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히 일부의 일탈로 인해 교회가 사회적 밉상이 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이 코로나19를 종식시켜 주리라고 ‘믿는’ 것은 신(神)이 아니라 백신이다. 즉 과학이다. 이제는 이런 재난이 닥쳐도 신이 할 일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서 신에 관한 아주 ‘낡은’ 물음이 다시금 불려나온다.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만들어진 것인가.

종교의 입장에서는 이런 물음 자체가 독신(瀆神)이다. 신은 실증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위대한 과학적 발견은 종종 그 믿음을 뒤흔들었다. 진화론, 빅뱅론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로 일부 과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신 없이도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스티븐 호킹은 “종교는 꾸며낸 동화”라고까지 말했다.

최근에는 이런 과학적 무신론을 설파하는 책을 쓰며, 아예 무신론 운동에 뛰어든 과학자도 있다. 바로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다. 그가 이번에는 ‘신, 만들어진 위험’(Outgrowing God·2019)을 펴냈다. ‘outgrow’는 나이가 들면서 어떤 생각이나 습관을 ‘버린다’는 뜻이다. 이만큼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 사는 우리가 이제는 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우리말로는 ‘신, 만들어진 위험’(2021)으로 소개되었다.

저자는 자신이 15세 때 기독교 신앙을 포기했다고 고백한다.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은 왜 태어나는 곳에 따라 다른 신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소박한 의문이었다. 여러 신들이 제각각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과연 어느 신이 진정으로 옳은 것인가. 그런 의구심으로 그는 먼저 자신이 몸담았고 서구 문명의 배경이 된 기독교의 경전, 즉 성경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그의 첫 번째 질문은 ‘사실인가’다. 신약성경은 예수가 죽고 적어도 수십 년 후에 쓰였다. 구약성경의 시차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그런 시차로 인한 왜곡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성경 속의 많은 서사는 다른 문화권의 이야기를 차용하고 있다. 대홍수 서사가 대표적이다. 노아의 방주가 닿았던 어느 한 지점으로부터 동물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증거도 전혀 없다.

더구나 성경은 놀라운 사건과 기적으로 가득하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가 하면, 고질병이 순식간에 말끔히 치유되기도 한다. 칼 세이건은 “비범한 일에는 비범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하지만 성경의 ‘비범한’ 사건이나 기적에는 ‘비범한’ 증거가 전혀 없다. 과학적 실증이라는 잣대를 통해 살펴보면 성경은 사실성을 결여하고 있다.

성경은 선에 관한 책이고, 인간이 선해지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특히 구약성경에는 폭력적 살인 충동, 대학살과 인종청소, 여성 비하 등이 자주 나온다. 그것들은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도저히 선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신이라는 ‘하늘의 경찰’이 있어야만 선량해질까, 아니면 인간 스스로 선량하게 진화할 수는 없을까’라는 물음으로 저자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의 전공인 진화론으로 넘어간다.

자연은 복잡하고 경이롭다. 그래서 ‘설계자가 있을 거야’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도저히 설계자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우리의 후두에는 두 개의 신경이 있다. 하나는 뇌에서 후두로 바로 연결된다. 반면 다른 하나는 뇌에서 흉곽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후두로 연결된다. 이것은 어처구니없이 경이로운 일이다.

이런 모든 경이로움을 한꺼번에 풀어준 사람이 바로 찰스 다윈이다. 그에 따르면, 생명현상에는 돌연변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커다란 돌연변이는 즉각적으로 생명을 위협한다. 따라서 아주 미세한 돌연변이가 중요하다. 그것은 생존에 유리할 수도 있고 불리할 수도 있다. 이때 유리한 돌연변이가 후대로 전달,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곧 자연선택이다.

자연은 오로지 생존에만 골몰할 뿐, 어떤 계획이나 의도를 미리 갖지 않는다. 그래서 온몸으로 영롱한 색깔을 연출하는 두족류 자신은 정작 색맹이다. 우리의 ‘경이로운’ 후두신경도 우리의 조상이 물고기였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이처럼 자연은 아주 조금씩 쌓아 올리는 ‘상향식’ 설계자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하향식’ 설계자, 즉 창조주를 믿는다.

혹시 종교도 진화의 산물은 아닐까. 초식동물은 겁이 너무 많으면 먹이 섭취에 불리하고, 겁이 너무 없으면 육식동물에게 잡혀 먹히기 쉽다. 따라서 그 중간에서 적당히 균형을 잡는 개체가 생존 확률이 높다. 초기 인간도 맹수에게 쫓기는 존재였다.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것이 단순히 바람 소리인지 사자 소리인지 잘 구별하는 개체만이 살아남았다.

그래서 인간은 행위자(agency)를 믿는 경향이 있다. 행위자란 어떤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행동하는 존재다. 위의 예에서 사자가 행위자다. 인간은 위험에 처할수록 행위자를 바라보는 쪽으로, 즉 때때로 거짓도 믿는 쪽으로 균형을 옮겼다. 따라서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를 안 지내는 실험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것이 종교의 출발일 것이다.

종교는 사람들을 한데 묶어주고 협력을 촉진했다. 그렇게 종교적 결속력이 높은 집단이 부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협력은 진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획득될 수 있다. 인간은 상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자신에게도 유리하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굳이 종교를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 스스로 선량하고 친절하게 진화할 가능성은 충분히 열려 있다.

그동안 우리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하던 일들이 사실로 밝혀지곤 했다. 진화론 등 과학적 발견 덕분이다. 이처럼 우리의 근본적 의문을 풀어주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과감한 과학적 도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설마 그럴 리가 없어!”를 되뇌며 신을 붙들고 있다. 그런 비합리적 집착을 버려야 우리가 비로소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거세다. ‘유한한’ 인간은 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종교의 본질은 과학적 실증이 아니라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다. 또한 오늘날 많은 신학자는 과학적 성과까지 과감하게 수용한다. 성경의 천지창조 6일은 144시간이 아니라 상징적인 시간이다. 지금도 천지창조는 진행 중이며, 빅뱅이나 진화도 창조의 도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이 꽤나 설득력 있어 보인다. 오늘날 세속적 국가들이 종교적 국가들보다 대체로 더 자유롭고 부강하다. 서구 선진국들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서구의 소비주의와 물신숭배는 제국의 말기적 현상에 가깝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특히 인간은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는 능하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데는 젬병이다. 과학도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과학적으로 충분히 설명된다고 해도 여전히 거대한 물음이 남는다. 빅뱅 이전은 무엇이며, 박테리아 이전은 무엇인가. 이 거대한 배경은 도대체 어떻게 설치된 것인가. 과학은 이런 물음들에 대해서도 결국에는 답을 내놓을 것인가.

흔히 21세기는 2019년에 시작됐다고 한다. 그만큼 코로나19의 충격이 크다. 이런 팬데믹 시대가 종교의 길과 과학의 길을 다시금 묻고 있다. 양자의 결별이냐 동행이냐는 인류문명에 주어진 무거운 과제다. 이 와중에 교회가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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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선 인문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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