’ 같은 기업이 적지 않다는 점도 밝혀냈다. 조사기간 중 5년 이상 한계기업을 벗어나지 못했던 곳은 1762곳(7.19%)이었다. 조사기간 전체에 해당하는 10년간 한계기업을 전전하며 벗어나지 못한 곳도 120곳(0.49%)이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도 지난해 9월 ‘기업구조조정 제도 개선방안’ 보고서를 냈다. 2017〜2021년 외부감사에 의한 법률을 적용받는 비금융기업 2만2388개사를 분석해보니 2021년 기준 한계기업은 2823개였다. 코로나19가 유행하기 이전인 2019년(2283개)보다 23.7% 증가한 숫자다. 2823개의 한계기업에 종사하는 종업원 수는 31만명이 넘는다. 종업원 숫자도 2019년보다 26.7% 많다.

한계기업 리스트에 오른 중견·대기업은 2019년 389개였지만 2021년 449개로 15.4%가 늘었다. 특히 중소기업은 1891개에서 2372개로 25.4% 증가했다. 중소기업에서 더 큰 비율로 한계기업이 생겼다.

상장기업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경련 보고서는 한국·미국·일본·홍콩 증시 상장기업 중 한계기업 비중을 비교했다. 한국의 경우 전체 상장기업 대비 한계기업 비중이 17.1%로 홍콩증권거래소(28.9%)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2017년 대비 증가폭에서도 홍콩에 이어 두 번째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정문 의원이 금융감독원에서 받은 자료도 비슷한 흐름을 보여준다. 2021년 2052개 상장기업 중 한계기업의 비중은 14.8%(304개)였는데 2017년(12.6%)보다 2.2%포인트 증가했다. 2021년만 놓고 볼 때 이들 한계기업의 영업이익률은 -8.4%로 상장기업 평균(8.4%)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줬다.

비율도, 증가폭도 너무 큰 기업부채

한계기업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는 모든 나라의 고민거리고 그 해결책도 평행선을 달리기 일쑤다. 대체로 ‘일단은 살려서 가자’는 방향이 많다. 실업자 문제도 걸리고, 그로 인해 생길 부정적 평가를 감당하고 가는 것보다는 연명할 정도의 지원을 해주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판단을 내려서다. 다만 기업의 생산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곳에 자원을 배분해서 생기는 왜곡이 옳은 것인가라는 의문은 매번 제기돼 왔다. 앞서 전경련 보고서를 의뢰받았던 김윤경 인천대 교수는 “기업 구조조정의 속도를 높이고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도록 구조조정 제도를 설계해야 하며 기존 법제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업역동성 제고를 위한 한계기업 구조개혁 필요성’이라는 보고서에서 2001~2019년 동안 외부감사 대상 비금융업종 9만9667개를 대상으로 한계기업이 유발하는 혼잡효과를 분석했다.

그는 보고서를 통해 한계상황에 직면한 기업 비중 증가가 기업 부문 전반에 걸쳐 고용과 설비투자를 위축시킨다고 결론 내렸다. 이 연구위원은 “만성적 한계기업이 산업 내 한정된 희소자원을 과다 점유하는 건 정상기업의 인적·물적 자원 활용에 제약요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결론의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우리는 가계부채만큼이나 기업부채 문제를 껴안고 있다. 그동안 가계부채 문제는 매번 경고를 받았지만 기업부채라고 상황이 좋은 게 아니다. 한국은행이 미국처럼 금리를 빠르게 올리지 못한 이유로 일각에서는 기업부채의 위험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올 정도다.

한국 기업들의 빚 증가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경고는 국제금융협회(IIF)의 세계 부채 보고서가 이미 했다. 지난해 2분기 기준 한국 비금융기업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은 117.9%였다. 비교 대상 35개국 중 홍콩(279.8%), 싱가포르(161.9%), 중국(157.1%)에 이어 네 번째로 높다.

문제는 속도다. 그 직전 1분기 때는 116.8%로 7위였는데 불과 석 달 만에 세 계단을 뛰어올랐다.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국내 기업의 부채비율은 6.2%포인트가 증가했는데 베트남(7.3%포인트 증가)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증가폭이다.

실제로 기업들의 금융권 대출은 2022년 빠르게 늘었다. 채권시장 경색 여파로 자금조달이 여의치 않자 은행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2022년 말 기준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기업대출 잔액은 703조7268억원으로 2021년 말보다 10.7%(67조8390억원) 증가했다. 게다가 상황여건은 나빠졌다. 대출은 늘었는데 금리까지 올랐다. 2021년 말 3.14%였던 은행권 평균 기업대출 금리(신규취급액 기준)는 지난해 6월까지는 3%대를 유지했지만 이후 급등해 11월 5.67%까지 올랐다.

 

IMF 때보다 현재의 신용갭 더 높아

민간 부채 증가의 위험을 보여주는 신용갭(Credit-to-GDP gap)은 이미 한국의 이런 위험을 오래전부터 경고해오던 지표다. 신용갭은 GDP 대비 가계부채와 기업부채를 합한 민간부채의 비율이다. 2%포인트 미만이면 ‘보통’, 2~10%포인트면 ‘주의’, 10%포인트를 넘어가면 ‘경보’ 단계로 분류된다. 민간부채의 증가 속도가 빠를수록 신용갭은 커진다. 신용갭이 높을 경우 반드시 경제위기가 오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위기는 신용갭이 두 자릿수일 때 찾아왔다.

국제결제은행(BIS)의 신용갭 조사 최신판은 2022년 2분기 기준이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신용갭은 15.6%로 집계됐다. 조사 대상 43개국 중 3위다. 일본(24.3%포인트)과 태국(16.5%포인트)이 우리보다 높았을 뿐이다.

2020년만 해도 우리보다 신용갭이 높은 나라들이 꽤 있었다. 일본·태국뿐 아니라 캐나다·프랑스·홍콩·노르웨이·싱가포르 등이 우리보다 민간부채 비율이 높았지만 이들 국가들은 지난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부채 관리를 열심히 해오며 우리보다 건전한 자리에 위치했다.

특히 우리의 문제는 신용갭 10%라는 ‘경보’ 단계가 2020년 2분기 이후 2년째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때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불었을 때 기록했던 신용갭이 13.2%라는 점을 고려할 때 15.6%라는 수치가 갖는 무서움을 알 수 있다.

현 정부가 기업부채 관리에 칼을 빼들지는 알 수 없다. 한국은행장, 산업은행장, 금융위원장 등은 모두 “한계기업의 정리가 필요하다”고 보는 쪽이다. 반면 시장에서는 “여전히 메시지가 혼란스럽다”는 의견이 있다. 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우리도 다 알고 있으니 일단 기다려 달라는 이야기만 들린다”고 말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정부의 타이밍 실기(失期)로 선제 대응을 하지 못한 해운업은 2017년 한진해운이 문을 닫으며 비극적 시나리오를 써야 했다. 해운 유통망이 붕괴되고 2019년 이후 해운업이 다시 호황기를 맞이했을 때 부족한 선복량을 메우지 못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물류 비용이 증가했던 사례가 있다. 부채 관리의 당위와 실업 안정망 부실이라는 현실적 과제가 서로 충돌하겠지만 그래도 구조조정의 ‘오너십’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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