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유성구 진잠향교에서 열린 여름방학 교실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이 훈장의 지도에 따라 사자소학을 읽고 있다. ⓒ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대전 유성구 진잠향교에서 열린 여름방학 교실에 참가한 초등학생들이 훈장의 지도에 따라 사자소학을 읽고 있다. ⓒphoto 신현종 조선일보 기자

지난 1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대형서점은 방학을 맞아 방문한 학생들로 붐볐다. 베스트셀러가 진열된 메인코너를 지나 ‘어린이 학습’ 코너로 가보았다. 어린이 학습 코너에는 각 과목별로 책들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수학, 과학 등의 학습과목보다 더 많은 학부모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다. 바로 ‘漢字’ 학습교재가 꽂혀 있는 책장 앞이었다. 진열된 책들은 ‘맨 처음 한자’ ‘어린이 한자’ ‘초등한자 따라 쓰기’ 등 제목은 달랐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학부모들은 100여종류에 달하는 한자교재 가운데 몇 권을 책장에서 꺼내 꼼꼼하게 살펴봤다. 이날 여기서 만난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국·영·수 교재와 함께 한자 교재도 구매를 했다. 초등학생 3학년 아들을 키우는 이은혜씨의 말이다. “요즘 국영수와 같은 중요과목은 기본이고, 한자를 따로 가르치는 초등학생 부모들이 많다. 한자는 어휘력을 높여주고, 우리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낮은 급수의 한자검정시험을 보게 할 생각이다.”

초등학생들은 학부모와 달리 학습교재보단 학습만화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초등학생들이 집어든 책 역시 ‘한자’를 주제로 만든 ‘마법천자문’이란 학습만화였다. 마법천자문은 2003년에 출간돼 지금까지 2000만부가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다. 이 책은 비닐로 포장이 돼서 내용을 볼 수 없다. 책의 표지에 적힌 ‘한자가 저절로 기억되는 이미지 학습만화’라는 설명이 눈에 띄었다. 책에는 한자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카드’가 부록으로 달려 있었다. 한자의 음과 뜻을 쓰고 말하는 게임을 위해 사용되는 카드였다. 초등학교 2학년 윤자인양은 “요즘 친구들 사이에서 마법천자문 카드를 이용해 한자의 음과 뜻을 말하는 게임이 유행”이라면서 “엄마가 다른 책은 안 사줘도 한자 관련 만화책은 사주신다”고 말했다. 윤양은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천자문’ 책을 들고 부모에게 부리나케 달려갔다.

“한자 사교육을 공교육으로 잡아야”

최근 교육부의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을 두고 논란이 뜨겁다. 지난 1월 10일 한 언론이 ‘교육부 한자 병기 정책 폐기’를 보도한 것이 발단이었다. 교육부가 2019년 초등 5·6학년 교과서 300자 표기를 백지화하고, 정책의 폐기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논란은 2014년 9월부터 시작됐다. 당시 교육부는 ‘2015 개정교육과정 총론’에 초등학교에 적정한 한자 수를 제시하고 교과서에 한자 병기의 확대를 검토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교과서 본문에 한자 병기는 하지 않고, 교과서 여백에 별도로 학습에 도움되는 용어의 음과 뜻을 풀어쓰는 방식이다. 가령, 과학교과서 본문에 ‘태양’이라는 용어가 나오면, 페이지 하단에 ‘태양(太陽): (太·클 태) (陽·볕 양)’이라고 알려주는 식이다. 이 정책에 일부 교육단체들이 반기를 들면서 정책에 대한 찬반논란이 일기 시작했다. 결국 2015년 9월 교육부는 한자 병기 확대 정책에 대한 논의를 2016년 말로 연기했다. 2016년 12월 교육부는 “초등학교 수준에 맞는 한자 300자를 선별해 국어를 제외한 5·6학년 모든 교과서에 2019년부터 적용한다”고 최종 발표했다. 그런데 이미 결정된 초등 한자 표기 정책을 올해 교육부가 은근슬쩍 폐기하면서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즉각 해명에 나섰다. “시민단체, 광화문1번가, 국민신문고 등 다양한 의견을 수렴했으며, 현장 적합성 검토 결과 현행 ‘편찬상의 유의점’의 한자 병기 기준을 유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현행 편찬상의 유의점은 ‘의미의 정확한 전달을 위하여 교육 목적상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한자나 외국 문자를 병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교육부는 현재 초등교과서에 표기된 한자보다 더 많은 한자가 표기될 경우 관련 사교육이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교육부가 한자 사교육시장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이 논의되기 수년 전부터 이미 한자 사교육은 계속 이뤄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교육부가 ‘한자 병기 정책’을 논의하기 한참 전인 2008년 한국어문회 주관 한자능력검정시험에 응시한 초등학생은 37만명이다. 당시 초등학생(367만명)의 10%에 달하는 수치다.

사교육에만 맡겨진 한자 교육을 공교육에서 전면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지도 오래됐다. 2010년 교육과정평가원이 학부모와 교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자. 학부모의 89.1%, 교사의 77.3%가 초등학생 한자 교육에 찬성했다. 초등학생 한자 교육에 찬성하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2014년 갤럽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도 결과는 비슷했다. 갤럽의 ‘2018년 초등교과서 한자 병용안’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다. 초등교과서 한자 병용안에 대해 ‘찬성’ 67%, ‘반대’ 29%, ‘유보’ 3%였다.

