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날 오후 윤석열 검찰총장이 ‘드디어’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여권이 추진해온 중대범죄수사청을 막기 위해 “직을 걸겠다”고 다짐하더니 진짜 직을 걸어버렸습니다. 임기 142일을 남겨두고 바람 잘 날이 없던 자리에서 중도하차해 버린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광석화처럼 사표를 수리해 버린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윤 전 총장은 이날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1층 현관에서 발표한 입장문을 통해 “이 나라를 지탱해온 헌법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며 “이 사회가 어렵게 쌓아올린 정의와 상식이 무너지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검찰에서 제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면서 “어떤 위치에 있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고 했습니다.

윤 전 총장이 ‘정치를 하겠다’고 확답하지 않아 앞으로의 진로를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가 사퇴를 결심하기까지 겪어온 일들을 보면 그는 이미 대권행보를 시작한 걸로 보입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사퇴의 변은 사실 대통령의 취임사쯤에서나 봄 직한 말입니다. 이런 대의명분을 이뤄낼 수 있는 자리 역시 우리 상황에서 대통령 말고는 별로 보이질 않습니다.

윤 전 총장은 평소 ‘나는 정치와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가끔 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가 실제 대권을 향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면 그건 순전히 권력 탓이라는 시각이 많습니다. 인사권을 빼앗고, 수족을 자르고, 급기야 수사권 박탈까지 밀어붙인 여권이 그의 정치적 몸집과 맷집을 키워준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추미애 전 장관과 맞설 때 차기주자로서의 지지율이 치솟은 것이 방증이라면 방증일 겁니다.

여권 인사들을 만나보면 그동안 ‘윤석열 변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별로 보질 못했습니다. 지지율로 가늠하는 정치적 몸집은 부풀려진 것일 뿐 정치적 내공과 경험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더군요. 정치판에 뛰어든 순간, 그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정치인과 검사, 정치와 수사는 솜씨를 발휘하는 판단력과 무기가 판이하긴 합니다.

윤석열 전 총장은 지난 대선에 뛰어들었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종종 비교되기도 합니다. 반 전 총장 역시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대선가도에 뛰어들었지만 불과 2개월 만에 불출마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그는 상대 진영이 파고드는 검증의 칼날을 견디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석열도 대선판에 뛰어들었다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까요. 윤석열과 반기문은 같은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보입니다. 정치 경험과 인맥이 부족해 주변에 외교관들이 주로 포진했던 반 전 총장처럼 정치판에 뛰어든 윤 전 총장 주변에는 법조인들이 즐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말 하나, 행동 하나로 지지율이 널뛰기하는 대선판에서 약점이라면 약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점도 보입니다. 온화함과 실력을 앞세웠던 반 전 총장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던 권력을 향한 분노가 윤석열에게는 보입니다. 사퇴 전 쏟아냈던 다소 거친 그의 말에 열광하는 지지자들이 윤석열 경쟁력의 핵심을 잘 보여줍니다. 역설적이지만 ‘반문(反文) 전사’라는 그의 정체성은 이 정권이 키워낸 차기주자 윤석열의 가장 큰 무기일지 모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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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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