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최초로 8000m급 14좌에 도전한 오은선 대장이 지난 4월, 14좌의 마지막인 안나푸르나(8091m) 1차 도전을 위해 캠프 2로 향하는 모습. ⓒphoto 블랙야크
여성 최초로 8000m급 14좌에 도전한 오은선 대장이 지난 4월, 14좌의 마지막인 안나푸르나(8091m) 1차 도전을 위해 캠프 2로 향하는 모습. ⓒphoto 블랙야크

지난 4월 KBS 생중계를 통해 보여진 여성 산악인 오은선의 안나푸르나(8091m) 등반은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더욱이 안나푸르나 등정은 여성 세계 최초의 히말라야 8000m급 14개 고봉(이하 14좌) 등정 레이스를 마무리짓는 쾌거였기에 산악인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이란 데 대한 자긍심까지 얹어 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해 말 기자회견을 겸한 보고회를 통해 해명에 나섰던 칸첸중가(8586m) 등정 의혹이 14좌 완등 공포(公布) 이후 날이 갈수록 커져가면서 그 빛이 퇴색해 가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지난 8월 21일 SBS는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정상의 증거는 신(神)만이 아는가 - 오은선 칸첸중가 등정의 진실’ 편에서 등정 길에 동행한 셰르파들의 엇갈린 증언과, 등정 사진을 찍은 장소가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 외에 오은선이 등정 길에 분실했다고 밝힌 수원대 깃발이 등정사진 속에 엿보인다는 등 새로운 의혹을 제기해 칸첸중가 등정에 대한 의혹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여성 첫 14좌 완등’ 타이틀에 대한 열망

1999년 5월 히말라야 칸첸중가를 등반 중인 박영석 대장.
1999년 5월 히말라야 칸첸중가를 등반 중인 박영석 대장.

동서 약 2500㎞ 길이로 뻗어 있는 히말라야산맥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서 시샤팡마(8027m)에 이르기까지 14개의 8000m급 고봉이 있다. 이 14좌를 모두 오른 산악인은 1986년 완등한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를 처음으로 지난 봄 스페인 여성산악인 에두르네 파사반에 이르기까지 22명에 이른다. 그중 20명이 남자 산악인이고, 여자 산악인은 오은선과 에두르네 파사반 두 명뿐이다. 여기에 한국산악인은 4명이나 포함된다. 2000년 엄홍길을 처음으로 2001년 박영석, 2003년 한왕용이 등극한 데 이어 지난 4월 26일 오은선이 21번째이자 여성 최초의 완등을 공포했다.

14좌 완등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특히 뜨거운 것이 사실이지만 외국이라고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세계적으로 관심이 대단하다. 전문 등반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던 외국의 유명 신문이나 저널에서도 오은선의 14좌 완등을 높이 사주었고, 이후 칸첸중가 등정 의혹에 관해서도 수시로 기사화하는 것을 보면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엄홍길이나 박영석 등의 14좌 완등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일본 미디어에서도 오은선의 14좌 완등과 등정 시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상황이다.

오은선과 막판까지 치열하게 경쟁을 펼치던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 역시 그간 히말라야 등반을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으며 진행해왔다. 지난 봄 시샤팡마(8027m) 등정으로 14좌 완등을 마무리지은 이후 모국에서 영웅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사반은, 최근 한국 산악계를 대표하는 대한산악연맹에서 그간 칸첸중가를 등정한 한국 산악인 7명의 의견을 모아 ‘오은선씨가 지금까지 공개한 칸첸중가 등정 자료를 심도있게 검토한 결과 정상등정이라 보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하자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최초의 여성으로 인정받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14좌 완등’이란 타이틀에 대한 열망은 이처럼 뜨거운 것이다.

히말라야 고봉 등정에 대한 인증은 통상 봉우리가 속한 나라의 관광성이나 그 나라 정부가 인정하는 산악단체에서 해준다. 이때 동행한 정부 연락관이나 함께 등정한 셰르파의 증언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정상에 섰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사진이 가장 중요한 증거물로 제시된다. 간혹 짙은 안개 등으로 주변을 확인하기 어려울 때는 등정자가 가져간 장비나 마스코트 같은 것을 눈 속에 묻어두기도 한다.

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추적장치인 GPS로 자신의 등반루트를 측정하고 정상 좌표를 찍으면 해결될 일이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영하 20~ 30℃라는 극한 상황에서 기기를 밖으로 노출시킬 경우 배터리가 짧은 시간에 방전된다는 점과, 정상에 다다를 즈음 거의 탈진상태에서 동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장갑을 벗어 이 기기를 작동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게 경험자들의 말이다.

오은선의 칸첸중가 등정 의혹은 이런 면에서 무엇보다 정확한 등정 사진을 제시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다. 게다가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편에서 오은선의 등정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밝힘으로써 일반인들까지도 의혹을 갖는 상황에 이르렀다. ‘무상(無償)의 행위’라 하여 다른 스포츠에 비해 더욱 감동을 사왔고 순수성을 인정받아온 게 고산 등반이기에 대중의 눈은 따가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혹, 의혹… 오래된 등정 시비

베이스캠프에서 올려다본 히말라야 칸첸중가봉.
베이스캠프에서 올려다본 히말라야 칸첸중가봉.

