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 캔버스에오일, 199x162cm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 캔버스에오일, 199x162cm

인생의 굴곡을 만날 때, 모드를 곧바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18세기 유학자 다산 정약용이 그랬다. 유배지에서 다산은 “드디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다산은 18년의 세월을 원망이나 좌절 속에 보내지 않고 방대한 저술활동을 하며 척박한 유배지를 학문의 성지로 승화시켰다.

현대사회에서는 IQ(지능지수), EQ(감성지수)보다 AQ, 즉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가 높은 사람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 AQ는 역경을 얼마만큼 잘 극복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지표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라는 개념과 통한다. 그리고 이 회복탄력성은 역경을 이겨내는 마음의 근력을 뜻한다. 역경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도약의 기회로 삼는 것, 시련을 행운으로 바꾸는 유쾌한 비밀이 회복탄력성이라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어떤가?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러시아계 연인 루 살로메에게 실연당한 후, 몇 개월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 실연이라는 위기가 니체에겐 고통과 절망이었지만, 후대를 위해서는 그만큼 선한 일이 있을까?! 뿐만 아니다. 의대를 진학하려던 프리다 칼로는 교통사고가 나 온몸이 결딴났지만, 그는 침대에 누워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멕시코 국민화가가 됐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회자되는 인물들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역경 덕분에 위대한 업적을 이뤘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17세기 바로크미술을 대표하는 여성화가다.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는 카라바조의 친구로 당대 꽤 유명한 화가였다. 딸의 그림 재능을 알아본 그는 18세 딸의 미술 교육을 동업자이자 유명한 풍경화가였던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맡긴다. 그런데 타시는 아르테미시아를 강간했다. 그녀는 고소를 했고, 이 스캔들은 로마를 술렁이게 했다. 타시는 체포됐고, 약 7개월간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타시는 시종일관 혐의를 부인하며, 아르테미시아가 먼저 유혹했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주장했다. 아르테미시아는 돌이킬 수 없는 모욕과 수난을 당했고, 자포자기의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 그녀에게 로마의 3류 화가 피에란토니오 스티아테시가 청혼을 했다. 물론 거액의 결혼지참금을 노린 것이고, 그녀는 팔려가다시피 결혼식을 올렸다. 로마를 떠나 피렌체 공국으로 이주한 아르테미시아는 은둔하며 작품 제작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소문은 조금씩 피렌체 사교계에 퍼져나갔다. 그녀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지만, 뜻밖의 주문이 들어왔다. 바로 코시모 데 메디치 2세가 직접 작품 제작을 의뢰한 것. 작품 주제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베는 유디트’였다.

1615년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코시모 2세는 아르테미시아의 화실에 20여명의 손님을 대동했다. 아내 마리아 막달레나를 비롯해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 피렌체를 대표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이끌고 화실을 전격 방문했다. 피렌체 출신의 거장들이 기라성 같았기 때문에 타지 출신의 예술가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 게다가 스캔들에 휩싸인 여류화가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한다는 건 아주 파격적인 대우였다. 코시모 2세는 아르테미시아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과거를 묻지 않았다. 오로지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그녀의 예술적 능력이었다.

그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단검으로 자르고 있는 유디트의 얼굴이 바로 아르테미시아의 얼굴임을,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이 그녀를 강간한 타시의 얼굴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게다가 코시모 2세는 대동한 사람들에게 아버지 솜씨보다 뛰어나지 않으냐고 아르테미시아를 치켜세웠다. 코시모 2세는 고액의 사례금을 지불하고 ‘류트를 켜는 여인’과 ‘마리아 막달레나’를 추가로 주문함으로써 첫 여성 예술가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아르테미시아는 한 번도 여성 화가에게 개방되지 않았던 피렌체의 미술가 길드 겸 대학에 최초로 가입해 활동한 예술가가 되었고, 한림원에 가입한 최초의 여성 직업화가가 되었다. 이로써 아르테미시아는 강간사건의 수치스러운 주인공이라는 불명예를 말끔히(?) 씻고 예술가로서 영예를 안게 되었다. 그녀가 아버지의 보호 아래 로마에서 그럭저럭 주문받은 작품만을 생산해냈다면, 그리고 아픈 기억을 그림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면, 그저 그런 3류 화가로 남았을 것이다.

드가는 자신의 심각한 질병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바꾼 화가다. 그는 36세의 나이에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그 후로도 평생 근시에 시달려야 했다. 밝은 빛을 견디지 못했고,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등 시각장애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안고 살았다. 이런 장애는 항상 분노와 후회, 자기 연민을 불러왔다. 그러나 드가는 제한적인 시력 때문에 오히려 집중력이 생기고 대상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능력을 키웠다. 그가 시력에 치명적인 햇빛으로부터 자신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실내 조명 아래의 인물이나 대상에 천착했던 것이 결국 인공조명 아래 있는 무희들의 그림을 가장 잘 그리는 대가가 되게 만들었다. 게다가 시력을 거의 잃었을 때, 드가는 다른 감각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로 진흙으로 소조를 만들어 입체적인 무희 조각을 만든 것. 진정한 예술가는 어느 순간에도 예술에 대한 욕망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위기는 언제나 새로운 기회였다.

역경을 가장 연금술적으로 치환한 화가 중 마티스를 따라올 자가 없다. 원래 법률가였던 마티스는 충수염 때문에 화가가 되었다. 그러니까 충수염을 앓고 그 합병증으로 1년간을 쉬어야 했을 때 병상의 지루함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가 미술의 매력에 푹 빠졌다. 마티스는 그림 그리는 일을 통해 자신의 평범한 삶에는 빠져 있는 어떤 강력한 힘을 느꼈노라고 토로했다. 이렇게 그림의 세계에 입문한 마티스가 말년에 또 한 번의 장애를 입게 되자 새로운 실험에 도전한다. 기관지염을 치료하려고 갔던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일흔을 넘긴 그에게 닥친 위기는 결장암이었다. 수술로 생명은 건졌지만 상처가 감염되어 탈장이 생겼다. 마티스는 남은 13년 동안 거의 침대에만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다. 그때 그가 발견한 작업이 ‘종이 오리기’다.

‘웅크리고 앉아 있는 파란 나부’(1952), ‘다발’(1953)과 같이 종이로 붙여 만든 단순하고 강력한 작품들이 병상에서 이루어진 작품이다. 마티스는 병으로 고통받는 친구들의 침대 주변에 자기 그림을 걸어줄 만큼 자신의 작품에 쓰인 색들이 건강하게 빛난다고 믿었다. 마티스의 말년의 작품은 젊었을 때나 아프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더 낙천적이고 활력 있으며, 평화롭고 대담하고 완숙된 경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유경희

홍익대 대학원 미학 석사.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박사. 뉴욕대 예술행정 전문가과정 수료. 홍익대 대학원 최고위과정 및 뮤지엄아카데미 강의. 저서 ‘예술가의 탄생’ ‘아트살롱’

유경희 미술평론가·예술처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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