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에서 만난 박정태 작가. ⓒ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경기도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에서 만난 박정태 작가. ⓒ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홍 반장, 진짜 서울대학교 공대 나왔어? 그런 스펙을 가지고 왜 이러고 살아?”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한 장면. 바닷가 마을에서 하는 일 없이 백수로 지내면서 이집저집 참견하고 돌아다니는 주인공 ‘홍 반장’에게 여주인공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는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어보라고까지 하는 그녀에게 홍 반장은 “세상에는 돈, 성공 말고도 중요한 게 많다”고 외친다. 그런 홍 반장이 들고 다니는 책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다. 미국의 사상가·시인·철학자 소로(1817~1862)가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혼자 사는 생활을 기록한 책이 ‘월든’이다. 홍 반장이 지향한 것이 아마 현대 한국판 ‘월든’의 주인공 아니었을까.

하지만 홍 반장이 살아야 하는 한국의 현실은 ‘월든’보다는 ‘오징어게임’에 가깝다. 거액을 위해 목숨까지 내건 경쟁을 벌이는 서바이벌 드라마는 넷플릭스 역대 최대 실적을 내며 ‘현실의 축소판’이라는 공감대를 낳았다. 룰을 지키지 못하면 가차없이 ‘탈락’하는 극상의 경쟁 구도, 갖은 인맥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내 편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 운과 편법이 난무하는 모습에 전 세계가 공감했다. ‘오징어게임’이 흥행하는 시대에 홍 반장과 소로의 삶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미국 사상의 원천으로 꼽히는 소로의 명저 ‘월든’이 재미없고 어려운 책으로 여겨지는 것도 현대에서 선뜻 공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로 전문가’ 박정태(59) 작가의 말은 다르다. 박 작가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소로가 갖는 의미가 더 크다”고 강조한다. 경쟁의 수위가 멈출 줄 모르고 올라가는 것에 지친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집중하고자 하는 요구가 커졌다는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만 해도 치열하게 노력하는 게 미덕이었다. 속임수와 사기까지도 용인해주는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정의롭고 공정한 가치가 더 높이 평가받는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성만을 앞세우기보다는, 어느 정도만 만족하는 수준에서 간소하게 살고 나머지 시간에 자기에게 더 집중하고자 하는 요구가 커지는 거다.”

박 작가는 ‘오징어게임’에 대해서도 다소 색다른 분석을 내놨다. 1849년 이후 금광을 찾아 서부로 몰려간 미국의 ‘골드러시’와 비슷한 한탕주의·금권주의에 대한 무의미함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인간성을 지키는 자기만의 선택을 한 주인공이 공감을 받았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 성기훈은 경쟁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버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거액의 돈을 받은 후에도 큰 일상의 변화 없이 살아간다. 박 작가는 “중요한 것은 게임 그 자체보다 과정과 결말”이라며 “456억원을 받았다고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거액의 돈은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소로의 철학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는 설명이다.

이런 생각 때문인지 그는 더더욱 지금 소로에 열중했다. 지난 9월에는 700쪽에 달하는 소로 평전(‘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연의 순례자’·굿모닝북스)을 번역 출간했다. 10년이 넘도록 소로의 일생과 ‘월든’의 철학을 공부해오며 소로 관련 책들을 써온 그가 다시 한번 소로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그동안 박 작가는 소로의 핵심 철학을 간결하게 정리한 책(‘내 인생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 ‘월든’의 주요 구절을 해설과 함께 엮은 책(‘홀로 천천히 자유롭게’) 등을 출간했고, 소로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월든 스쿨’의 교장도 맡고 있다. 박 작가는 지난 10월 20일 인터뷰에서 “로버트 리처드슨이 쓴 이번 소로 평전만큼 소로의 지적 일생을 잘 다룬 책이 없어 2008년부터 저작권을 요청했는데 기쁘게도 지난해 답신을 받았다”고 했다.

