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의 한 장면.
영화 ‘1987’의 한 장면.

한국의 공권력 전체가 흔들리고 있다. 사법 집행의 두 축인 검찰과 경찰이 대립하더니, 이젠 법무부와 검찰이 갈라서고, 검찰도 대검과 서울중앙지검이 대립·분열하고 있다. 검찰총장 지시를 서울중앙지검장이 무시하고, 검찰이 재판에 회부한 ‘범죄혐의자’ 청와대 비서관이 공개적으로 “검찰총장 손을 보겠다”고 벼르고 있다. 모두 건국 이래 처음 겪는 상황이다.

이쯤되면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사회질서 유지, 법치주의를 대변하는 공익의 대표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나라 정의(正義)는 어디 있는가. 바로 청와대에 있다. 청와대 의중대로 행하면 정의이고 그러지 않으면 불의(不義)다. 바로 이것이 2020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새삼 1980년대 검찰 출입기자 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서슬 시퍼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치하였다.

법적으로는 전 세계 어느 검찰보다 막강한 한국 검찰이지만 그때는 청와대 지시를 잘 따르는 얌전한 ‘법률 집행자’였다. 중앙부처 과장급 이상을 구속하려면 청와대 결재를 받아야 했다. 법보다는 힘이 우선되던 때였다. 검찰은 국가권력을 지탱하는 안기부(현 국가정보원), 권력의 핵심인 군부 파워 앞에서 자신들의 헌법적 권리 행사에 늘 눈치를 봐야 했다.

당연히 ‘성역’은 존재했다. 권력자나 그 주변들이다. 그러나 권력 엘리트들 역시 서로 경쟁하고 견제하는 사이라 어느 한쪽이 독주하거나 함부로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는 안기부나 검찰, 경찰, 보안대 등의 역할도 컸다. 지금은 당시 정보·수사기관들을 오로지 독재정권의 하수인 격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그들이 각자 경쟁적으로 올린 권부 관련 정보나 첩보는 권력자들의 국정운영 판단과 여론 향배에 중요한 자료가 됐다.

권력의 실세가 이런 정보들을 몽땅 통제·관리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누구도 이들 정보·수사기관 모두를 자기 편으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록 독재 치하였지만 북한을 비롯 다른 독재국가와 차별되는 우리네 상황이었다. 심지어 전두환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2년 건국 이래 최대 금융사기 사건으로 불리게 된 ‘이철희·장영자’ 사건이 터졌을 때 권력 핵심부는 이를 덮으려 했다. 전 대통령의 처외삼촌 등 인척과 군 선후배 등이 다수 관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은 소문처럼 여론으로 전파되었고 결국 검찰이 전면에 나서 수사를 해야만 했다.

검찰이나 정보기관들은 자신들의 정보가 상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언론에 흘렸다. 비록 독재정권에서 일하고는 있지만 사실(fact)을 사실로 보는 직업정신과, ‘이래서는 안 된다’는 개인적 정의감이 발동한 것이다. 그리고 언론은 당시 통제받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사실을 전파시키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지금 매우 유의미하게 보아야 할 점은 역대 군사독재 정권들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운 것이 여론의 향배였다는 점이다.(지금 민주사회라고 하지만 청와대 입맛에 맞지 않는 여론은 ‘적폐’나 ‘불의’로 비판받는 상황과 비교해볼 만하다.)

그런 태도는 아주 중요한 민주정치의 시발이다. 때로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해 무자비하게 대할 때도 있었지만 제일 중요한 과제는 늘 여론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언론 통제도 그런 차원이었다. 자기네에 불리한 기사가 못 나가도록 회유·협박·탄압은 했지만 일단 보도된 내용이 사실일 경우 이를 아니라고 짓뭉개거나 해당 언론·수사 기관을 정면으로 공격한 적은 드물었다. 설령 당시에는 은폐·조작으로 몰더라도 결국 여론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굴복했다.

만약 전두환 정권 시절 조국 같은 사건이 터졌으면 어떻게 됐을까. 자녀 입학을 위해 서류를 위조하고, 청와대 수석 아내가 사모펀드를 운영하며, 집안에서 운영하는 사학의 비리혐의가 드러나는 ‘3중 비리 세트’를 청와대가 외면하고 오히려 언론과 검찰을 파렴치한 집단으로 몰아갈 수 있었을까.

1987년 6월항쟁과 민주화를 이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권인숙 부천서 성고문 사건의 전모를 파헤친 것도 검찰과 언론이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남영동 경찰 대공분실로 끌려가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건도 이를 대검공안4과장(이홍규)이 언론(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에 알렸고 이후 언론이 앞다투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부검 당직검사(안상수), 서울지검 형사2부장(신창언), 대검 중앙수사부1과장(이진강), 나아가 서울지검장(정구영) 등의 합리적 판단과 노력,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적어도 A라는 팩트를 B라고 하자는 권부 압력에 굴하지 않았고, 이를 지혜롭게 언론에 전하려고 했고, 한편으로는 자기 권한을 통해 이를 입중하려는 절차적 노력을 했다.

이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에선 영화배우 하정우가 맡은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이 이 사건을 파헤치는 검찰 주역으로 나오고 있는데 나는 좀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당시 시국사범 처리의 주역이었던 최 부장보다는 정구영 서울지검장을 비롯 다른 검찰 인사들의 역할이 더 컸다고 본다.

1986년 6월 ‘위장취업 근로자’ 서울대생 권인숙양을 성추행하면서 취조를 했던 부천서 문귀동 형사의 성고문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을 담당한 인천지검 김수장 부장검사(서울지검장 역임)와 담당 검사들은 권력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관련자들의 알리바이 진술을 토대로 역추적한 결과 문귀동의 거짓 진술을 밝혀내고 사건 전모를 파악했다. 다만 권부의 압력에 의해 축소 발표를 했으나 결국 민주화 이후 2년 뒤 이들 수사를 바탕으로 사건 전모는 밝혀지고 문귀동은 처벌된다.

그때 취재기자였던 나는 인천지검 검사들로부터 이런 사실을 다 들었다. 그들이 그런 민감한 내용을 내게 다 이야기해준 것은 독재정권하이지만 자신들의 직업 소명의식과 정의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이런 사실을 취재하고도 기사는 나가지 못했다. 당국의 보도통제 때문이었다. 당시 선배 데스크가 “어렵게 취재했는데 나중에 보자”고 미안해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돌이켜보면 삶은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진실, 거짓, 용기, 비겁, 정의, 불의가 뒤섞이는 그 안갯속, 진흙탕 같은 곳을 헤쳐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때로 울분을 토하고, 때로 양심에 찔리고, 때로 미안해하고, 때로 자랑스러워하면서 말이다.

함영준 마음건강 길 대표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