사실 히말라야 등정 시비는 오랜 세월 한국 산악계에 파문을 일으켜온 일이다. 1962년 경희대산악회의 다울라기리2봉(7751m) 원정으로 시작한 우리의 히말라야 원정은 그간 뛰어난 기록을 세우기도 했지만, 등정을 발표한 후 의혹이 제기된 등반도 여럿 있다. 그 첫 번째는 1970년 봄 등반에 나선 추렌히말 원정이었다.

당시 한국산악회 원정대가 발표한 추렌히말 최고봉인 동봉(7371m) 등정은 한국 최초의 7000m 고봉 등정이자 세계 초등으로 기록되면서 산악인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해 가을 같은 루트를 등반하다 루트를 변경해 중앙봉과 서봉을 등정한 일본 산악인들이 “등반로상의 어려움 때문에 동봉 등정은 믿을 수 없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 의혹은 18년 뒤인 1978년 한국의 중동산악회 팀이 풀어주었다. 한국산악회의 등반로인 동릉으로 등반한 중동 팀은 1㎞에 이르는 막판 칼날 설릉이 추락 위험성 때문에 등반이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고 루트를 서릉으로 변경, 정상에 올라선 뒤 한국산악회 팀이 올랐다고 주장하는 봉우리는 동봉 아래의 무명봉일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1984년에는 은벽산악회의 여성 대원이 안나푸르나 동계 초등에 성공,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이 등반은 여성 최초이자 동계 최초의 등정이었다. 그러나 이 등반은 여성 산악인과 정상까지 동행한 셰르파 4명 중 2명이 추락사할 때 카메라를 분실하면서 등정 의혹을 사기 시작했다. 귀국 후 네팔 히말라야 기록 담당자인 엘리자베스 홀리씨가 의문을 제기했고, 원정대가 의혹을 풀어줄 만한 증거나 답변을 내놓지 않은 채 시간을 끌다가 3년 뒤인 1987년 2월 2일 라인홀트 메스너에 이어 두 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가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라섬으로써 세계 최초의 동계 등정 타이틀은 물론 여성 최초의 등정 타이틀도 잃게 되었다.

이 외에도 1988년 악우회 원정대의 브로드피크(8047m) 등정은 중앙봉(8030m) 등정으로 같은 시즌 등반한 일본 팀에 의해 밝혀지고, 1989년 가을 대구경북연맹의 초오유(8201m) 등정은 정확한 사진을 제시하지 못해 등정 시비에 시달려오다가 6년이 지난 1995년 말 등정자 중 한 대원이 정상에서 약 1시간 못 미친 설원에서 등정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고 자백함으로써 등정 시비가 마무리되었다.

다른 등반팀이 의혹 풀어주기도

오은선씨가  2009년 5월 6일 칸첸중가 정상에서 찍었다며 공개한 사진.
오은선씨가 2009년 5월 6일 칸첸중가 정상에서 찍었다며 공개한 사진.

이밖에 1989년 전국합동대의 에베레스트 서릉 원정, 1991년 한국·홍콩 합동대의 낭가파르바트(8125m) 원정은 등정 발표 직후부터 산악계의 의혹을 받아오다 거의 미등으로 단정지어진 등반이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등정 시비는 2007년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 실버원정이었다. 당시 원정대는 2명이 정상에 올랐다 발표했으나 1년이 지난 뒤 대원 한 명은 정상에서 한참 떨어진 지점에서 뒤돌아선 것으로 확인되었다.

등정 시비는 유명 산악인들에게도 있었다. 한국 최초의 14개 완등자로 일컬어지는 엄홍길은 1993년과 1994년 시샤팡마 주봉(8027m)과 중앙봉(8008m)을 올랐다고 발표했으나 두 차례 모두 중앙봉 등정으로 기록되고 있다. 엄홍길은 2000년 K2 원정을 앞두고 대원의 증언을 통해 등정의혹을 풀려고 했으나 해외의 히말라야 관련 웹사이트에는 그가 14좌 완등을 공포한 이듬해인 2001년 시도한 시샤팡마 등반을 주봉 등정으로 기록하고 있다. 박영석도 로체(8516m)를 1997년과 2001년 두 차례 등반해야 했다. 1997년 첫 번째 등반에서 발가락 동상으로 정상 약 50m 아래 지점에서 포기했던 박영석은 이후 등정 의혹에 시달려오다가 사실을 시인하고 2001년 봄 재등반에 나서 정상에 올라섰다.