흔히 소로를 떠올리면 외딴곳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며 자급자족하는 ‘자연인’의 삶을 연상한다. 그러나 소로는 숲속 생활을 하면서도 속세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다. 월든 호수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 도심 기차역에서 1.25마일(1.93㎞) 떨어져 있어 걸어서 30분이면 가는 거리다. 박 작가에 따르면, 소로가 속세와 연을 끊고 혼자 지냈다는 것도 잘못 알려진 사실이라고 한다. 소로는 친구가 올 때를 대비해 여분의 의자를 갖춰놓았고, 오두막에 살기 여의치 않을 때는 가족들이 사는 콩코드의 인근 집에 가 생활하기도 했다. 2년2개월의 오두막 생활을 청산한 후에는 측량 등으로 돈을 벌기도 했다. 박 작가는 “소로는 돈과 직업도 없이 ‘자연인’으로만 살라고 한 게 아니다”라며 “돈과 직업 등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구인데,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면서 ‘도구의 도구’가 되는 것을 우려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간소한 수준의 돈을 가지고도 행복하고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인생 실험’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나를 찾는다는 건 내 시간을 갖는 것”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연의 순례자’(굿모닝북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자연의 순례자’(굿모닝북스)

‘소로비언(Thoreauvians·소로를 사랑하는 팬)’을 자처하는 박 작가 역시 이 ‘특이한’ 실험을 몸소 실천하는 중이다. 인터뷰 장소였던 경기도 고양시 일산 호수공원 일대가 그의 월든호수라 할 수 있다. 그는 “오후에는 꼭 한 바퀴씩 공원 일대를 뛰는데, 신기하게도 날마다 풍경이 달라지는 게 보인다”며 ‘숲속에 들어와 사는 매력 중 하나는 봄이 오는 것을 지켜볼 기회를 갖는 것’이라는 소로의 말을 인용했다. 꼭 공원에서 인터뷰하기를 원했던 그는 걷는 중에도 백송, 칠엽수, 단풍 등 주변 식생에 대해 열정적으로 관찰하고 설명했다. 그는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잔뼈가 굵은 기자 출신이다. 16년을 기자로 일했고 부장이라는 직함까지 달았다. 그러나 2004년, 한창 일할 나이인 42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10년간 ‘월든’을 공부했다. ‘왜 그만뒀느냐’는 질문에 그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답했다.

“기자 생활을 하는 내내 여유가 없었다. 하루에 12~13시간씩 일하고 어떻게 여유를 갖겠나. 시간이 있다 해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점심때 잠깐 낮술 한잔할 시간이나 일하다 눈 붙일 시간은 있어도, 회사 바로 앞에 있는 경복궁 구경 갈 시간은 없었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그랬던 거다. 말은 ‘독자에게 필요한 기사를 쓴다’고 했지만 ‘정말 그런가, 밥벌이하느라 이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다. 나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내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다.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불안감에 오히려 더 몸을 혹사했다고 한다. ‘직장이 없으니 뭘 먹고 사나’라는 생각에 번역하고 책 쓰는 등 일에만 매진했다. 퇴사 후 1년 동안 쓴 200자 원고지가 5000~6000매에 달한다고 했다. 디스크가 재발하고 잇몸이 흔들려 멀쩡하던 이가 빠질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퇴사 직후 사둔 ‘월든’을 꺼내 들고 찬찬히 다시 읽기 시작했다. 퇴사하고 2년이 지난 후에야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고, 그 이후로 조금씩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변했다. 담배를 끊고 호수공원 둘레 5㎞를 매일 뛰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는 반 바퀴도 못 뛰었는데 환갑이 가까워지는 지금은 두 바퀴까지도 뛸 수 있게 됐다.

그는 “소로가 얘기했던 ‘눈을 뜨는 것’ ‘의도적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거쳐 지금까지 왔다”며 “누구나 각자 일상을 충실히 살면서도 소로의 삶을 실천할 수 있다는 걸 알면 ‘월든’이 다르게 읽힐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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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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