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전염병 예방을 위해 강조하는 구호이자 패러다임이 있습니다. WHO의 페이스북에 들어가도 큼지막하게 쓰여 있어 눈에 잘 띄는 문구입니다. 바로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하자(Preotect others from getting sick)’입니다. 일반적인 감기와 독감 등 모든 전염병의 예방 수칙으로 강조되는 건데, 이를 곱씹어 보면 뜻밖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이 문구는 ‘나를 지키자’는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요즘, 매스컴에 등장하는 각종 예방 수칙들은 ‘나를 지키자’에 집중돼 있습니다. ‘손을 자주 씻어라’ ‘마스크를 착용하라’ 등 전문가들이 권하는 예방 수칙들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외부의 바이러스가 나한테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들인 셈입니다.

하지만 WHO의 구호는 정반대입니다. 내가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수도 있다는 걸 전제로 다른 사람을 보호하자는 취지입니다. 이 정신에 비춰 보면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는 행위도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보호하려는 조치들입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마스크 착용은 실제 외부 바이러스 차단보다는 나한테 있을지 모르는 바이러스를 외부에 퍼뜨리지 않도록 막는 데 훨씬 효과적입니다.

WHO가 이 구호를 강조하는 이유가 뭔지 최근 대구에서 벌어진 사태를 지켜보면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듯 확진자가 폭증하는 대구·경북 일대에서 ‘수퍼 전파자’는 31번 여성 확진자였습니다. 이 여성은 오한 증상이 나타나기 하루 전인 지난 2월 6일부터 격리된 17일까지 무려 열흘간 곳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심지어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도 빠져나와 사람이 밀집한 교회로 가 두 차례나 예배를 봤고, 그 교회는 우려대로 바이러스 최대 전파지로 떠오르는 중입니다. 이 여성은 고열과 폐렴 증상까지 보여 병원 측으로부터 “코로나19 검사를 받아보자”는 제안을 받고도 세 차례나 거부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이기적인 행동이 가능했을까요. 만약 이 여성이 WHO의 예방 수칙을 교육받고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다른 사람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보호하자’는 WHO의 예방 수칙에는 ‘껴안고 키스하고 악수하는 등 다른 사람들과의 밀접한 접촉을 피하자’ ‘기침을 하고 코를 풀기 전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지자’는 등 구체적인 행동 지침들도 따라붙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전염병 예방 수칙의 기본인 셈입니다. 이런 기본에 비춰 보면 31번 확진자는 그야말로 최악의 바이러스 전파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 병원 밖에서 발열 체크를 요청해 병원에 들어가지 않은 채 보건소에서 확진 판정을 받은 대구의 한 여대생 사례는 ‘모범적’이라고 조명받고 있습니다.

이제 코로나19 사태는 가장 우려할 만한 단계로 진입 중인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어디서 바이러스가 옮겨왔는지 불분명한 확진자들이 속출하고, 모두가 모두를 두려워하는 사태로 번지는 중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WHO가 강조하는 패러다임대로 다른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는 한 어디서고 수퍼 전파자는 또 나오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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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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