이명학 성균관대 교수가 18대 국회의원 299명을 상대로 ‘초등학교 한자교육 시행에 관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사결과에 따르면 ‘초등학교에서 한자교육을 해야 하는가’ 질문에 145명(90.1%)이 ‘그렇다’, 16명(9.9%)이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한자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33.2%가 ‘어휘력 신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답해 가장 많았다. 18대 국회의원 10명 중 9명이 초등학교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고 답한 것이다.

한자 사교육시장도 성장 추세다. 한자는 다른 과목과는 달리 학원보다는 ‘학습지’나 ‘문제집’을 이용해 가정에서 교육하는 경우가 많다. 한자 학습지를 주력사업으로 내세운 장원교육의 매출액은 2014년 409억원, 2015년 401억원, 2016년 417억원이다. 서울 중랑구에서 보습학원을 운영하는 한 원장의 말이다.

“주력 과목은 수학과 영어이지만, 국어시간에 한자를 함께 가르쳐달라는 학부모들이 늘고 있다. 특히 방학이면 한자급수를 따려는 초등학생들이 증가해 어쩔 수 없이 한자 비중을 많이 늘리고 있다. 일반학원도 한자시험 대비반을 따로 개설할 정도로 한자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보면 된다.”

기자가 만난 학원장과 학부모들의 생각은 비슷했다.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은 한자 사교육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을 바라보는 정부와 학부모 간의 생각의 차이는 컸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정책이 ‘사교육 억제’를 목표로 하고 있어서다. 교육부가 사교육 확대를 막겠다고 관련 정책을 펼친 건 비단 ‘한자’뿐만이 아니다. 교육부는 당초 ‘선행교육 금지법’에 따라 유치원·어린이집도 영어 수업을 금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유아 영어 사교육을 부추기고 교육 격차가 더 벌어질 거란 우려가 쏟아지자 보류한 상태다. 지난해 8월에는 수능 절대평가 개편안을 추진하다가 여론의 반발에 밀려 유예했다. ‘초등교과서 한자 병기 정책’도 마찬가지다. 당초 폐기를 추진하다가 반대 여론이 들끓자 현재 교육부는 한발 물러선 상태다. 정부가 내놓은 사교육 억제 정책들이 오히려 사교육을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다.

초등학생 두 남매를 키우는 윤진혁씨의 말이다. “정부가 사교육을 억제한다는 정책을 펼칠 때마다 오히려 사교육을 더 시킬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돼가고 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면,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학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다. 무조건 교육을 막기보다는 현장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정책에 반영했으면 좋겠다.”

한자교육을 단순히 사교육 확대의 문제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있다. 한국어의 약 70%가 한자어이고 전문어의 경우 99%가 한자어이다. 이를 한글로만 표기했을 경우 이해에 어려움이 있고 개념에 혼란이 올 수 있다. 한자어를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려면 기본적으로 이를 생성한 한자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양천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8회 초등학생 한자왕 경시대회에 응시한 초등학생들. ⓒphoto 연합
서울 양천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제8회 초등학생 한자왕 경시대회에 응시한 초등학생들. ⓒphoto 연합

국민 2명 중 1명 기초 이하 국어실력

유학영 미래엔 교과서박물관장은 한자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유 관장은 국어·한문·외국어 교과서를 총괄하던 교육부 인문과학편수관을 역임한 인물이다.

“언어나 문자 교육이 초등학교 이하의 연령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것은 보편화되어 있는 학설이다. 한자는 2000년 동안 우리 한민족의 역사·사상·정서·문화를 담아 사용해온 문자이다. 한글이 우리의 표음문자라면 한자는 우리의 표의문자라 할 수 있다. 한자는 순우리말로 만들기 어려운 개념어나 전문어를 생성해 어휘를 풍성하게 만든다. 공교육인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기초적인 한자는 반드시 교육해야 한다.”

반면 한자 교육을 반대하는 교수와 시민단체들의 주장도 거세다. 이들은 교과서 한자 병기는 학생들에게 과도한 학습 부담을 주고 사교육을 유발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서울교대 등 등 10개 교대 교수로 구성된 ‘초등한자 목록 300자 공표를 반대하는 전국 교육대학교 교수’는 “초등 사교육 팽창과 왜곡 현상이 걷잡을 수 없이 심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자교육은 IT시대에 역행하는 정책이고, 중·고등학교에서 한문 교과를 통해 충분히 교육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자를 몰라 불편을 겪거나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2013년 국민의 국어능력평가’ 조사 결과를 보자. 전체 국어능력평가에서 우수에 해당하는 비율은 11.9%, 보통 33.4%, 기초 45.9%, 기초미달 8.8%였다. 국민 가운데 2명 중 1명이 기초 이하에 해당하는 국어능력을 지닌 것이다. 한자 교육에 대해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가 한 말이다. “한글을 사용하자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훌륭한 전통문화 계승과 발전을 위해서는 한자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한자 교육을 사교육 확대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학습에 필수적인 우리말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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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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