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이다. 1956년 1월 경북 영주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음력으로 11월생이어서 학교를 1955년생들과 다녔다. 돌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어머니 등에 업혀 서울로 왔고, 오전과 오후반이 엇갈리던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녔다. 물건은 귀했고 먹을거리는 별로 없었다. 환경조사서의 ‘텔레비전’ 칸에 체크한 학생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고, ‘자가용’ 칸에 체크한 학생은 한 명도 없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사십수년이 흘렀다. 그 판잣집 소년은 한국의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진단하는 중견 사회학자가 되었다. 나는 사회학자로서 1970년대의 시대적 의미를 묻는 과정에서 많은 베이비부머들을 만났고 깊은 연대감을 느꼈다. 둘러보니 도처에서 그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베이비부머는 고단하고 서글픈 삶을 살았다. 그들의 삶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나는 베이비부머를 ‘가교세대’로 이름 붙였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의 모든 부양책임을 짊어지면서도 농업 세대와 IT 세대의 소통의 다리를 놓았고, 근대와 현대의 가교를 놓았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는 베이비부머의 운명이 되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한강의 기적’은 베이비부머가 일등공신이다. 1인당 국민소득 50달러 시대에 태어나 2만달러에 이르는 현기증 나는 거리(距離)를 숨가쁘게 달려온 베이비부머 세대는 최빈국이던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리고 이제 현장에서 물러나는 중이다. 확실히 베이비부머들은 이 나라의 경제 성장에 헌신했고 그 결과 한국 경제를 반석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베이비부머들은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인생과 인간다운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젊은 세대에게 “우리를 닮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면 보답이 온다는 것만 믿고 자신과 가족만 챙기며 앞만 보고 달렸다.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 사회를 위해서는 별로 한 일이 없다. 재산 축적하느라 사회적 공공재를 마련하는 데 소홀했다. “경제 성장은 했지만 당신들 몫으로 다 가져갔지, 무엇을 남겼느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그 세대적 직무유기는 젊은 세대로부터 엄중한 성토문을 통보받아야 마땅하다. 빈약한 복지제도가 그렇고, 젊은 세대의 사회적 진입비용을 한없이 올려놓은 것이 그렇다.

나에게 묻는다. 나는 시민인가. 시민이란 국가의 불합리한 통제와 개입을 물리치고 천부인권을 부여받은 존재로, 도덕과 공익에 의거하여 자율적으로 통치해 나가는 주체다. 돌이켜보면 우리 세대는 시민의식을 배우지 못했다. 내가 학창 시절을 지나 사회인이 됐던 1987년까지 시민성에 관한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시민의식은 교육의 소재가 아니었다. 이웃과 지내는 방법, 사회적 약자 보호, 불평등 완화, 사회정의, 공익을 위한 자발적 행동규범,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깨우치기 전까지 사회가 부여하는 윤리적 긴장은 충효사상으로 변색된 국가이데올로기 외에는 없었다. 가정과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행동규칙 내지 공적 가치관은 고도성장사회에서 세속적 성공이었지, 남과 더불어 사는 윤리, 도덕 같은 것이 없었다.

서양의 경우는 시민과 시민사회가 충분히 성숙한 후 국민국가가 들어서고 격해진 국제경쟁 속에서 제국주의로 전환하는 궤적을 그린다. 이 과정에서 시민은 국가권력에 저항과 타협을 동시에 구사하는 존재다. 계급이익을 극대화하고 때로는 민족주의에 동원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베이비붐 세대는 상상적 시민이 동굴을 빠져나온 상태에서 전쟁을 맞았고,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에 급급했던 시민과 시민사회가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5·16 군사정변을 겪었다. 군사정권은 한국의 국가주의였다. 시민의식이 성장할 수 있는 인큐베이터는 또 다른 결빙 상태를 맞은 것이다.

나는 그런 결빙 상태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60년대가 그랬다. 4·19혁명은 그런 소시민에게 희망의 환풍구를 뚫어준 계기였다. 1958년에서 1960년 사이에 소시민의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일어났고 시민의식에 능동적 변화의 기운이 감지됐다. 그러나 그것도 5·16군사정변과 함께 묻혔다.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도 채 안 되었던 시대, 향촌의 농민들이 도시 산업지역으로 몰려가 1세대 임금노동자가 되던 시절이었다. 당시 도시민들은 소시민이었다. 소시민들의 지상 최대의 과제는 빈곤 탈출, 시민의식보다 빈곤을 면하는 것, 작은 임금이라도 받을 일자리가 급선무였다.

