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년 전 지리산 전문 산꾼들이 반야봉 아래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박영발 비트’는 해발 1300m의 자연동굴이다.(왼쪽) ‘박영발 비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m 높이의 바위를 기어올라가 오른쪽 틈새로 들어가야 한다.
10여년 전 지리산 전문 산꾼들이 반야봉 아래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박영발 비트’는 해발 1300m의 자연동굴이다.(왼쪽) ‘박영발 비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4m 높이의 바위를 기어올라가 오른쪽 틈새로 들어가야 한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 일대에서 죽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림잡아 4만명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근거는 이렇다. “2000년대 초반 지리산 생명평화운동을 할 때 지리산에서 죽은 빨치산과 군경 토벌대의 위령제를 합동으로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이때 양쪽 죽은 사람 가족들의 위령제 신청을 받아보니까 그 숫자가 4만명쯤 되었습니다.” 지리산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지리산 시인’ 이원규(59)의 증언이다.

왜정 때 보광당이 숨어든 지리산

왜정 때 지리산에는 보광당(普光黨)이 숨어 있었다. 일제의 학병 징용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었던 하준수가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병주의 소설 ‘지리산’에도 나왔던 하준수는 당수도(唐手道)의 고단자이기도 했는데, 함양의 3000석지기 부잣집 아들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광복 이전에 일찌감치 지리산에 숨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광복 이전에 지리산에 숨었던 사람들은 산속에서 서로 알게 되어 ‘보광당’을 결성하였다. 이 보광당 멤버들을 속칭 ‘구빨치’라고 부른다. 반면 광복 이후로 지리산에 들어온 빨치산들은 ‘신빨치’라고 한다.

지리산 빨치산 총대장이었던 이현상이 빗점골에서 1953년 9월에 죽었다. 이현상 이후에도 박영발이 남아 있었다. 이현상보다는 카리스마가 약간 덜했지만 나름대로 한가닥했던 박영발은 1954년 3월에 죽었다. 이현상이 죽고 난 후에도 대략 6개월이나 더 버티다가 죽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이 어떻게 6개월이나 더 버틸 수 있었을까다. 수만 명의 군경 토벌대가 이 잡듯이 지리산을 뒤졌는데, 어떻게 그 수색에서 자신의 몸을 숨기고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은신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다.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빨치산 박영발이 숨었던 비트(비밀 아지트의 준말)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 문제가 오랫동안 빨치산 연구자들에게 관심사였다. 그러나 쉽게 찾지를 못하였다. ‘난공불락의 어떤 요새에 있었던 것일까?’ 그러다가 지금부터 10여년 전쯤 지리산 전문 산꾼 20여명이 반야봉 밑을 샅샅이 수색하였다. 증언자의 말을 참고로 하여 반야봉 밑의 암벽들을 그야말로 바늘 찾듯이 찾아나선 것이다. 20여명의 산꾼들이 일주일간을 헤맨 끝에 드디어 찾아냈다. 바로 ‘박영발 비트’였다.

박영발 비트는 해발 1300m 지점에 있는 자연동굴이었다. 도대체 어떤 동굴이었길래 그 수많은 토벌대들이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일까. 박영발은 토벌대에 발각되어 사살당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폭하였다고 전해진다. 심한 부상이 있었고, 포위망은 점점 좁혀오고, 먹을 것도 여의치 않으니까 스스로 자폭한 것이다.

박영발 비트는 거대한 암벽의 중간쯤에 있었다. 그 위치가 너무나 기묘하였다. 동굴 입구를 찾기가 어려운 구조였던 것이다. 우선 바위 절벽 가장자리의 움푹 꺼진 곳으로 내려가야만 하였다. 틈새는 사람이 들어갈 생각을 내기 어려운 형태였다. 동물이나 들락날락할 만한 틈새였다. 3m 깊이의 바위 틈새를 사람이 아래로 내려가야만 한다.

그다음에 다시 4m 높이의 바위를 올라가면 사람이 기어 들어갈 만한 틈새가 보인다. 바위를 올라갔을 때 이 틈새가 정면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틀어야 틈새가 보인다. 그러니까 4m를 올라갈 생각을 하기도 어렵고, 올라갔어도 다시 오른쪽으로 짐승들이나 들어갈 만한 구멍 크기를 보고 여기에 사람이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기도 어렵다.

이 구멍은 성인 남자가 겨우 앉아 있을 만한 높이의 공간이다. 성인 남자 2~3명이 서지는 못하고 앉아 있을 만하다. 그리고 다시 그 공간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칸막이 바위가 있었다. 칸막이 바위를 기어서 앞으로 들어가면 다시 공간 하나가 나타난다. 성인 2명이 앉아 있을 만한 공간이다. 이 2명이 앉아 있을 만한 최종 공간에 박영발이 숨어 있었다. 밖에서 전혀 빛이 들지 않는 지하 암흑 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밖에서는 절대로 존재를 알아차릴 수 없는 공간이다. 외부의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공간이다. 3중 암벽으로 공간이 차단되어 있는 셈이니 당연하다. 외부에서는 이 안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을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공간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 박영발 은신처의 암굴이 습기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위굴은 대개 축축한 습기가 많다. 습기가 많은 곳에서는 사람이 장기간 거주하기 힘들다.

습기가 차지 않는 암흑 공간

그런데 박영발 비트는 희한하게도 습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점이 참 독특하였다. 이 삼중 구조의 바위굴이 박영발 비트였다는 증거는 이른바 ‘통신선’이다. 암굴 입구 벽에 전깃줄 같은 통신선 여러 가닥이 설치되어 있었다. 빨치산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반야봉 정상에서 여기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통신선이라고 한다. 빨치산 전성기 때 반야봉 정상에서 무전을 때리면 이 굴 속에서 무전을 바로 받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빨치산 비트를 찾아 헤매는 매니아들을 따라서 우연히 박영발 비트를 찾아갔던 필자는 비트를 보는 순간 ‘여기야말로 개운조사가 수도했던 금강굴이다’라는 느낌이 강하게 올라왔다. 1790년생으로 200살이 넘는 개운조사가 수도했던 금강굴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 불가·도가의 매니아들이 금강굴을 찾아왔다. 반야봉 밑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장소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영발 비트는 내가 보기에 개운조사 금강굴에 해당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선 신선이 되는 공부의 깊은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햇빛이 들지 않는 암흑 공간이 필요하다. 인간 무의식에 깊이 내려가기 위해서는 빛이 없는 암흑의 수행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1만년 넘는 전통이기도 하다. 이런 암흑 공간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야호선(野狐禪) 수행터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깊은 삼매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외부인이나 또는 동물들이 그 삼매 상태의 도사를 건들면 안 된다. 방해받지 않는 절대적인 안정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려면 이러한 공간은 바위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주 난공불락의 위치에 자리 잡은 동굴이어야만 한다. 박영발 비트는 이 조건에 아주 딱 들어맞는 위치에 있었다.

이 금강굴은 금강대(金剛臺)라고 하는 바위 언덕의 중간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위굴을 나오면 금강대가 있고, 이 금강대에 앉아서 좌선을 하거나 밤에 달을 감상하며 놀기에는 아주 적당한 장소였다. 그리고 금강대 앞을 영원봉을 비롯한 지리산의 여러 영봉들이 감싸고 있었다.

빨치산 추적자들은 개운조사의 도가 수행 전통을 모르고, 개운조사 추종자들은 빨치산을 몰랐다. 희한하게도 신선의 수행터와 빨치산의 비트가 동일 장소였던 것이다. 삶의 커다란 아이러니다.

조용헌 강호동양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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