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남강호 조선일보 기자
ⓒphoto 남강호 조선일보 기자

보름달이 둥실 떠오른 추석날, 영화 ‘베테랑’은 1300만 고지에 올라섰고, 유아인은 최고 흥행 배우가 되었다. 그의 또 다른 영화 ‘사도’도 420만을 넘어 순항 중이다. 확실히 ‘아인 시대’다. 한 배우의 다른 영화가 동시에 극장 상영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서로가 흥행 견인차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베테랑’을 본 관객들은 ‘사도’의 유아인을 만나러 발길을 옮겼고, ‘사도’를 먼저 본 관객들은 ‘베테랑’의 유아인이 궁금했다.

유아인의 무엇이 사람을 움직이나

‘베테랑’(2015)의 그는 재력가의 아들이었다. 자본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신자본주의, 그 막장으로 치닫는 폭주 기관차에 올라탄 비극적 존재 조태오. 갑질의 최고봉을 보여줌으로써 악(惡)의 민낯을 뻔뻔히 드러낸 그곳에 유아인이 있었다. 데뷔 이후 첫 악역이었다는 그에게서 선함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말 안 듣는 악동과는 급이 달랐다. 악랄하고 극악무도했다. 냉혈한 그 자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렇게 길러졌기에 자신이 괴물임을 알지 못하는 조태오를 그만큼 연기할 또래의 배우는 없다.

‘사도’(2015)의 그는 권력가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영조는 왕이었고, 어머니 영빈 이씨는 후궁이었다. 후사를 생산하지 못한 정비(正妃)들 덕분에 그는 영조의 뒤를 이을 세자가 되었다. 완벽한 왕이 되고자 했던 아버지와, 세자가 아닌 아들이고 싶었던 사도. 아버지의 기대는 높았고, 사도의 생각은 달랐다.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야”라는 모진 말을 들으면서도 그 안에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있을 거라 믿었다. 사도세자였던 유아인은 “부모 스스로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키우려는 욕심, 그것이 비극의 시작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광기 어린 악의 모든 것을 보여준 행동적 ‘베테랑’의 그는 ‘사도’에선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완벽하게 미쳐가는 사유적 존재가 되었다. 악하지 않고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지금’을 그는 대변하고 있었다. 갇힌 세상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한 그는 부패와 물신(物神)과 비열함의 질긴 악순환, 잊혀지면 그만인 기성세대의 무책임에 대해 저항했다.

유아인의 데뷔작은, 아마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성장 드라마-반올림’(KBS·2003)이었다. 설익은 사색의 내음을 품고 있는 미대 지망 고등학생, 아직 알에서 깨어나지 않은 소년이었다. 막 시작한 풋사랑은 설익은 사과처럼 시큼한 맛만 떨굴 뿐, 달콤함이 번지지 않았다. “누가 누굴 좋아한다는 건 살짝 미친 것이거나, 마법 아니면 최면에 걸린 거나 마찬가지야. 그만큼 강력하지만 깨지기 쉽다는 거지. 사소한 것에.”

첫사랑의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그의 대사는 싱그러웠다. 시작하는 배우, 딱 그만큼이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우린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연예계에선 배우들의 명멸(明滅)이 일상이었기에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홀연히 그가 나타났다. 저예산 영화 ‘좋지 아니한가’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2007년 3월과 5월 연이어 개봉하였으니 보이지 않는 동안 그는 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그로 하여금 배우로 살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한 작품이다. 그는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했고, 학교는 나를 괴롭히는 악당들로 가득했다”며 학교를 자퇴한 종대가 되었다. 도박에 미쳐 집을 나간 아버지와 종교에 빠진 엄마, 그런 그에겐 부모도 다르고 좋아하는 스타일도 다르지만 끝까지 자기편인 기수라는 동네 형이 있었다. 총 한 자루만 있으면 악당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은 종대는 총을 갖기 위해 세차 일을 했고, 기수는 몰디브 해안에서 드럼을 연주하기 위해 대리운전을 했다. 현실은 잔인했다. 어렵게 모은 총 살 돈을 눈앞에서 사기당하고, 그는 꿈을 잃어버렸다. 그가 소망했던 것은 하나, 훌륭한 소년이 되는 것이었다. 가장 먼 미래가 ‘내일’일 수밖에 없는 청춘들의 암울한 ‘오늘’, 뒷골목 어딘가에 쓰러져 아파 죽을 것 같다며 울부짖는 종대는 자신의 인생이 세차장에서 끝날까봐 두려웠다. 종대도 아프고, 유아인도 아프고, 그걸 보는 청춘들도 아팠다.

