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div>01</b> 코레지오, ‘사티로스와 안티오페’, 1525년경, 사티로스로 분해 안티오페에게 다가가는 제우스.<br><b>02</b> 부셰, ‘에우로페의 납치’, 1734년, 황소로 분한 제우스에게 올라탄 에우로페.<br><b>03</b> 얀 마부제, ‘다나에’, 1527년, 황금비로 내리는 제우스.
01 코레지오, ‘사티로스와 안티오페’, 1525년경, 사티로스로 분해 안티오페에게 다가가는 제우스.
02 부셰, ‘에우로페의 납치’, 1734년, 황소로 분한 제우스에게 올라탄 에우로페.
03 얀 마부제, ‘다나에’, 1527년, 황금비로 내리는 제우스.

싫증을 잘 내는 예술가만이 살아남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미술은 늘 새롭고 낯선 것을 만들어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싫증을 잘 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던 예술가들에게 훨씬 유리했을 것이다. 싫증이나 권태의 메커니즘을 가만 들여다보면, 여기에는 기묘하게 죽음의 냄새가 난다. 삶이 좀 식상하고 진부하고 무료하고 뻔하다는 생각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스스로 더욱 강력한 자극을 찾는 일일 것이다. 예술가들은 그랬을 것이다. 더 큰 자극과 충격 속에 자신을 던졌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만큼 싫증을 잘 냈던 신은 없다. 매번 매 순간 충실하게 사랑의 대상을 갈아치웠다. 그 솜씨를 비단 연인들을 갈아치우는 데만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 그렇더라도 작금의 예술가와 기업가는 여전히 제우스의 변신에서 무언가 배울 게 있다.

예술적 관점에서 보면 제우스는 상당히 재능 있는 연기자이자 행위예술가이다. 제우스는 타인을 변신시키기도 하지만 자기를 변신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신 중의 최고신이 스스로 변신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실 부족한 것 없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자가 무엇이 아쉬워 변하겠는가. 타인에게 변신을 종용하는 것은 쉽지만 스스로 변화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지만 제우스는 처량한 뻐꾸기부터 무생물인 황금비, 때로는 유혹하고자 하는 여자의 남편에 이르기까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하고 스펙터클한 모습으로 자기를 변신시켰다. 이 대단한 변신놀음의 대부분은 인간 여성 혹은 님프들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오로지 조강지처 헤라 몰래 다른 여자들과 바람피우기 위해서였다니, 참 웃기고 쩨쩨하다. 제우스는 가끔씩 자신의 최대 무기인 불번개를 빼먹을 정도로 여자에 빠졌지만 그래도 그의 변신은 애틋할 정도로 가상할 때가 많다. 제우스는 어떤 전략적 마인드를 가지고 변신에 성공했던 것일까.

제우스는 소아시아의 에우로페 공주에게 멋진 황소로 변신하여 접근한다. 유럽의 기원이 된 여인 에우로페는 페니키아의 공주였다.(‘유럽’과 ‘에우로페’는 ‘Europe’를 영어식으로 읽느냐 로마식으로 읽느냐의 차이다.) 페니키아(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에 있었던 서아시아의 고대왕국)는 제우스의 영역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신의 사랑과 욕망에는 경계가 없는 법. 제우스는 해변에서 산책하는 에우로페에게 하얀 황소로 변신하여 접근했다. 에우로페는 하얀 황소가 성스러운 동물이라 여겨 그 등에 올라탔다. 성욕에 가득 찬 황소는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을 쳤고 자기 영역인 크레타섬에 도착하자 본색을 드러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들이 미노스와 그 형제들이다.

또한 테베의 여왕 안티오페의 미모가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하자 제우스는 사티로스로 변신하여 잠자는 안티오페를 덮친다. 뿔이 난 사람의 얼굴에 하반신은 염소인 반인반수인 사티로스는 정욕의 화신이다.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 역시 당대 미녀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녀가 호수에서 목욕하는 광경을 목격한 제우스는 호수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볼거리인 백조로 변신한다.

제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팁이 있다. 때로 가차없이 불번개로 세상을 평정하는 최고신이 여성을 유혹할 때는 동물 수컷이 화려한 깃으로 암컷을 호리듯 미적 측면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자든 남자든 아름다움에는 약하니까 말이다. 더욱 중요한 건 상대의 취향을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대로 자기를 변화시켜 다가갔다. 제우스는 에우로페가 황소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할 만큼 치밀했다. 또 테베의 공주 안티오페가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나 우아하고 정숙한 환경을 즐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은근히 거칠고 더러운 욕망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티로스로 변신해 그녀의 욕정을 자극하고 충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레다가 백조를 좋아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헤라가 연민과 동정심이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엾은 비 맞은 뻐꾸기로 그녀의 창가에 날아들 수 있었다. 신도 지피지기 백전백승 전략에서 예외가 없었다.

그뿐 아니다. 신조차 절대적으로 다다를 수 없는 공간인 창문 없는 청동탑에 갇힌 다나에를 위해 황금소나기로 변신한다. 황금소나기로 변한 에피소드는 특별히 화가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렘브란트와 클림트를 비롯한 여러 화가의 작품으로 남아있다. 아르고스의 처녀 이오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역시 헤라의 눈을 피해 구름으로 변신한다. 아무리 헤라의 눈을 피해 한 짓이라지만 여자를 얻기 위해 이 정도로 노력한다면 어느 누가 그런 남자를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황금비, 구름 같은 무생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발상은 또 얼마나 기막힌 시적 연금술인가!

여성편력의 대가 제우스가 보여준 남다른 변신 능력은 사실 그의 바람기를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빼어난 시대 적응 능력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가와 기업가 모두 시대정신을 읽어내지 못하면 망한다. 통상 예술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고집하는 사람으로 치부되지만 예술가가 제멋대로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은 19세기 정도에 와서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거장 미켈란젤로도 조각가인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엄청 투덜대며 완성한 것이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다. 그가 불평만 하고 작품을 소홀히 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신이 내린 걸작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변화에 대한 예술가의 순응 혹은 도전은 명작을 낸다. 이처럼 진짜 선수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지 않는다.

예술이든 상품이든 걸작은 변화를 앞서 받아들일 때 나온다. 제우스가 신들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시대 변화를 가늠하고 선도할 수 있는 능력이 다른 신들에 비해 월등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예술가와 기업가 모두 다양한 계층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천하의 피카소도 젊은 시절 작품을 완성해 놓고 친구와 비평가와 지인들을 불러 자기 작품이 어떤지 말해달라고 종용하듯 부탁했다. 이는 예술작품의 생산자로서 자기에게 가하는 가장 드라마틱한 충격요법이었다. 어쨌거나 훌륭한 작가들은 그처럼 철저한 자기검열을 거쳐 타인의 검열까지를 거친다. 걸작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유경희

홍익대 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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