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한국갤럽이 한국의 성인남녀 2003명에게 ‘광복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 1위는 응답자의 44%가 꼽은 박정희였고, 2위 노무현(24%), 3위 김대중(14%) 순이었습니다. 이어 응답자의 3%가 꼽은 이승만, 전두환이 공동 4위였고, 응답자의 1%가 꼽은 김영삼, 이명박이 공동 5위였습니다. 그럼 꼴등은? 지난 10월 26일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불과 0.1%의 응답률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갤럽 조사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대규모로 이뤄진 것이어서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조사를 박근혜, 문재인 등 당시에는 빠졌던 인물들도 포함시켜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사뭇 궁금합니다. 또 다른 궁금증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런 여론대로 꼴찌 대통령 평가를 받는 게 합당하느냐는 겁니다.

실제 학계에서는 이런 여론과는 반대로 ‘노태우 재평가’를 시도해온 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 강원택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이 저평가를 넘어 무(無)평가된 대통령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팩트 자체를 몰라 그가 이룬 성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지적입니다.

학자들이 평가하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아마 ‘전환기의 리더십’에 있는 듯합니다.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옮겨가던 시대정신을 꿰뚫고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었다는 겁니다. 강원택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는 6·29 선언과 관련해 “기획을 누가 했고 노태우의 작품인지 아닌지 여부는 큰 의미가 없다”며 “최종적으로 결단을 하고, 실행과 결과의 책임을 져야 했던 사람은 노태우였기 때문”이라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업적인 ‘북방정책’의 경우도 이미 취임사에서부터 그 방향을 제시하는 등 오랜 준비와 고민의 결과물이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새로운 리더십을 선택해야 하는 지금의 대선 국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건 아마 ‘물태우’의 리더십일지 모릅니다. 그는 외유내강의 성격 탓인지 ‘물태우’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헌정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상황에서 오히려 빛을 봤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등 야당 총재들의 의견을 중시한 ‘물태우’ 리더십 덕분에 남북기본합의서 등 남북관계의 성과들은 말 그대로 초당적인 이해와 협력 속에 탄생했습니다. 지금 여야 관계에서는 꿈도 꾸기 힘든 일입니다. 당시 여소야대의 13대 국회가 오히려 가장 생산성이 높았다는 평가도 나옵니다. 실제 지방자치법 제정, 집시법 개정, 청문회 도입, 의료보험 확대 등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굵직한 입법 성과들이 여야 합의를 통해 이 시기에 처리됐습니다. 이번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깨버린, 야당에 상임위원장직을 배분하는 관행도 이때 만들어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인천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서해안 고속도로 등 우리의 대표적인 인프라 건설이 모두 노태우 정권에서 추진되기 시작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합니다. 이런 과업들을 후임 김영삼 정권이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우리의 5년 단임제에서는 보기 드문 연속성과 성과를 가져왔다는 겁니다. “그는 적어도 겸손과 부족함을 알고 있었던 리더였기에 많은 업적을 만들어냈다”는 강원택 교수의 평가가 ‘물태우’ 리더십의 요체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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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장열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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