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암(松巖) 이회림(李會林)은 ‘마지막 송상(松商)’이라고 불리는 우리 시대 전설적 상인이다. 그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개성 잡화상 수습점원으로 출발하여 30세 때 서울 종로통에 굴지의 무역상사 개풍상사를 차려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생전에 소나무와 바위를 매우 아꼈던 그는 아호처럼 사시사철 푸르른 삶의 자취를 남겼다.
40여년간 화학산업에만 매진
그는 OCI(The Origin of Chemical Innovation)그룹의 창업자이자 송암미술관의 설립자로 살다 갔다. 40여년간 화학산업 분야에 매진하며 오늘의 OCI를 글로벌 종합화학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 한국 고미술 애호가로서 평생 수집한 문화재 8400여점을 인천시에 기증하는 등 통 큰 사회환원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세수할 때 비누를 쓰지 않을 정도로 물자를 아꼈다. 신문에 끼어 오는 광고 전단지까지 잘라 메모지로 아껴 쓰는 알뜰한 삶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는 신용과 근면성실을 중시하는 개성상인의 덕목을 따라 행동하는 리더로 존경을 받았으며, 새로운 사업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과 과감한 도전정신을 바탕으로 한국 화학산업의 기틀을 세운 뛰어난 사업가로 평가받고 있다. 붓글씨를 즐기고 서화와 골동품에도 식견이 높았던 송암 이회림 회장은 전통문화와 예술의 보존에도 힘썼으며, 뛰어난 전통예술품의 수집과 전시를 통해 또 다른 의미의 나눔을 실천했다.”(송암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추모하며, 이홍구 전 국무총리)
기업인으로서 송암은 1960년대 이후 40여년간 오로지 화학산업에만 매진했다. 그 결과 오늘의 OCI그룹은 삼광글라스, 유니드, 유니온, 이테크건설, 오텍 등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미국, 중국, 일본, 독일,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 현지 공장 및 지사를 둘 정도로 성장했다.
송암은 1917년 4월 17일 경기도 개성 만월동 288번지에서 중국과 백삼교역을 하던 이영주와 모친 윤효중 사이의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번창하던 사업이 1929년 대공황 때 순식간에 문을 닫자 선친은 그해 56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식구들의 충격은 매우 컸다.
“38세에 홀로되신 어머니께서 철부지 5남매를 키우시느라 형언할 수 없이 많은 고생을 하셨다. 어머니는 집에다 솜틀을 놓고 밤샘을 하면서 솜을 타거나 남의 밭김을 매주고 뽕을 얻어와 그것으로 누에를 쳐서 어린 5남매의 생계를 이어갔다.… 내 생애에 가장 영향을 많이 주신 분은 역시 어머니였다. 서당 훈장을 지내신 외할아버지의 엄격한 훈도를 받은 어머니는 자애롭기 그지없었으나 우리 5남매에게는 매우 엄격하셨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겨울철 눈도 지금보다 훨씬 많이 내렸고 날씨도 더 추웠던 것 같다. 눈이 내리면 그 눈을 말끔히 치워야 하였는데, 마당은 물론이려니와 대문 밖 이웃집 문전의 눈까지도 치우게 하셨다. 눈을 치우지 못하면 밥상머리에 앉지 못하게 하셨다.”(‘내가 걸어온 길’ 이회림)
송암의 모친은 친척집에서 뜨물을 얻어다가 돼지를 키우고, 아침 일찍 남의 집에 가서 집을 치워주고 밥 두 그릇을 얻어다 다섯 식구를 나눠 먹였다. 할머니가 장만해 놓은 땅에서 쌀이 들어왔는데, 어머니는 제사에 쓸 쌀을 조금 남겨 놓고는 정미소에 가서 좁쌀로 바꾸어 가면서 절약하였다고 한다.
눈을 안 치우면 밥상에 앉히지 않은 어머니
송암의 할머니 또한 알뜰한 살림꾼이었던 듯하다. 역시 젊은 시절을 홀로 보낸 할머니는 집안에서 소규모로 소주를 만들어 판매했다. 이 덕분에 다소 축재해 장단역 근처에 전답을 매입하였다.
“개성에서 장단역까지는 기차삯이 25전이었다. 할머니께서는 갈 때는 홀몸이고 거리가 약 30리밖에 안 되니 걸어가자고 하시기에 나는 돈을 아끼시려나 보다 하고 그저 따라만 다녔는데, 돌아올 때에는 콩이나 녹두 같은 잡곡을 가져오게 되니 기차를 타고 온다. 이때에도 할머니께서는 ‘사람이란 한 푼이라도 아껴야 앞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고, 나는 10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도 크게 감명을 받아 성장해서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내가 걸어온 길’)
송암은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진학의 꿈을 접는 대신 서점에서 일하려고 했다. 일을 하면서 틈틈이 독서를 하면 상급학교에서 배우는 것 못지않게 지식을 쌓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어머니의 반대로 좌절됐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돈을 벌겠다니 대견하다마는 장사를 배우고 익히려면 서점보다는 큰 상점에 취직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당시 개성에는 큰 도매점들이 있었는데 이런 곳에 취직하면 처음 3년간은 월급 없이 일을 시켰다. 이 기간이 지나야 주인이 점원의 됨됨이를 평가해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본인 명의로 적립금 100원을 주는 게 관례였다. 바로 개성상인으로서 가능성이 있는지를 평가하는 절차였다.
“나는 빈한한 가정의 장남으로 3년간 보수 없이 일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활이 어렵다고 당장의 수익만을 좇지 말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생각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서점에서 일하는 것을 막으셨다. 그 후 나는 아버님 친구분의 도움으로 잡화 도매상인 손창선 상점에 점원으로 취직할 수 있었고, 송상으로서의 자질을 갈고닦기 시작하였다.”(‘내가 걸어온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