‘대중성’과 ‘주제성’ 사이에서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 그 길을 찾는 그의 행보는 분주했다. ‘최강칠우’(KBS·2008)에서는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무륜당(無倫堂) 일원이 되어 자객으로 산 흑산이었다. ‘결혼 못하는 남자’(KBS·2009)에서는 자유분방한 연애주의자 현규였다. 영화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에서는 곱상한 외모나 달콤한 미소와는 달리 거친 성격을 갖고 있는 전직 복서이자 현직 주방보조인 기범이었고, 영화 ‘하늘과 바다’(2009)에서는 사건·사고를 몰고 다니는 마음 닫힌 피자배달부 진구였다. 연기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들어있는 다른 자신을 꺼내는 것, 그는 또 다른 유아인을 찾고 있었다.

드디어 ‘성균관 스캔들’(KBS·2010).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희망 없는 조선을 바꿔보고자 했던 걸오(桀驁) 문재신이 된 유아인. 머리는 산발이었고, 옷매무새는 단정치 않았다. 심심하면 술을 마셨고, 나무 위에 껄렁하게 올라 앉아 세상을 조롱했다. 문무(文武) 재능을 겸비한 성균관 유생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것은 반항뿐이었다. 결국 자기 방식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그는 홍벽서가 된다.

유아인은 “21세기 엄홍식(유아인의 본명)은 18세기 홍벽서”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기성세대는 걸오와 같은 청춘들을 향해 아직 세상물정 몰라 그렇다고 하지만, 그는 “모르니까, 그러니까 청춘이지 않은가”라고 항변한다. 부당한 모든 것들에 대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수 용기, 끊임없이 아니라고 말할 때 내일은 오늘과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 그것이 바로 걸오식 청춘이었다. 유아인은 그런 걸오와 하나가 되고 싶었다. ‘걸오앓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유아인은 배우가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작품 속 인물 안에 녹여내야 하는지, ‘대중성’과 ‘주제성’은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게 된 듯했다.

01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와 연기 중인 유아인. 02 영화 ‘베테랑’에서 유해진과 호흡을 맞춘 유아인. 03 영화 ‘사도’에서 세자로 열연하는 유아인.
01 드라마 ‘밀회’에서 김희애와 연기 중인 유아인. 02 영화 ‘베테랑’에서 유해진과 호흡을 맞춘 유아인. 03 영화 ‘사도’에서 세자로 열연하는 유아인.

변신은 배우의 힘

길을 찾는 자는 거침없었다. 영화 ‘완득이’(2011)에서 그는 완벽하게 불쌍한 도완득이었다. 장애인 아버지, 필리핀 어머니, 마음 터놓을 친구도 없었다. 자신의 삶은 다닥다닥 붙은 변두리 다가구촌 옥탑방 신세였다. 그렇게 답답한 세상이 불만이었다. “얌마 완득아, 얌마 완득아” 담임선생 동주는 완득이에게 ‘내일’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계속 그를 불렀다. “선생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 진짜” 두 손 주머니에 찔러 넣고 인상 찌푸릴 때, 더 이상 유아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지는 배우다. ‘완득이’ 다음 작인 ‘깡철이’(2013)에서도 그는 가진 건 없고 책임져야 할 가족만 있는 부산 사나이 강철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만성신부전증, 당뇨, 심혈관질환, 게다가 치매까지 걸린 엄마는 수술을 해야만 살 수 있었다. 부둣가에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딱 한 번, 엄마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악의 세계가 내민 손을 잡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배우 유아인의 길은 소외되어 외로운 자,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자, 선함과 정의를 찾는 자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패션왕’(SBS·2012)과 ‘장옥정, 사랑에 살다’(SBS·2013)를 거쳐 그는 자신을 배우 유아인으로 완벽하게 각인시킨 작품을 만난다. ‘밀회’(jtbc·2014). 20년 차이 나는 연상연하 커플의 농염한 멜로드라마이고, 상대역이 김희애라는 것 때문에 그는 화제의 중심에 섰다. 유아인과 김희애는 앞서 영화 ‘우아한 거짓말’(2014)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정확하게 5:5로 머리를 가른 긴 장발에 옷은 헐렁하고 말투 또한 요상한 옆집 남자 추상박, 누구나 경계하지만 경계를 허물고 나면 누구보다 진솔한 인물이었는데 그리 주목받진 못했다.