1970년대 중반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 비로소 시민의식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감을 잡을 수 있었는데, 정치환경은 그것의 실현을 용납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국민을 통했고, 국민으로 모아졌다. 국민총화, 국민단결, 국민체조…. 건장한 인력은 수출 전선에 동원됐다. 국부는 역사상 최고로 올라갔다. 군부 통치는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다.

경제 기적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시민의식을 소홀히 했다. 서양에서 거의 100여년이 걸렸던 시민사회 형성의 경험지층을 빼먹은 것이다. 아니 건너뛴 것이다. 나는 가부장질서의 장남답게 중요한 결정을 혼자 감당했고, 실행했다. 하지만 가족을 지키는 용감한 전사였지, 시민성과는 무관했다.

시민성의 요체는 양보와 합의였다. 2005년경인가. 독일에서 만난 어떤 시민은 증세정책에 기꺼이 동의했다. 단 실직자가 빈둥대지 않고 경제전선에 나서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말이다. 2014년 한국에서는 연평균 10만원 증세정책에 온 직장인이 들고일어났다. 독일 노동조합 지도자는 파업에 반대했다. 시민여론이 나빠진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에서는 최고 임금을 받는 기업 노동자들이 자주 파업에 돌입했는데 주로 임금인상이 목표였다. 여론은 아랑곳하지 않는 게 한국 노조의 철칙이다.

아파트에 인생을 저당 잡힌 세대

베이비부머들은 한국 사회를 휩쓴 아파트 광기에 인생을 저당 잡힌 사람들이다. 나도 아파트에 미쳤었다. 이사 경력이 고스란히 기록된 나의 주민등록초본에는 스무 번에 달하는 주소지 이전 경력이 빼곡하다. 1981년 신접살림을 차린 서울 서대문구 모래내의 산등성이에서 시작해 2006년 서초동 현재의 집에 안착할 때까지 스무 번을 옮겼다. 전세를 끼고 서울에 아파트를 구입했다. 은행 대출을 다시 감행했고 우리 가족은 전세금이 싼 일산으로 일단 옮겼다.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나폴레옹의 군대처럼, 서울로 가는 길은 멀었다. 네 번의 겨울을 지낸 2006년, 드디어 서울 시민이 됐다. 그것도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서초동 주민이 됐다. 대출과 마이너스통장 규모는 천문학적으로 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집은 그 이후로 가격변동이 거의 없다. 사회물정 모르는 내 탓이 크다. 큰딸 진학을 계기로 서울로 이사를 감행하자 빚은 마치 성장판이 내장된 양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래도 월급의 힘과 매문(賣文)에 의한 약간의 부수입으로 하우스푸어가 되지는 않았다.

베이비부머에겐 정말 나쁜 버릇이 있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겠다면서도 자식들에겐 다 해줘야 한다는 무모한 의무감 말이다. 청춘의 모든 것을 바쳐 아파트 한 채를 겨우 장만해 놓고 그걸 어떻게든 쪼개 자식들에게 줄 궁리를 한다. 교육도 그렇고 결혼도 그렇다. 베이비부머들은 대체로 혼자 해결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농촌에 거주하는 초로의 부모가 땅 팔고 소 팔아 학비 대는 풍습이야 한국의 못 말리는 미덕이라 해도, 아예 기둥뿌리 뽑아 교육시키고 결혼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무의식적 각오는 베이비부머들이 창안한 새로운 풍습이다.

중산층의 기준을 측정하는 연구에서 한국은 자동차와 아파트, 두 개만을 든 반면 프랑스는 외국어와 샹송, 미국은 오페라와 재즈, 여행 같은 문화적 자산을 첨가했다. 한국의 중산층은 문화적 자산과 교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물질적 존재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공익, 시민윤리, 양보와 타협 같은 고급 정신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한국은 제3의 변혁을 이뤄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위기에 취약한 경제구조가 그렇고 자발성이 결핍된 사회조직 원리가 그렇다. 국민은 있으나 시민이 없다. 시민성이 취약한 상태로는 선진국이 될 수 없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성인남녀가 각종 단체에 가입하는 참여하는 비율은 60% 정도인데 이 중 순수한 시민단체 참여율은 10%를 밑돌았다. 단적으로 말해 거의 시민활동을 안 한다는 얘기다. 종친회, 종교단체, 동향회, 동호회가 대다수다. 이 경우 시민의식, 공익의식은 발아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증상이 심각하다.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동안 사회는 후진적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는 얘기다. 어느 사회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영국 대학생의 70퍼센트가 시민단체에 가입했고, 성인의 80%가 주민운동이나 시민단체에 가입해 있다. 나도 얼마 전 한 시민단체를 후원·관리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조금 늦기는 했으나 열심히 해볼 요량이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ㆍ‘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 ‘나는 시민인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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