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조국 해방전쟁 67주년’을 맞아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차 전국노병대회에 참석해 연설하는 김정은 위원장. ⓒphoto 뉴시스·조선중앙TV 캡처
지난해 7월 ‘조국 해방전쟁 67주년’을 맞아 평양 4·25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차 전국노병대회에 참석해 연설하는 김정은 위원장. ⓒphoto 뉴시스·조선중앙TV 캡처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은 국제정치라는 초도덕적 세계에서는 비극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의 불완전성과 결과의 불가측성을 받아들이면 부적격한 선(善)으로 악(惡)을 제거하기보다 악을 보다 덜한 상태로 만드는 현실주의 외교가 낫다고 주장한다. 현실주의 외교가 가능해지면 비극을 관리해볼 여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통제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인식이다.

현재 미국이 처한 국제적 현실이 통제하기 힘들어진 후자 상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8월 말 아프간 사태와 북한의 핵무기 개발 재개라는 두 개의 국제정치적 비극에 잇따라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는 냉전을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조지 케넌과 키신저의 현실주의를 탈냉전 시기 들어 외면해온 미국의 자업자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탈레반과 북한이라는 두 악(惡)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려는 이상주의 외교가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다.

아프간 주둔 미군이 카불 철수 작전을 완료하기 하루 전이던 지난 8월 30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북한이 지난 7월 초부터 영변 지역의 5㎿급 원자로를 재가동해왔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징후들이 포착됐다고 발표했다. 마치 아프간이 무너지자마자 북한의 핵 개발 위기가 재발하는 모양의 정세가 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바이든 미 행정부가 맞닥뜨린 첫 번째 외교 안보 위기에 해당한다. 미·영 연합군은 2001년 10월 ‘항구적 자유’라는 작전명 아래 9·11 테러를 자행한 탈레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침공하여 10년 만인 2011년 5월 사살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미·영은 이를 ‘완전한 승리(a complete victory)’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번 아프간 철군은 아프간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 전략이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 7월 초부터 재가동됐다고 최근 발표한 북한의 영변 원자로 위성사진. ⓒphoto 뉴시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지난 7월 초부터 재가동됐다고 최근 발표한 북한의 영변 원자로 위성사진. ⓒphoto 뉴시스

아프간 사태와 북핵 재개가 다른 이유

미국이 맞닥뜨린 두 번째 비극인 북한의 핵 개발 재개는 아프간 사태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미국은 아프간과 달리 북한에 대해서는 체제 전환 전쟁을 시도조차 못했다. 더군다나 미국은 북한을 상대로 ‘빅딜’만 추구하다가 현실주의적인 잠정 합의나 부분적 합의조차 이끌어내지 못했다. 언젠가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되기만을 기대하면서 유엔 안보리 제재를 중심으로 한 경제 제재와 군사적 압박만 가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북한이 지난 2년 반 동안 폐쇄해왔던 영변의 플루토늄 추출 핵시설을 재가동함으로써 핵무기 추가 보유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은 한국과 함께 대북 인도적 지원 가능성을 내비치면서 무조건적인 대화만 제안하고 있는 상태다. 대북 경고 메시지는 내놓지 못한 채 대화 제안에 대한 평양의 반응만 주시하고 있다.

이는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 등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를 주도하는 이상주의 외교 엘리트 그룹 ‘블롭(the Blob)’이 전 세계 테러지원국과 독재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체제 전환(regime change)을 추구해왔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오바마 행정부 때까지는 모든 독재국가들을 상대로 체제 전환 전쟁을 벌여서라도 세계 평화를 달성하겠다며 기세등등했던 블롭이었지만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넘어서서 2017년 11월 미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호의 시험발사에 성공했을 때조차 안보리로 달려가는 것 이상의 견제를 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승리를 거두기가 어려우면 완전한 무시로 일관하는 무력한 대응을 반복하는 중이다. IAEA 발표 한 주 전 방한했던 성 김 미 대북정책특별대표(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대행)는 영변 핵시설 재가동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는 양 한국 외교부 노규덕 평화교섭본부장과의 회담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의 필요성에 대한 합의와 함께 북한을 향해 조건 없이 만나 대화를 갖자고 제안했다. 물론 아프간 사태로 인해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랬을 수 있다. 어쨌든 이 시점에서 김정은이 영변 핵시설 재가동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분명해 보인다. 탈레반 공세로 곤경에 처하게 된 바이든 미 행정부를 흔들어 대북 제재 해제를 받아내자는 전략이다.

