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에 나온 영화 ‘필라델피아’가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앤드루 배킷(톰 행크스 분)은 로펌의 촉망받는 변호사다. 하지만 그는 동성애자이며 에이즈 환자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긴 채 일에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맡은 사건의 고소장이 접수 하루 전날 감쪽같이 사라져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조직에 큰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전격 해고당한다. 그러나 배킷은 고소장이 사라진 것부터가 에이즈 환자인 자신을 내쫓기 위한 조작이라고 믿게 된다. 배킷은 한때 경쟁자였던 변호사 조 밀러(덴젤 워싱턴 분)를 찾아가 사건을 맡아달라고 의뢰한다. 밀러는 배킷이 에이즈 환자라는 이유로 사건 맡기를 거절한다. 하지만 밀러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판례집을 뒤지는 배킷을 만나며 마음이 흔들린다. 결국 배킷의 신념과 확신에 끌려 소송을 맡아 법정싸움에 들어간다. 밀러는 배킷이 해고당한 이유가 능력 문제가 아닌 에이즈 때문이며, 질병으로 인한 해고는 차별이며 위법임을 입증해 승소한다.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여운이 길었다. 여기에는 톰 행크스의 탁월한 연기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왜 영화 제목을 ‘필라델피아’라고 붙였을까. 필라델피아는 1776년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상징적인 공간이다. 독립선언서는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로 시작한다.

주말에 숲속을 산책하다가 불현듯 이 영화가 떠올랐다. 문재인 정부에서 발탁된 피우진 보훈처장이 계기를 제공했다. 알려진 대로 피우진 보훈처장은 한국 최초의 여성 헬기조종사다. 2002년 유방암이 발병해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는 얼마 뒤 임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해 다른 한쪽 유방도 절제했다. 2005년 군에 복귀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역 명령이었다. 암 병력이 있거나 유방을 절제했을 경우 전역하도록 한 군 인사법 시행규칙 때문이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이야기다.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암수술을 받고 나서 근무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데 퇴역 처분은 부당하다”며 그는 국방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그는 승소했고 2008년 5월 복직했다. 그러나 계급(중령) 정년에 걸려 2009년 전역했다.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전근대적인 인사법 시행규칙은 누가 만들었나. 남성에 의해, 남성을 위한 게 군 인사법 시행규칙이다. 오랜 세월 군(軍)과 공직사회는 남성 전용(專用) 공간이었다. 여성은 하위직을 맴돌았다. 군내에서 성차별은 말할 것도 없고 성폭력이 횡행했다. 성차별이 만연한 조직에서는 남성 상관에게 잘 보이려 여성이 성차별 논리를 흉내 내는 일까지 발생한다.

누구나 입만 열면 선진사회를 말한다. 1인당 국민소득 기준으로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지 오래다. 그러나 차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국 사회는 여전히 후진국이다. 성별, 외모, 질병, 장애, 종교, 피부색, 성적 기호 등을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다. 인권(人權)은 이념을 초월한 상위 개념이다. 선천적인 것으로 인해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가 진정한 선진사회다. 한국 언론은 탄핵정국 당시 여성 대통령에 대한 인권 침해 보도를 서슴지 않았다. 알권리 운운하며 언론 윤리를 내팽개쳤다.

인사청문회가 시작되었다. 위법 사실은 엄정하게 밝히되 인권 침해 소지가 있는 보도는 삼가길 바란다.

키워드

#편집장 편지
조성관 편집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