자신이 어떤 배우가 되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실천해 가는 그에게 ‘밀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퀵서비스 배달원, 넉넉하지 못한 생활, 고3인 채로 스무 살이 되어버린 선재라는 인물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과 맥을 같이하는 인물이었다. 선재에겐 천재적 피아노 실력이 있었고, 이것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인 오혜원과의 연결고리였다.

‘밀회’는 배우들에게 섬세한 감정 표현을 쉼 없이 요구했다. 온 세상을 붉게 타오르게 한 연정(戀情)과 부정할 수 없는 푸른 슬픔을 품은 선재를 유아인은 흔들리는 눈빛과 떨리는 목소리, 몰아치는 숨으로 표현했다. 누추한 자신의 방을 찾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정성스레 방바닥을 걸레질하는 것이었고, 배고픈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라면 한 그릇이었다. 그녀를 향한 진실한 사랑은 더 없이 순수했지만, 오롯이 함께할 수 없음에 억누를 수 없는 질투와 분노가 그를 날뛰게 했다. 선재의 사랑은 탐욕에 젖어 자신의 삶을 괴멸시키고 있는 혜원의 영혼을 구원했다.

연기자로서 분명한 나아감을 보여준 ‘밀회’를 끝내며 그는 SNS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선재’를 연기하며 아주 솔직한 굴곡의 거울이 되고 뒤틀리지 않은 통로가 되어 시청자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배우로서 일하며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불륜은 파국을 맞았고, 사랑은 꽃을 피웠고, 혜원은 이제서야 두 다리 쭉 뻗고 잠이 들었습니다. 선재의 마지막 대사 ‘다녀올게요’를 최고의 해피엔딩이라 생각하고 연기했습니다.”

그다운 소감이었다. 그는 ‘남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유아인답다’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밀회’가 끝나기 전에 ‘베테랑’ 촬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촬영 현장에서 선재와 혜원의 최후에 대해 궁금해 하는 대중들을 보며 그는 선재에서 태오로 변신했다. 배우에게 있어 변신은 살아가는 힘이다. 스스로를 부정하며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했던 그는 어떤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1986년 대구에서 났다. 미술을 공부하던 한 소년이 배우가 되었다. 자신이 그리는 세상을 위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보았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었고, 남들과 달라 보이고 싶었던 10대, 대구에 살던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드라마를 찍었고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았다. 노래를 잘하진 못했지만 가수 연습생 시절도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으면 열정은 식어버리고, 꿈은 길을 잃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는 비상(飛上)하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온 그가 데뷔 10년이 되어갈 즈음부터 내로라하는 대선배들과의 연기에서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완득이’의 김윤석, ‘깡철이’의 김해숙, ‘밀회’의 김희애, ‘베테랑’의 황정민, ‘사도’의 송강호까지. 자신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에 그는 오만하리만큼 집중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신념은 태양과 같아서 신념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을 땐 세상이 두렵지 않았고, 그 신념이 흔들릴 땐 길어진 두려움의 꼬리를 잘라야 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데 주저함 없는 그의 SNS 활동이 요즘 뜸해졌다. 스스로 자신을 이슈메이커라 하는 그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고 했다. 그냥 연기만 하면 되는 배우가 아니라 대중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배우이기에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시대를 대변하고 싶다고 했다. 이립(而立)의 유아인, 생각은 깊어지고, 행동은 묵직해졌음이 분명하다. “자신이 욕망하고, 가진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노예로 만들 것인지,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 것인지.”

그의 화두는 멈추지 않고 있다. 10월부터는 ‘육룡이 나르샤’(SBS)를 통해 이방원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조선이 문을 열던 때 이방원은 스물다섯이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그 청춘을 유아인은 어떻게 그려 나갈까. 얼마나 유아인답게 만들어갈까.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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