문제는 이들 두 국제정치적 비극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미치는 ‘데미지’ 측면에서 큰 차이가 난다는 데 있다. 현재로서는 아프간 사태가 북한의 핵 개발 재개 움직임보다는 훨씬 더 높은 우려를 사고 있다. 야반도주하듯 아프간에서 철수하면서 미국 안에서는 물론이고 많은 동맹국 사이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해 말 대선에서 호언했던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 강화 약속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높다.

하지만 필자가 주간조선 지난호(8월 30일 자)에 게재한 ‘아프간 철수에 숨은 미국 전략 읽기’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블롭의 아프간 철수는 미 국민의 과반수가 부의 양극화로 신음하면서 국익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중동과 북아프리카, 동유럽에서 체제 전환 전쟁 등 군사적 수렁에 빠지는 것에 반대한다는 여론을 존중한 결과로 평가해야 한다. 블롭이 국내 정치의 연장 차원에서 철군을 결정한 것인데 주둔비용 한 푼 보태지 않은 동맹국들이 여기에 대해 가타부타 관여할 상황이 아니다.

아프간과 북한, 두 비극이 만나는 지점

더군다나 아프간 침공 자체가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진영이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탈냉전 질서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14년 2월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중국의 남중국해 인공섬 건설을 계기로 탈냉전 질서는 결정적으로 흔들렸다. 블롭이 자유주의 패권 전략에 따라 일으킨 체제 전환 전쟁인 아프간과 이라크 전쟁은 ‘영토 주권 보장’과 ‘내정 불간섭’이라는 두 개의 가치로 탈냉전 질서를 떠받쳐온 베스트팔렌 정신을 미국부터 앞장서 위반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랬기 때문에 미국이 서유럽과의 안보동맹 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우크라이나로 확장하려 했을 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보란 듯이 강제 병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블롭의 이 같은 체제 전환 전쟁 강행이나 독재정권 붕괴 공작 등이 보이지 않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촉진시키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아프간에 이어 2004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빌미로 이라크전쟁을 감행해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김정일에 충격을 줬을 것이라는 게 미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내리는 분석이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가 이라크전쟁 다음해인 2005년 비밀 핵 개발을 포기하고 모든 장비와 시설을 미국에 넘겨 준 뒤 2011년 반정부 세력의 봉기로 정권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것 역시 김정일로서는 핵무기 개발에 더욱 집착하게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다. 미 싱크탱크 브루킹스의 마이클 오핸런은 “김정은 역시 아버지 김정일과 같은 두려움에 핵 개발을 해왔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오핸런은 올해 출간된 그의 저서 ‘The Art of War in an Age of Peace(평화 시대의 전쟁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김(정은)은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아프간의 탈레반 지도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카다피가 핵무기 없이 미국과 싸웠을 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

분명한 것은 아프간 주둔 미군 철수, 친미 정권 붕괴, 그리고 탈레반의 재집권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 아프간 사태는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아 전 세계 평화와 안정을 실현해야 한다는 대의명분 관점에서 보면 북한의 핵 개발 재개 위기에 비해 그 중요성이 한참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는 제재와 압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대화와 협상을 통해 북한으로 하여금 생산된 모든 핵무기와 관련 생산시설, 장비를 완전히 폐기토록 하는 데 실패할 경우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기정사실화할 것이고, 이는 핵무기 보유를 원하는 다른 권위주의 국가들에 ‘북한 모델’을 제공할 것이다. 즉 북한을 본받아 핵무기 개발로 치닫는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지 못하면 1969년 체결돼 1970년 유엔 총회에서 비준된 이후 전 세계 핵 확산을 막기 위한 토대가 되어 온 핵확산방지조약(NPT) 체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상주의 엘리트 집단 블롭의 실수

