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핀란드에서 귀국한 대학 후배와 저녁을 먹다가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핀란드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 닮았다”고 인사를 건네면 그렇게 좋아한다는 겁니다. 핀란드에서 3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이 후배는 몇 년 전만 해도 핀란드인이 가장 좋아하는 동아시아 국가가 일본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 닮았다”고 하면 좋아하던 핀란드인들이 어느샌가 “한국 사람 닮았다”고 하면 좋아하는 쪽으로 확 바뀌었다는 얘기입니다.

핀란드인들이 한국을 좋아하는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BTS와 갤럭시폰, 거기다 최근의 ‘오징어게임’까지…. 요즘 핀란드인들에게 한국은 뭔가 멋있고 세련된 나라로 비친다고 합니다. 핀란드 젊은이들이 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나라 리스트에서 항상 상위에 오르는 것도 한국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586세대인 저는 한국이 제가 안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위상이 커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지난 9월 서울대동아문화연구소가 주최한 ‘한·일 대학생의 허심탄회’라는 토론회 감상평을 페이스북에 올린 걸 흥미롭게 봤습니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국 대학생들과 일본 대학생들의 인식 차이가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토론회에서 일본 대학생들은 여전히 식민지 시대의 가해자· 피해자 논리에 따라 한국에 어떻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하는지 얘기했다는데, 놀라운 건 이런 발언에 대한 한국 대학생들의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한국 대학생들은 가해자· 피해자 논리에만 집중하면 인류사의 비극이었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 있다면서 일본 역시 식민주의의 피해자 아니었느냐는 ‘대범한’ 주장을 폈다고 합니다. 특히 일본 대학생들이 한국에 대한 사죄 의식 없이 마냥 BTS를 쫓아다니는 일본의 ‘철없는’ 젊은이들을 비판하자 한국 대학생들은 ‘그런 대중문화 소비자들한테까지 역사의식을 강요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박을 했다는 겁니다.

언뜻 보면 한국 대학생들의 역사의식이 얕은 것 아니냐는 비판을 가할 수 있지만, 우리 젊은이들의 생각이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한 수준은 넘어섰다는 것이 저와 이 얘기를 전해준 박 교수의 판단입니다. ‘엽전’ 운운하던 열등감과 피해의식, 우물 안 개구리 식의 민족주의에 빠져 있던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에 비해 요즘 젊은이들이 훨씬 더 시야가 넓고 성숙해 보여서입니다. 이 역시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풍요와 자부심 속에서 구김 없이 커온 덕분 아닌가 싶습니다.

‘국뽕’처럼 들릴 수 있는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처럼 커가는 대한민국을 이끌 새로운 리더십을 선택할 대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치열하게 전개되는 여야 경선을 보면서 정권교체와 정권재창출을 바라는 유권자들은 특정 후보에 열광하지만 아직 어느 쪽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고 흔들리는 유권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한편에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후진적인 ‘4류 정치’를 다시 개탄하는 목소리도 들립니다. 이번호는 주간조선 창간 53주년 기념호입니다. 이번호에 담긴 창간 기념 여론조사를 봐도 여야 어느 쪽을 지지할지 결정 못 한 유동층이 무려 37%나 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37%의 표심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이번 대선이 박빙의 승부로도, 아니면 한쪽의 압승으로도 끝날 수 있습니다. 37%의 유동층이 앞으로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결정을 내릴지가 궁금해집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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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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