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민(黙民) 이원갑(李源甲)은 부방그룹 창업주로 1914년 2월 20일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서 부친 이석면과 모친 조현고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묵민이란 아호는 생전에 절친했던 이동욱 동아일보 주필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일제의 귀속재산인 섬유회사 부산방직에서 출발한 부방그룹은 사양산업의 그늘에서 벗어나 전기밥솥 쿠첸을 만드는 전기기자재 산업과 선박평형수(船舶平衡水)를 다루는 첨단 환경산업으로 환골탈태했다. 특히 선박평형수 기업인 테크로스는 2015년 부산공장을 준공하고, 2019년 LG전자로부터 관련 환경서비스를 인수하면서, 세계 최대의 선박평형수 제조시설을 갖춘 세계점유율(17%) 1위의 강소기업으로 부상하였다. 선박평형수는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배 밑에 담는 물로, 해운업계에서는 비용절감을 위해 오염수로 채우고 이를 바다에 버려 커다란 오염원이 되어왔으나 근래에는 국제해사기구가 청정수로 선박평형수를 쓰도록 엄격히 관리하면서 첨단 환경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묵민이 회재(晦齋)의 14대손으로 태어난 양동리는 유교식 양반마을을 대표하는 곳으로,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다녀가 세계적 명소로 부각되었고, 이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조선조 5현의 한 분인 회재 이언적(李彦迪)의 출생지이며, 그의 외숙인 우재(愚齋)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회재는 여주(麗州) 이씨이고, 우재는 월성 손씨이다. 우재가 출생한 월성 손씨 대종가 서백당(西白堂)에서 외손인 회재가 태어났으며, 두 학자를 키워낸 마을로도 유명하지만 조선조 500년 국반(國班)의 위신을 지켜온 마을답게 마을 안에는 16개에 달하는 보물 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건물이 위치하여 운치를 더하고 있다. 특히 오늘날에도 월성 손씨 대종가와 여주 이씨 대종가에는 양반 대가의 품위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어, 1982년 방한한 세계 굴지의 인류학 석학 레비스트로스는 서백당에서 2박을 하면서 칠첩반상가의 정식식사를 대접받았고 유교적 생활의 일단을 엿보기도 하였다.
인촌 김성수를 멘토로
묵민은 1926년 양동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 중앙고보로 진학한다. 최두선 교장(국무총리 역임) 시절 담임선생님은 변영태씨(외무부 장관 역임), 당시 교우로는 윤택중 전 문교부 장관, 김재열씨(김병로 전 대법원장 차남, 김종인 전 국민의힘 대표 선친) 등이 꼽힌다. 묵민의 장남 이동건(李東建) 부방그룹 회장의 말이다.
“중앙고보 시절 인촌 김성수 선생의 사랑을 듬뿍 받으셨다고 해요. 저도 어머니 심부름으로 계동의 인촌 선생 거처를 찾아 우리 집에서 담근 김치며 된장을 이아주 사모님께 갖다드려 귀염을 받기도 했지요. 그런 영향 때문인지 저도 인촌 선생님처럼 살려고 힘써왔습니다. 그분의 공선사후(公先私後), 신의일관(信義一貫) 정신을 제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왔지요. 인생살이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면 저는 주저 없이 인촌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돌아보면 좋은 방안이 떠오르고 늘 든든한 등불이 됩니다. 인촌 선생님이 아호를 그분의 고향에서 따오신 대로 저도 제가 태어난 동네 이름대로 양촌(良村)으로 지었습니다.”
묵민은 일본대학 법과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금융기관에 몸을 담았다. 광복 이후에는 동해철공, 경주흥업, 조선제마방 등을 경영하였고, 이런 경영 실적을 인정받아 1953년 귀속사업체인 제마방적을 불하받았다. 제마방적은 원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세운 기업이었다. 일본 도쿄에 본점을 둔 제국제마(帝國製麻) 부산제포공장이 그것이며, 1934년에 일본 자본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의 위치는 부산진구 가야구(현 가야 유림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기업들은 광복 직후 귀속사업체로 관리되다가 한국인에게 불하되었다. 대체로 관리인들이 불하를 받던 당시 상황에 비춰 볼 때 묵민은 불하를 받기 전 제국제마의 관리인으로 있었던 것 같다.
제국제마를 불하받은 묵민은 1949년 회사 이름을 부산방직공사로 바꿨다. 이어 1953년에 자본금 5억환(당시 화폐단위)으로 법인체를 설립하여 ㈜부산방직공사로 개칭하였다.
광복 직후 귀속사업체로 있다가 불하된 기업의 경우 부침이 매우 심하였다. 중도에 없어진 기업도 많았으나 부산방직공사는 성공적으로 기업가치를 유지하고 성장하였다. 사장인 묵민과 종업원들이 합심하여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었다. 제국제마는 일본인이 설립했지만 근로자들 중에는 한국인이 많았다. 이들은 부산방직공사로 된 뒤에도 그대로 머물면서 일을 하고 기술을 발전시켰다.
노사 하나로 회사를 살리다
귀속사업체들이 경영인과 종업원들 사이의 불화로 경영난을 겪었던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던 상황에서 부산방직공사는 노사가 일체를 이루어 회사를 살려나갔다. 이 회사가 다른 귀속사업체들과는 달리 회사설립일을 불하받은 날로부터 설정하지 않고, 원래 일본인이 세웠던 연월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라고 하겠다.
부산의 귀속 섬유업체로서 전국적인 시설 규모를 자랑했던 조선방직과 조선견직 등도 오래 버티지 못하는 상황에서 부산방직공사가 이처럼 꿋꿋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설립자인 묵민의 경영철학이 비팀목이 되었다. 묵민은 ‘신뢰와 투명경영’의 철학을 가지고 경영하였다. 단 한 번도 가공비용이나 인건비를 미룬 적이 없었다. 묵민이 사장으로 있는 동안 단 한 차례의 물품지급 지불연장이나 노사분규도 없었다. 회사에서는 담당자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소신껏 일하게 하였다.
이러한 투철한 경영은 숱한 화제를 낳으면서 사회적 신뢰를 쌓아갔다. 정도를 걷는 경영이 외부에 널리 알려지면서 은행과 거래처들도 ‘부산방직공사는 절대로 부도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심지어 부산방직공사에 소속된 회사 관계자의 지장을 찍은 어음이 재래시장과 사채시장에서 지불수단으로 돌아다니면서 다른 기업들이 발행한 어음보다 인기가 높을 정도로 부산 지역에서 신용을 확보하였다.
묵민은 선비정신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근면과 검소가 그의 생활신조였는데, 이러한 정신은 경영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묵민은 기업 규모가 너무 크면 좋은 경영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기업이 너무 커지면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알맞은 경영을 펼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양이 아닌 질 위주의 경영을 도모하였다. 묵민은 항상 무리하게 기업을 키우려 하지 말고 한 우물을 파면서 잘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무리하지 않는 경영방식 때문에 부산방직공업의 외형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 창립 50주년이었던 1994년에도 종업원 420명에 매출 300억원 규모였는데 이후 종업원 규모는 오히려 더 작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