따라서 블롭이 아프간에서 보여주고 있는 정책이 자유주의 패권 전략에서 후퇴하는 것이 맞는다면 이제라도 미국의 국익이 가장 크게 걸려 있는 동아시아와 서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그 현실주의적 과제는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지고 있다. 첫 번째 과제는 역내 주변국들의 영토 및 외교 주권을 침해함으로써 지역 전체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는 중국의 군사적·경제적 패권 도전을 확실하게 저지하는 것이다. 문제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두 번째 과제인데, 블롭은 아직까지 대중 전략에 이어 아프간 철수 등의 현안들로 인해 이를 실현하기 위한 대전략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는 블롭이 이상주의 성향의 외교 엘리트들답게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에 빠진 나머지 악의 축 국가들을 상대로 한 대화와 협상에 능숙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블롭이 1991년 소련 해체로 냉전이 종식된 이후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등 세 개 행정부 24년간 웬만한 위기와 도전은 군사력을 동원한 체제 전환 전쟁으로 풀었다는 데서 확인된다. 그래서 미 현실주의 학자들은 자신들의 협상 경험과 능력 부족을 걱정해 블롭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에 나서는 것을 꺼릴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한다. 오핸런은 위의 책에서 “우리는 협상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서울과 워싱턴이 협력해서 평양과 터프한 협상을 벌이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바이든 행정부의 북한 비핵화를 위한 대전략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전략 문제와 냉전사 권위자인 미 프린스턴대의 존 루이스 개디스는 2018년 출간된 그의 역저 ‘대전략론’에서 대전략이란 무한한 열망들(aspirations)과 그것들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들(instruments) 간의 균형이라고 정의한다. 열망이 제아무리 크다 한들 그것을 실현할 수단이 없다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추구하는 열망이 있다면 그것을 달성할 수단을 갖춰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제정치에서 미국을 비롯한 모든 국가가 추구하는 열망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은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귀결된다. 요컨대 대전략이란 추구하는 열망과 달성할 수 있는 군사력과 경제력 간 균형인 것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바이든 행정부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추진해야 할 대전략이란 김정은으로 하여금 모든 핵무기 관련 생산시설과 장비 일체를 폐기하도록 유도하는 데 필요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려운 문제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세계 1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김정은이 완전한 비핵화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데 한계가 있다. 2004년 북핵 위기 당시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논의가 한창 이루어졌을 때 당시 미 국방부 부장관 리처드 아미티지는 한 보고서에서 북한의 대응 능력을 고려했을 때 선제공격의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대북 체제 전환 전쟁을 포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난 5월 22일 성 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대행(오른쪽)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대화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22일 성 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대행(오른쪽)이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서훈 국가안보실장과 대화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바이든 행정부 테스트하는 북한