이러한 등정 시비가 우리 산악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1883년 칸첸중가 산군의 미등봉에 도전한 영국 산악인과 스위스 가이드는 해발 7300m급의 카브루(Kabru)를 초등했다고 발표했으나 후에 카브루 남동쪽의 위성봉을 오른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슬로베니아의 세계적인 고산거벽등반가인 토모 체센은 1989년 자누 북벽과 1990년 로체 남벽을 신루트로 등정했다고 발표했으나 뒤이어 등반한 타 원정대들이 등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등의 이유로 의혹을 제기했고, 이 문제로 오랜 세월 시달린 토모 체센은 끝내 고산등반계를 떠나고 말았다.

다른 원정대에 의해 등정 의혹이 풀린 경우도 있었다. 1953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동등반대의 헤르만 불(Hermann Buhl)은 낭가파르바트를 홀로 등정했으나 독일 측으로부터 의혹을 받았다. 이 등정 의혹은 1999년 일본 원정대가 불이 등정할 당시 정상에 꽂아 두었던 피켈을 발견함으로써 해결되었다. 1982년 한국산악회 마칼루 원정대의 허영호 대원은 마칼루 등정에 성공한 다음 눈에 묻혀있다 모습을 드러낸 무당벌레 인형을 들고 내려옴으로써 예지 쿠쿠츠카의 등정시비를 말끔히 해결해주었다. 쿠쿠츠카는 한 해 전인 1981년 마칼루 정상에 올라섰으나 악천후로 등정 사진을 촬영하지 못한 채 하산, 등정 의혹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등정 의혹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대상 산이나 루트에 대한 정확한 사전 정보를 구하지 못한 채 등반에 나서기 때문인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국내의 유명 등반가 중에서도 자신이 등반한 루트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 게 현실이다.

상황이 나빠질 경우 셰르파들이 적당한 장소에서 “이쯤에서 등정사진을 찍고 내려가자”고 유혹하거나 혹은 주변이 분간되지 않는 악천후에서 탈진 상태의 등반가에게 “여기가 정상이다”고 못을 박아 하산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여기에 어렵게 도와준 후원자들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거짓 등정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과정은 전혀 고려치 않고 ‘성공’만을 가장 큰 가치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도 원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게 산악인들의 생각이다.

오은선을 믿는다… 다시 칸첸중가에 올라라

히말라야 등반이 일부 전문 산악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시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막을 내렸다. 상업등반대의 출현으로 조직력을 갖추지 못한 산악인들은 물론 아마추어 등산인들도 8000m 고봉에 도전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봄 시즌이면 200명 안팎의 등정자가 나오는 에베레스트(8848m)의 경우 2만5000달러만 내면 셰르파들이 업어서라도 정상에 올려준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세계 최고봉에 대한 신비감은 사라지고 말았다. 더욱이 상업등반대 대원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악천후 속에서 목숨을 잃거나 혹은 비열한 리더나 셰르파들에게 버림받고 죽음의 지대에 버려지는 황당한 일까지 일어나면서 에베레스트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악의 현장으로 추락한 상황이다.

그렇다고 이런 단면만 놓고 히말라야 등반을 가치 없는 행위라고 폄하할 수는 없다. 에베레스트 외에 초오유(8201m·제6위 고봉·네팔-티베트), 가셔브룸2봉(8035m·제13위 고봉·파키스탄)과 고산은 등반시즌이면 많은 원정대가 몰려들고 있지만 다른 고봉들은 여전히 소수 팀이 베이스캠프를 찾고 있다. 그렇게 소수 팀의 산악인들이 동행을 하더라도 평지에 비해 산소 함유량이 30% 이하로 떨어지고, 영하 30℃ 이하로 내려가는가 하면 언제 폭풍설이 몰아칠지 모르는 8000m 고봉을 오른다는 것은 죽음의 지대로 뛰어드는 일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그런 고봉 14개 완등에 도전한다는 것은 등반가 자신의 인생을 건 모험적인 행위인 것이다.

오은선의 등정 시비는 이제 본인 외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오은선을 아끼는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회자되고 있다.

“오은선을 믿는다. 다만 정확한 등정 사진이 없다는 게 답답할 뿐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올랐느니 못 올랐느니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다시 한번 칸첸중가를 등반해 산악인의 도전 정신을 구현해주기를 바란다.”

한편 1977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를 이끌고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도전, 한국 최초의 등정을 이끌어낸 김영도 대장은 오은선의 등정 의혹에 대해 최근 이렇게 정리했다.

“오은선의 히말라야 오딧세이는 순수한 개인의 문제다. 등산가로 자기의 이상이며 인생의 과정이다. 그가 여성으로 누구보다 앞서 그 8000m 고소, ‘죽음의 지대’를 14회나 체험했다는 것은 놀라운 이야기며 높이 평가할 만하다. ‘죽음의 지대’가 어떤 곳인가는 가본 사람 아니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우리는 오은선의 문제를 시시비비하기보다는, 세계 250년 등산의 역사 속에서 뒤늦게 출발한 우리 한국이, 고미영과 오은선이라는 뛰어난 여성 등반가를 일약 세계 무대에 내세우게 된 우리 사회와 나라의 모습을, 그러나 아직 갈길이 멀다는 인식을 새로이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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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필석 월간산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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