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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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사진 속에 있을 때는 추앙을 받지만 사진에서 나와 현실과 마주치면 그땐 이미 공자가 아니다. 현실은 그만큼 냉엄하다.”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박원순 변호사를 두고 단국대 장충식(80) 명예총장이 애정 어린 충고를 했다. 장 명예총장은 “박 변호사가 현실정치에 뛰어든 사실이 안타깝다”면서 “인권변호사와 시민운동가로 쌓아온 명예에 흠집이 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고도 했다.

장 명예총장은 박 변호사에게 있어서 멘토나 다름없는 존재다. 박 변호사가 단국대학교에 입학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시민운동가로 성장할 때까지 항상 그를 응원해온 은사이자 지원자였다. 박 변호사의 성장기를 듣기 위해 지난 9월 15일 서울 한남동 아파트로 찾아가 만난 장 명예총장은 아직도 박 변호사를 ‘박군’이라고 호칭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현 장호성 단국대 총장)과 경기고 동기동창생인 박 변호사에 대해 “사랑으로 대했던 학생”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정의감 강하고 내성적

장 명예총장은 박 변호사가 ‘약관(弱冠)’의 나이일 때 처음 만났다. 박 변호사가 1975년 서울대 재학시절 학생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구속·제적된 뒤 그를 받아준 사람이 장 명예총장이다. 서슬 퍼런 유신체제하에서 대부분의 대학은 운동권 학생의 입학을 꺼렸다. 정보기관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 학생의 입학을 거부하라고 일종의 ‘지침’을 내리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단국대학교는 박원순에게 문을 열어줬다. 당시 단국대 총장이 바로 장충식 명예총장이다.

장 명예총장은 “시국 문제에 대해 의견을 갖는 것은 개인의 양심 문제라고 판단했다.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권력에 무릎을 꿇는 건 대학 총장으로서 내 신념과 배치됐다. 그래서 손해를 볼 줄 알면서도 정치적 이유로 쫓겨난 교수나 학생을 받아들였다”면서 박 변호사의 입학 배경을 설명했다.

서울대 법대를 다니던 박 변호사는 단국대에 들어간 뒤 사학과로 전공을 바꿨다. 박 변호사는 1979년 입시 면접 당시 “역사 공부를 하겠다”고 밝혔지만 입학 직후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1980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그는 1985년 2월 단국대를 졸업했다. 당시 장 명예총장은 박 변호사와 자주 면담했다고 했다.

“당시 박군에게 ‘학생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사회에 나가서 뜻을 펼치라’고 여러 번 충고했다. 어느 정도 뿌리를 내린 다음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해야지 그렇지 않고 학생 때 섣부르게 행동하면 뿌리 자체가 뽑힐 수 있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있다.”

당시 단국대에서 받아들인 해직 교수와 운동권 학생들은 다행히도 다시 물의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조심하고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고 장 명예총장은 회고했다.

공부 매진… 시위에 동참한 적 없어

장 명예총장은 대학 시절 박 변호사에 대해 “공부에 매진하는 모범적인 학생이었다”면서 “기존 단국대 운동권 학생들과 어울려 시위에 동참하거나 강의를 빠진 적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입학하고 얼마 후 박군을 불러 ‘앞으로 뭘 할 거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사법고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다. 사회적으로 부당한 처우를 받는 사람들과 돈이 없어 법률적 피해를 보는 이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거였다. 입학하기 전부터 뚜렷한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박 변호사는 재학생 때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장 명예총장은 그 소식을 접하고 판사로 임관할 것을 권유했지만 박 변호사는 검사가 됐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인연으로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는 등 역사학계에서도 활동했다.

장 명예총장은 박 변호사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 “박군이 졸업 직후 나를 찾아와 주례를 서달라고 했다. ‘나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총장도 아닌데 왜 나한테 부탁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때 박군이 ‘주례를 서주시면 오히려 영광’이라면서 간곡히 부탁해 응했다. 서울 강남의 작은 결혼식장에서 혼례를 치렀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정보기관에서 박군의 주례를 어떤 야당 인사가 서는지가 관심사였다고 했다. 결혼식 하객들이 대부분 운동권 출신들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들었다. ‘박원순의 주례를 왜 보수 인사가 맡느냐’면서 수군거리는 이들도 있었다.”

박 변호사는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할 때도 장 명예총장을 종종 찾아갔다. 장 명예총장은 “박군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를 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우리 대학병원 보험을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을 통해 들어주고 거기서 나온 이윤으로 운영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해준 적이 있다. 아름다운 가게를 할 땐 장소가 없다고 해서 대학 내 공간을 빌려주기도 했다. 집사람과 며느리는 평소 내가 입던 옷까지 전부 기증을 했다. 며느리는 지금도 아름다운 가게의 후견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살아온 방식대로 문제 풀 수 없는 곳”

장 명예총장은 박 변호사가 서울시장 출마를 밝혔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사람(박 변호사)이 서울 시정을 책임질 만한 경험을 쌓은 건 아니다. 시정이라는 건 아래에서 위까지, 잘사는 사람부터 못사는 사람까지 두루두루 행정적으로 처리해야 할 게 많다. 이해관계에 따라 집단행동을 하는 사람도 넘쳐난다. 삿대질도 당할 수 있고 집무실이 점거될 수도 있는데 그가 살아온 방식대로는 문제를 풀 수가 없다. 과거 시장들이 못나서 당했던 것만은 아니다. 깨끗한 박원순이 들어갈 곳이 아닌데…. 내게 조언을 구했다면 나는 만류했을 것이다.”

장 명예총장은 “박군도 시장이 되면 불가피하게 공권력을 동원해야 할 때가 생길 것이다. 그 상황에 닥치면 본인도 자신을 지켜본 시민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 명예총장은 박 변호사를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그 사람은 대기업이 변칙 상속을 하고 몇천억원의 이익을 챙기는 현 상황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의식도 강했다. 탈세 차원에서 하는 자선사업이나 장학재단 설립도 문제라고 봤다. 이런 걸 바로잡아 사회에 환원하는 문화를 추구했었다. 현실정치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세훈 전 시장의 가벼운 행동이 박군처럼 깨끗한 인물을 요구하는 환경을 조성한 건 사실이다.”

“기득권 정치와 결합, 순탄치 않을 것”

박 변호사는 노무현 정권에서 단국대 관선 이사로 파견 제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이를 거부했다. 장 명예총장은 “당시 박군은 학교와 나에 대해 변함없는 신뢰를 보내준 사람”이라고 말했다.

“노 정권에서 단국대 부지 개발사업에 눈독을 들이던 세력들이 나를 몰아내고 건설업자 출신을 이사장으로 앉히려고 한 적이 있다. 학내외의 반발로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나중에는 박 변호사를 이사장으로 보내려고 당시 교육부 장관이 직접 전화까지 했는데 박 변호사가 거절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다. 모교에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역할을 맡지 않았다.”

장 명예총장은 박 변호사가 서울시장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난관이 적지 않다고도 했다. 지금처럼 시민 후보를 유지하는 게 맞지만 현실적으로 정당의 도움 없이 선거를 치르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득권 정치와의 결합 과정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장 명예총장은 “그 사람 말대로 선거는 본인이 아무리 유명해도 혼자서 치를 수 없는 사안”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장 후보로 한동안 이름을 올렸던 안철수씨도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단국대 의대에서 학과장을 지낸 바 있다. 공교롭게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돌풍의 주역이 된 시민사회 후보들이 장 명예총장과 남다른 인연을 가진 인물들이다.

김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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