현재 북한의 반격 능력은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 보유로 훨씬 더 강해졌다. 미국이 지난 20년 가까이 상대한 중동과 북아프리카 독재국가들과 달리 북한을 상대로 체제 전환 전쟁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김정은이 영변 핵시설을 2년 반 만에 재가동하면서 아프간 사태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를 노골적으로 테스트하고 있는데도 국무부와 국가안보보좌관실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는 블롭은 굴욕을 무릅쓰고 이를 조용히 감내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 체제 전환 전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블롭은 안보리 제재와 군사적 압박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이를 지렛대로 삼아 북한을 비핵화로 유도할 수 있는 대화와 협상의 대전략 수립을 주도해야 한다. 오바마 행정부 때처럼 ‘전략적 인내’라는 핑계를 대거나 체제 전환 전쟁을 수단으로 택할 여지도 완전히 없어진 만큼 북한 비핵화를 위한 대전략 수립을 미룰 여유가 없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미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블롭이 추구해야 할 북핵 대전략으로 ‘스몰딜(small deal)’을 제안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김정은과 2018년 6월 싱가포르와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가진 정상회담에서 추구했으나 달성하지 못한 ‘빅딜(big deal)’ 전략보다는 부분 합의들을 여러 차례에 걸쳐 해냄으로써 완전한 비핵화에 이르는 전략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는 키신저의 현실주의 전략과도 일치한다. 뉴욕타임스의 배리 게원도 지난해 말 출간한 키신저 평전 ‘비극의 불가피성’에서 “키신저는 완전주의보다는 점진주의를 추구했다”고 지적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참여했던 공화당의 대표적인 블롭 멤버인 존 볼튼은 하노이 정상회담 직전 스몰딜을 배드딜(bad deal·나쁜 합의)로 비난함으로써 트럼프가 김정은과 스몰딜을 하지 못하도록 봉쇄했다. 스몰딜이 나쁠 수 있는 것은 그것 하나만으로 북한에 모든 제재를 해제해주는 면죄부를 줄 때다. 물론 북한은 스몰딜 하나로 완전한 제재 해제를 이끌어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하노이 2차 미·북 정상회담 때처럼 김정은이 영변 지역의 플루토늄 핵시설 전체를 폐기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트럼프의 대응은 거기에 상응하는 수준의 제재만 일부 해제해주는 스몰딜을 고려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게 한 뒤 북한의 강선 지역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비밀 우라늄 농축 핵시설에 대해서도 사찰을 통해 그 존재가 확인되면 추가 협상으로 나머지 제재를 해제하겠다는 스몰딜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그것이 개디스가 내린 대전략의 정의에 부합하는 대북 협상인 것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단 한 번의 빅딜로 이룰 수 없다면 수회에 걸친 스몰딜로 이루는 것이 열망과 수단 간 균형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북 협상 경험이 없던 트럼프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단 한 번의 협상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빅딜의 환상에 매몰돼 볼튼의 반대에 넘어갔다.

빅딜과 수차례의 스몰딜 사이

이 점에서 앞으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한 협상 전략은 완전한 승리가 아닌 제한적 승리가 되어야 한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단 한 번의 빅딜로 북핵 관련 생산시설과 장비를 포기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여러 차례의 스몰딜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미 양국이 주의해야 할 것은 스몰딜들을 통해 북한과 주고받는 대상을 철저하게 비안보적인 분야로 국한해야 한다는 점이다. 북한에 대가로 줄 수 있는 것은 비핵화 단계에 맞는 제재의 단계적 해제와 완화 정도에 한정되어야 하고 대북 인도적 지원과 경제개발 협력 지원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에 합의했을 때 이뤄져야 한다. 북한이 주장해온 미·북 불가침협정이나 평화협정 등도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북한의 전략인 만큼 스몰딜의 양보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수회에 걸친 스몰딜을 통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과정은 예상 이상으로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 같은 점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 미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의 지적이다. 오핸런의 경우 앞의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북한과의 잠정 핵 합의가 수십 년 내에 완전한 합의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절대 공식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데 미국으로서는 그 같은 양보를 해줄 경우 글로벌 비핵화 정책에 얼마나 엄청난 데미지를 줄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비핵화 합의일지라도 북핵 문제를 2017년 때의 위험한 상황보다는 훨씬 낫게 만들 것이다.”

문제는 북한과의 잠정적이고 부분적인 비핵화 합의일지라도 최선을 다해야만 가능하다는 데 있다. 독재국가를 상대로 협상보다는 체제 전환 전쟁을 선호해온 블롭이 김정은을 상대로 스몰딜들을 달성해낼 수 있을 것인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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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 한국국가대전략연구원장·전 통일부 정책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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