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라는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1983년 작품으로 그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수작입니다.

뒤늦게 이 영화를 보면서 강한 문화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는 전통시대 한 척박한 일본 산골이 배경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 묘사된 일본인의 삶이 우리와는 너무 달랐습니다. 기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낯선 풍습과 규범이 보는 내내 속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마 감독은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본성을 그리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저에게는 인간의 보편성보다는 일본이라는 특수성에 더 눈길이 갔습니다.

이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한 섬 같은 산촌에서 나름대로의 생존 법칙을 만듭니다. 예컨대 식량을 훔치다가 들키면 도둑질한 가족은 전체가 생매장을 당합니다. 식량이 부족한 겨울에 세 번째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낳자마자 논바닥에 버려지고 여자아이는 소금 한 줌 값에 소금장수에게 넘겨집니다. 가문을 이을 장남만이 결혼하여 아이를 가질 수 있고, 차남부터는 평생 장가도 못 갑니다. 충격적인 것은 고려장과 성욕입니다. 부모가 70세가 넘도록 살아 있으면 장남은 노인을 지게에 메고 나라야마산 정상에 내다버리고 와야 합니다. 영화 속 차남은 성욕을 주체 못 해 수간을 일삼는데 그걸 안타까워하는 형이 아내에게 동생의 성욕을 풀어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걸 안 어머니가 족보가 엉망이 될 것을 우려해 말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 속 삶이 사실과 얼마나 부합되는지 궁금해 일본사를 전공하는 박훈 서울대 교수에게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박 교수는 “19세기 에도시대가 영화의 배경”이라며 “실제 전통시대 일본인들은 그렇게 고립된 촌락에서 그들만의 방식대로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한성에서 시골 촌구석까지 유교 규범이 관통하던 조선과 비교하면 에도시대 일본은 우리와 무척이나 달랐다는 겁니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서 일본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가를 또 한 번 깨달았지만 아직도 저한테 일본은 알 듯 모를 듯한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일본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유독 많습니다. 하지만 일본을 진짜 아는 사람이 드물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다시 박훈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한국인처럼 일본에 대해 막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지식이 빈약한 경우는 달리 찾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특히 박 교수는 50~60대가 일본과 단절된 것을 우려합니다. 일제를 경험한 윗세대나 일본문화 홍수 속에서 살아온 젊은 세대와 달리 일본과 끊어진 세대가 지금 우리 사회의 중추라는 지적입니다. 50대인 저 역시 일본은 학창 시절 내내 별다른 감흥 없는 무채색의 나라였습니다. 특별히 가보고 싶지도 않고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나라였습니다. 그런 일본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대학 복학생 시절, 부산에서 배를 타고 처음 일본 여행에 나설 때부터였습니다. 그 첫 여행에서 그들의 거리 간판이 얼마나 세련되고 화려한지 깨닫자 바다 건너 최루가스로 뒤덮인 조국이 거꾸로 무채색으로 비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그들과 우리의 다름을 알아가는 첫 경험이었습니다.

이번주 커버스토리가 ‘아베의 난’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한 그 나라의 수장이 종국적으로 무엇을 겨누고 있는지부터 바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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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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