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div>01</b> 정선, ‘자위부과(刺蝟負瓜)’, 20.0x28.8cm, 간송미술관<br><b>02</b> 베첼리오 티치아노, ‘비너스와 아도니스’, 캔버스에 오일, 160x196cm, 1555~1560년경<br><b>03</b> 루이스 부르주아, ‘꽃’, 종이에 과슈, 2009년<br><b>04</b> 정선, ‘개구리’, 29.5x22.2cm, 국립중앙박물관
01 정선, ‘자위부과(刺蝟負瓜)’, 20.0x28.8cm, 간송미술관
02 베첼리오 티치아노, ‘비너스와 아도니스’, 캔버스에 오일, 160x196cm, 1555~1560년경
03 루이스 부르주아, ‘꽃’, 종이에 과슈, 2009년
04 정선, ‘개구리’, 29.5x22.2cm,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은 나이 들수록 빛을 발하는 장르다. 화가들의 명작은 노년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미술이 나이 든 예술가를 존경하고 칭송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가는 늙음 혹은 나이듦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오래 산 작가는 대략 걸작도 남기고 살아서 명성도 누린다. 물론 모든 오래 산 화가가 주요한 작품을 남기는 건 아니다. 피카소는 평생에 걸쳐 예술적 실험을 감행했지만 70~80대의 작품이 그 이전 작품들보다 미술사적으로 중요하다든지, 문제적 이슈를 냈다든지 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비한다면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 피에르 보나르의 ‘자화상’은 모두 만년의 걸작들이다. 물론 그 작품들은 젊은 시절의 자긍심과 활력에는 분명 미치지 못하지만, 기나긴 인생역정을 통과해온 존재만이 증명할 수 있는 세상과 인생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누구보다 만년에도 명작을 남긴 화가는 르네상스 시대의 베첼리오 티치아노(1490년경~1576년)다. 베네치아 없는 티치아노, 티치아노 없는 베네치아를 상상한다는 것이 어려울 만큼 베네치아의 외향적 문화를 완벽하게 묘사했던 티치아노는 아주 길고 바쁜 생애를 보냈다. 99세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티치아노는 노년을 열렬히 예찬했다. 당대의 누구보다 오래 산 그는 쉰 살의 중년보다 이젤 앞에 더 오래 앉아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크나큰 자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는 의뢰인에게 나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한두 살씩 올려 말하곤 했다.

티치아노는 위대한 화가들 중에서 최초로 확실한 후원자 없이 독립적으로 활동한 화가다. 교황이나 군주에게 몇 년 동안 고용된 적이 없었고 공식적인 궁정화가로 일하지도 않았다. 궁정화가라면 그럴 듯한 직함으로 보이지만 실은 궁정의 요리사나 어릿광대, 악사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반면에 티치아노는 공방을 소유하고 있었다. 다양한 신분의 고객들이 그의 공방을 찾아와 그림을 감상하고 구입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상과 인물을 그렸으며 의뢰인이 만족하든 않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지를 따랐다. 당시 그와 같은 독립성을 누린 예술가는 거의 없었다.

티치아노는 그저 위대한 화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 활동을 하게 된 이후 평생토록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확장한 예술가였다. 그가 어찌나 대단한 인물이었던지 카를로스 5세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가 떨어뜨린 붓을 황제가 직접 주워 건네며 “티치아노는 황제의 시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티치아노의 전작에는 삶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특별히 만년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주문으로 10년 동안 그려진 ‘포에지(Poesie·신화를 주제로 한 6점의 회화로 다나에, 비너스와 아도니스,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 다이아나와 악타이온, 다이아나와 칼리스토, 에우로파의 강탈 등)’는 티치아노 특유의 관능적 낙천주의를 통해 사랑의 황홀경이라는 판타지를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역시 관능성은 젊은 시절이 아니라 노년의 장기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마저 느끼게 해주는 작업들이라니!

거미 조각으로 유명한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야말로 늦은 나이에도 얼마나 활력 있게 작업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 존재다. 사실 부르주아는 40세가 넘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고, 70세가 다 되어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99세로 죽을 때까지 현역으로 살다간 작가였다. 그런 부르주아는 86세인 1997년부터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가 만든 조각 ‘거미’가 제작되어 세계 곳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지 3~4년이 흐른 뒤였다. 90을 앞둔 노작가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작업만 하겠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웬걸! 남성 성기와 거세도구 혹은 여성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다소 폭력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작업을 하던 그녀가 손바느질만으로 아주 작은 인형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값나가는 무겁고 딱딱한 재료가 아닌, 집안의 모든 폐품과 쓰레기와 잡동사니와 같은 것을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 다름 아닌 부르주아가 평생 입었던 잠옷, 속옷, 수건, 이불시트와 같은 아주 부드러운 패브릭이 그것이다. 그녀는 유년 시절 태피스트리 복원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를 돕던 기억을 되살려내기 시작했다. 깁고, 싸매고, 꿰매는 등 바느질로 하루에 몇 점의 인형을 만들어냈다. 그 바느질 인형들은 작가의 유년 시절 가족사로부터 받은 상처와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행위가 되었다. 부르주아의 인형 작품은 이전 작품보다 훨씬 작아졌지만 그 아우라는 큰 거미조각을 압도할 정도다. 이처럼 나이 아흔이 가까워졌을 때에야 비로소 삶과 화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세심한 바느질로 인형 연작에 몰두했던 부르주아는 이후 꽃 연작을 시작한다. 그녀는 꽃을 아주 붉고 화려하고 섬뜩하게 그려냈다. 그 어느 때보다 젊고, 뜨겁고, 역동적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그것은 여느 꽃 그림이 가지는 단순한 바니타스(vanitas·허무 혹은 무상)가 아니다. 오히려 만년의 꽃은 자신의 삶에 보내는 환생에 대한 암시이자 생명에 관한 드라마다. 그런 의미에서 인형과 꽃은 만년에 그녀가 이룩한 가장 미시적 이미지인 동시에 가장 거대한 생명력을 담보한 예술이 되었다. 중요한 건 100세까지 장수했던 부르주아는 나이 들수록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이다. 거대담론에 대한 관심보다는 더욱 더 자기다운 일에 집중했던 것! 그로써 부르주아는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노년이 얼마나 황홀할 수 있는지를 선물로 안겨준 셈이다.

조선의 대가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의 주요 작품도 60대 이후에 나왔다. 그 유명한 ‘인왕제색도’는 76세에 제작되었다. 게다가 여든이 넘은 겸재는 사랑스러운 초충도를 그려냈다. 패랭이, 맨드라미, 여뀌, 국화와 같은 식물과 벌, 나비, 파리 등 작은 벌레들이 짝을 이루어 결합되어 있는 그림들은 신사임당과는 다른 묘미를 가진다. 게다가 얼마나 위트와 유머가 있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고슴도치가 오이를 훔쳐 가는 장면은 압권이다. 고슴도치가 자기 몸을 뒤집어 오이를 콱 등에 꽂고 가는 모습은 얼마나 귀엽고 앙증맞은지 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특히 숭고와 섬세함을 가로지르며 자유롭게 유영하는 운신의 힘은 늙음이 노회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우주에 대한 지혜를 터득해 가는 중요한 시기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유경희

홍익대 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